330화
보리스와 허크만의 훈련(대련)을 보면서 군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는 종종 시간이 날 때마다 직접 아들의 훈련을 봐 주고는 했다. 때문에 보리스의 발전 속도라든지, 놀라운 재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보리스가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움직일 줄 모르면서도 나무로 된 검을 쥐었을 때부터, 군터는 아들에게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작았던 몸이 자라면서 보리스의 재능은 그야말로 꽃을 피웠다. 그렇게 피어난 재능은 군터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기울어진 시선을 제하더라도, 군터는 이러한 재능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살라스나 할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내 어렸을 적보다도 더 낫군.'
물론 단순 비교는 힘들다. 그는 보리스의 나이였을 시절에 훈련은커녕 조금이라도 더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거친 부족 사내들의 눈치를 봐야 했었으니까. 유복한 환경에서 아무 걱정 없이 친절한 가르침을 받은 보리스와는 다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보리스의 재능은 분명 감탄이 나올 정도로 특별하다. 군터는 그것이 자랑스러우면서 즐거웠다.
군터는 평소 칭찬에 인색했다. 이제 슬슬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아들의 자신감이 자만이 될까 싶어서였다. 사실, 지금도 그런 기미가 조금씩 보이고는 있었다.
'오만함을 꺾으려면…충격을 주는 것이 가장 좋긴 할 터인데.'
다만 그렇게 하려면 다소 험한 방법을 써야 하는데,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아직 보리스는 어리다. 게다가 벨리사가 알게 되면 크게 속상해 할 것이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할렌이 물었다.
"보리스에 대해 생각했다."
"예? 공자님께 무슨 문제라도."
"근래에 자신감이 꽤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오만함으로 변질될까 싶어서 말이다."
"하핫! 공자님의 나이에 그 정도면 충분히 오만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미리 꺾어두지 않으면 언제고 한 번 꺾일 때 크게 다칠까 싶어서 그런다."
"으음. 괜찮지 않습니까? 공자님의 나이가 이제 갓 열 살을 넘었는데, 너무 이른 걱정이 아니신가 싶습니다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부모의 본성이다.
'욕심이지.'
그러한 욕심이 곧 본성이다. 군터는 어쩌면 마음을 고쳐먹어야 할 사람은 보리스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이 제법 차구나."
"예. 올해는 눈이라도 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째 구경도 못해보고 있으니 원."
동감이었다.
고향에 있을 때, 눈은 불청객이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풀들이 죽기 시작하고, 움직이는 생물들은 움츠러든다.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눈이 도움이 되는 곳이라고는 녹여 마셔서 갈증을 달랠 수 있다는 것 정도인데, 그래도 눈이 주는 이로움보다는 괴로움이 훨씬 컸기에 초원인들을 눈을 하늘의 저주라고 불렀다.
제국으로 넘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도 그렇지만, 특히 눈은 물류의 이동을 늦추거나 심한 경우에는 아예 틀어 막아버린다. 제국에서도 하늘에서 하얀 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눈살을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하기 일쑤였다.
분명 그랬었는데, 이제는 가끔 그 원망스런 하늘의 저주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1차 재건전쟁 이후 베이고르 전역의 기후가 송두리째 변했다. 1년에 반 이상 땅을 덮었던 눈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타르가이 베르겐이 일으킨 기적은 그가 죽었음에도 여전히 유지 되고 있었다. 눈을 보려면 북쪽 너머, 갈색 초원까지 들어가거나 아예 제국이 있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얇은 옷차림이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만, 가끔은 두툼한 가죽을 덧대어 입었던 예전이 떠오릅니다."
"배부른 투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하하. 물론입니다. 그냥 생각이 난다 정도지 그때가 더 좋았다, 그런 것은 아니니까요."
여섯 영지의 연합 훈련과 관련하여 살필 업무가 쌓인 탓에 늦게까지 관청에 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급한 일을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어두운 하늘에 별들이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따르는 병사 너덧과 할렌만을 거느리고 군터는 어둑한 길을 지났다.
"그래도 신병들이 제법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배들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런 것도 있겠지.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의 전투 방식을 보고 들은 게 있기도 하겠고."
신병, 즉 초원의 전사들은 우려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코누다이안군의 방식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초원의 방식보다는 이쪽의 방식이 더 단조로우니까."
"확실히…그렇긴 합니다."
같은 기마라고 해도 초원의 전사들과 베이고르의 기병은 전장에서의 역할이라든지, 전투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
베이고르, 나아가 제국의 기병 같은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다. 그들은 몸을 대부분 가리는 철제 갑옷을 착용하며, 그들이 타는 말들은 그런 무게를 이겨낼 수 있는 덩치 큰 전마들이다.
그들은 적을 정면에서 들이쳐서 근접전을 벌인다.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의 진형을 흔들고, 깊숙이 파고든 후에는 마상의 이점을 활용하여 적을 상대한다.
반면에 초원의 전사들은 가벼운 무장에다 날렵하고 오래 달릴 수 있는, 비교적 체구가 작은 말을 탄다.
그들의 역할은 근접전이 아니다. 그들은 원거리에서 활로써 적을 견제한다. 또한 나아가 적의 측면, 혹은 후방을 교란시켜 적의 발을 묶는다. 그렇게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기세를 꺾는 것이 그들의 주 역할이다.
그들이 적에게 돌진하는 것은 대개 달아나는 적의 뒤를 추격할 때 정도뿐이다. 그러니까, 본래는 그렇다는 뜻이다.
그런데 타르가이 베르겐이 이끌던 군대는 달랐다.
그들은 적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르바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바피들은 두텁고 무거운 무장 없이도 중무장한 병력을 한참이나 상회하는 파괴력을 낼 수 있으니 정면에서 부딪치는 것을 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르바피가 아닌 이상, 초원 전사들의 전투 방식은 대개 상술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오룸과 함께 귀순한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기존에 익히고 행한 방식에서 벗어나 베이고르의, 코누다이안의 전투 방식을 익혀야 했다.
몸에 완전히 배어버린 것을 지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할 줄 아는 선배들이 즐비한 것이, 익혀야 할 새로운 방식이라는 것이 좋게 말해 상당히 간단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오히려 기존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안 되는 녀석들을 닦달하면서 기사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열 발 중 네 발 정도는 대강 원하는 방향으로 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천이 다 찰 때쯤이면 어느 정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할렌의 말에도 군터는 혀를 찼다.
"열 발 중 최소 일곱 발은 맞출 수 있어야 한다. 대강이 아니라 정확히 원하는 곳에."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기병대는 초원의 전사들처럼 멀리서 활을 쏴 적의 기세를 꺾을 수도 있으면서, 언제든 과감하게 적진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이었다. 초원과 내륙 기병의 장점만을 합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룰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기병대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바보라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이제껏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들어간 시간과 비용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특히 비용이 그렇다. 재정관에게서 볼멘소리가 나올 만큼 막대하다는 것밖에 모른다.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소리도 몇 번인가 들었다. 물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무시했다. 단지 그는 막시밀리언에게 최고의 기병대를 만들겠노라 말했다.
막시밀리언은 허락했고, 때문에 지금도 군터는 얼마나 병사들에게 들어가는 돈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가 머릿속에서 그리는 기병대를 만들기 위해 병사들을 몰아붙였다.
느리지만 조금씩 성과가 나타났다. 순차적으로 신병들을 받아들이며 늘어나고 있는 병력이 계획한 이천에 닿을 즈음이면 부족한 대로나마 그가 바란 기병대가 꾸려지지 않을까.
"정말 장관일 겁니다. 그때가 되면 폴사도건 뭐건 다 눈 아래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조용한 거리를 이동하던 때였다.
"……!"
느닷없이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낀 군터는 재빨리 말 위에서 몸을 날렸다.
"피해라!"
"헛!"
뜬금 없는 지시에도 할렌이 재빨리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자그마한 막대기 같은 것들이 말들에 꽂혔다.
히히히힝!
'화살?'
일반적인 화살과는 달랐다. 보통의 화살보다 삼분지 일은 더 작은 듯했다. 날아든 화살의 일부는 말들에게 박혔고, 또 일부는 말 머리 위로 지나갔다. 조금만 뛰어내리는 것이 늦었더라면 화살이 몸에, 아마도 높은 확률로 목이나 머리에 박혔으리라.
챙!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할렌이 이를 바득 갈며 외쳤다.
"위다!"
그늘진 건물 몇 채의 지붕 위. 시커먼 복장을 한 이들이 보였다.
"도적 놈들일 리는 없고, 암살자인 것 같습니다."
"암살자라."
경험해 본 적 없는 부류지만, 그리 낯설지는 않다. 의뢰를 받고 사람을 죽여주는, 그런 놈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누가 날 죽이려 하는가."
"잡아서 심문해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가 많다. 방심하지 마라."
"쥐새끼처럼 숨어서 칼질하는 놈들 따위, 우습지요."
암살자들이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지형의 이점을 포기하는 듯한 행위에 군터는 의아했지만, 곧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뒤에도 있군."
그들이 지나온 길 뒤편에서 비슷한 복장을 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수가 열을 넘었다. 앞을 막아선 자들까지 합하면 대략 서른 가량. 그에 반해 이쪽은 여섯.
"철저하게 준비했군."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러나, 어차피 달아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암살자들은 무기에 독을 바르기도 한다더군. 주의해라."
"옛."
군터는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는 암살자들을 주시했다. 칸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