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코누다이안, 센트리올, 사보스, 젠탄테르, 아힌키우스, 아모트의 여섯 영지가 협정을 맺었다.
서로의 관인(官認)을 득한 상단에 통행세를 걷지 않으며, 일정 주기로 연합하여 군사들의 합동 훈련을 치르는 등 협력관계임을 대외적으로 크게 드러냈다.
리에론 공작 쪽에서의 특별히 드러나는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남쪽의 커닐레이 백작 쪽에서 부글부글 끓는 듯했으나, 그 역시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영주들이 영지를 어떤 식으로 이끌든 그것은 오롯이 영주의 재량이다. 거기에 대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왕이라 할지라도 신중해야 하는 일이라, 고위 귀족이라 해도 일개 영주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지금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군 그래."
"당분간은 잠잠히 있겠지요."
"당분간인가."
"우리가 리에론과 갈라섰다는 것을 압니다. 여섯 영지가 뭉쳤으나, 그 결속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 커닐레이 백작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분열을 시키려 하겠지요."
"국왕이 리에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인가."
위벨이 고개를 숙여 답을 대신했다.
국왕이 분열의 수단으로 삼은 이가 바로 막시밀리언이었으니, 당사자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조금은 겸연쩍은 일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배신자라는 건 불명예스러운 수식어임에 분명하니.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대비를 할까. 무력으로 위세를 부려 억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지. 그렇다고 폴사도와 영지전을 벌일 수도 없어. 남 좋은 일만 시켜주게 될 테니까."
"영주들로 하여금 이득을 취하게 하십시오."
"음. 단맛을 느끼게 해주라는 것인가?"
"영주님과 떨어지는 것보다 함께하는 것이 더 득이라 느낀다면 그들이 어찌 영주님을 떠나겠습니까. 영주님께서는 전국의 암상에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으며, 그늘 밖에도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제국과의 교역로까지 쥐고 계시지요."
어찌 모르겠는가. 위벨이 말한 것은 그 역시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가진 이권으로 창칼을 날카롭게 벼린다면, 그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내 통제력이 약해지겠지."
자그마한 강아지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개가 될 것이고, 어쩌면 주인도 못 알아보는 들개가 될지도 모른다. 막시밀리언은 그것을 우려했다.
"그만한 배짱을 지닌 이들이었다면 지금처럼 영주님의 부름에 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막시밀리언은 곧 수긍했다.
"그래. 자네의 말이 옳아. 내가 생각이 짧았군. 어쩌면 조금, 조급함과 불안함에 잠겨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
"많은 것을 헤아리셔야 하는 위치에 계십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때는 더 그렇겠지요."
"맞네.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디뎌도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거든."
약자들을 앞에 둔 강자가 된 마냥 위세를 부리고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동부에 한정된 것일 뿐이다. 최고 권력자들이 매 순간 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수도는 말할 것도 없고, 동쪽으로 조금만 시선을 옮겨도 코누다이안을 내려다보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들이 아직까지는 동부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아직까지'일 뿐. 언제 상황이 변할지 알 수 없다. 그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게, 설령 그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최대한 그 시기를 늦추기 위해 그는 지금도 있는 노력 없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위벨이 물러간 후, 막시밀리언은 코르넬을 불렀다.
"신병들의 소집은 끝났는가?"
"예. 말씀하신 대로 연고 없는 자들 중에서 추려 모았습니다."
"좋아. 제대로 쓸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걸리겠나?"
"확언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평범한 병사로 쓰기 위해서라면 반 년 정도를 잡겠으나……."
"시일에 쫓겨서는 안 되네. 느리더라도 제대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도록, 은밀히 진행하도록 하게."
"예."
"진작부터 했어야 하는 일인데 너무 늦었어. 겨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감찰대장이 알아차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오히려 모르면 더 문제야."
새로운 특수부대의 창설은 감찰대를 견제하기 위한 용도도 있다. 명색이 감찰대장이나 되어서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리라.
"안다고 해도 별 수 없을 걸세. 감찰대의 역량은 영외로 다수 투입되어 있고, 나머지도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한동안은 과부하 상태가 계속해서 이어지겠지."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 반이라면, 이렇게 되도록 의도한 것도 또한 반이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행사에 감찰대의 손길이 뻗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영주님. 이번 일에 군터까지 배제하심은……."
"온전한 나만의 그림자를 만든다 하지 않았나."
믿고, 믿지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란 결코 무조건적이지 않다. 믿음이란, 어디까지나 여건이 충족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발하는 것.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에게 사내의 마음이 쏠리는 것과 같다.
충성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권력자라면, 만인의 위에 선 자라면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충성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여건을 만들고, 그러한 자연스러움 위에 군림해야 한다.
"자네가 칼을 쥔 채로 할 수 있는, 날 위한 마지막 임무일세."
"이 몸을 다 바쳐서라도,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내 자네를 믿지."
주름진 얼굴을 눈에 담은 막시밀리언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
보리스라는 이름이 있지만, 보리스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보다 '공자' 혹은 '공자님'이라 불리는 것이 더 익숙했다. 그의 부모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를 그리 불렀으니, 보리스는 어렸을 적에 '공자'가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공자님."
걸어가다 마주친 하인들이 공손히 몸을 숙인다. 보리스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살짝 말아 쥔 손과 걸음걸이에는 여느 때와 달리 힘이 넘쳤다. 각오에 찬 그의 마음에 몸이 절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이야말로 꼭!'
저택의 한쪽에 마련된 연무장. 그곳에는 이미 한 사내가 여유로운 얼굴로 보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바로 시작해."
"괜찮으시겠습니까? 몸을 좀 푸시는 것이 어떨지."
"괜찮아. 이미 아침에 풀어두었으니."
"그러시다면야."
사내, 허크만은 득달 같이 달려드는 보리스를 차분하게 맞았다. 키는 그보다 머리 반 개가 작지만, 목검에 실린 힘만큼은 경시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지만, 이 꼬마 도련님의 힘은 어지간한 성인 남성 수준에 달했다. 게다가 검술 솜씨 역시 고련을 거친 병사들에 못지 않으니, 그로서도 마냥 여유롭게 상대할 수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상식적이지 않다.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면 모자란 놈이라고 타박이나 들을 것이 분명하다.
'역시 씨가 다르다는 거지.'
코누다이안은 당연하고, 베이고르 제일의 용사라는 말까지 드문드문 들리는 군터다. 이 꼬마 도련님은 그런 아버지의 피를 이은 만큼 평범한 기준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것을 지난 세월 동안 줄곧 느껴왔다.
'곧 따라 잡힌다.'
발전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하루하루가 다르다는 말이 꼬마 도련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지!'
길게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스승이라 불려도 겸연쩍지는 않을 만큼은 함께 했다. 언젠가, 머지 않아 따라 잡히게 되더라도 될 수 있는 한 그 시기를 늦추고 싶었다.
스승으로서 잘난 제자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과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밀리고 싶지 않다는, 얄팍한 경쟁심이 공존한 탓이다.
'한심하고, 우습구만.'
처음에 공자님의 훈련을 지도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는 귀찮은 일을 맡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맡은 일은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느끼게 됐다.
경외, 혹은 열등감이라고 해도 좋다.
땅을 걷는 짐승이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며 느끼는 감정일까. 그에게는 처음부터, 그리고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세상을 시원스레 노니는 꼬마 도련님.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자니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타악!
매서운 공격. 제때 막아냈지만 손목이 시큰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어린 도련님을 위한 것이다. 동시에 사적인 욕심이다.
곧 시야에서 사라져버릴 것을 알면서도, 날갯짓하는 새를 계속해서 눈에 담음이다.
"크악!"
발을 걸면서 어깨로 부딪치니 보리스가 뒤로 밀려 넘어졌다. 재빨리 일어서려는 그의 목 앞으로 검 끝을 가져다 대니, 보리스는 씩씩 대면서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졌어."
"그래도 정말 많이 느셨……."
짝짝짝-
볼이 바람이 들어간 보리스를 달래주려던 허크만이 말을 멈췄다. 박수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장주님."
"제법 좋은 구경이었다."
"아버지!"
보리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방금 전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생각한 것일까. 갑작스런 군터의 등장에 당황한 와중에도, 허크만은 그런 어린 도련님의 모습이 퍽 귀여워 보였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자존심 하나 만큼은 그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으리라.
"많이 늘었구나. 하지만 아직도 어설퍼."
"으으."
"왜 졌는지 알겠느냐?"
"그야…제 솜씨가 부족하고, 힘이 모자라서."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크다."
"예? 그럼 어떤……."
군터가 다가왔다. 허크만은 흡사 거대한 사자 한 마리가 걸어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호흡을 거칠게 하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사실 네가 말한 힘이나 기술 같은 것은 별로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네가 제대로 손 쓰지 못하고 패한 것은 네 마음이 네 몸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 어느 순간에라도 흥분은 금물이다. 조급함 역시 마찬가지."
큼지막한 손이 보리스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네가 힘에서, 기술에서 밀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공세를 나서기보다는 수세에 머무르면서 틈을 엿봤어야 했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네."
"어째서냐?"
"그건……."
"흥분해서지. 허크만은 중간중간 널 도발했고, 너는 그에 넘어가서 부족한 와중에 또 틈을 보였다. 이러니 어찌 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보리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군터는 그런 아들의 머리를 쓸어주며 고개를 돌렸다.
"허크만."
"예 장주님."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자네가 말해줄 생각이었나?"
"어…예.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군. 보리스를 다 가르치고 나면 자네에게 교관직을 내릴까 하는데, 어떤가."
"소관이야 장주님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그 어떤 자리에서든 모든 힘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앞으로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들 녀석을 잘 부탁하지."
허크만의 허리가 더 숙여졌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