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이전과는 달랐다.
변함 없이 시끌시끌하고, 화려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잘 오셨소."
"전에 뵈었을 때보다 더 좋아 보이십니다."
"하하! 그렇소? 조금 소홀히 했던 수련을 근래에 다시 열심히 하고 있다오. 검에 기름칠도 매일 빼먹지 않고 하고 있지."
마주한 영주가 어색하게 웃는다. 막시밀리언은 모르는 척 껄껄 웃으며 손짓으로 그를 안내했다. 예의를 차렸지만 동등한 상대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은연중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을 행하는 자나, 받는 자나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이 맞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위벨."
이번 연회를 위해 코누다이안의 중신들이 모두 위글로우로 집결했다. 위벨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명하십시오."
"귀빈들은 다 만났지. 나머지 손님들은 자네가 맡아서…부족함 없이 맞이하도록 하게."
"예."
이전에 영주들이 위글로우에 모였을 때, 그들은 동등한 손님이었다.
하지만 지금, 막시밀리언은 다시 모인 이들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았다.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되 확실하게 상석에 앉아 그들을 맞이했다.
작위에 따른 고하나, 주인과 손님의 입장 차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코누다이안의 초대장을 받고 초대에 응했을 때부터 이미 그들은 이러한 관계에 동의한 것이었다. 코누다이안을, 막시밀리언 코누디스를 동부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따르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모두들 잘 와주셨소. 이렇게 보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군."
영주들이 자리한 회담장.
군터는 위벨, 미트라스와 함께 영주의 뒤편에 서서 자리를 채웠다. 영지의 중신으로서 영주를 보필하는 역할임과 동시에 자리한 영주들에게 압박감을 주기 위한 배치였다.
많은 수의 병사들은 필요 없다. 칼을 차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저 평범한 차림을 하고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영주들은 긴장했다.
군터는 자신을 흘깃거리는 시선을 느꼈다.
저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설마하니 이 자리에서 맨손으로 자신들의 목을 꺾기라도 할까 봐서일까? 아니, 물론 그건 쉬운 일이지만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그든 막시밀리언이든 뒷감당을 할 수가 없다. 그걸 저들도 알 것인데, 저렇게까지 굳어있을 필요가 있을까.
'아…그렇군.'
문득 깨달았다.
저들은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을 통해서 코누디스를 보고, 그 힘을 두려워하는 것뿐이다.
저들은 자신을 무엇으로 보고 있을까. 칼? 창? 도끼? 이런 병기들이 아니라면, 혹 사냥개 정도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내 뜻을 알았으리라 보오. 여러분들이 이번에 내 초대를 거절치 않고 여기에 온 것은 내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뜻이겠지."
"코누디스 자작님께서는 어디까지 보고 계십니까."
진중한 인상에 가만히 있어도 기품이 흐르는 중년인, 사보스 영주가 말했다.
"어차피 우리의 처지는 같소. 중앙에서 멀찍이 떨어져 이 동부에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제국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는 것이 우리에게 내려진 책무지. 여러분들 중 누구도 원해서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는 없을 것이오."
두려움이 가셨다. 막시밀리언은 동질감으로 자신과 다른 영주들을 묶었다.
"당장 나라의 대소사가 왕도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곳에 가지 못하오. 아니지. 말을 조금 잘못 했군. 언제든 마음대로 갈 수는 있지. 하지만 거기에서 무슨 목소리를 낼 수 있겠소? 남들이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하다가 고개나 몇 번 까딱이는 것이 전부일 텐데. 그렇지 않소이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미 다 정해진 것을 전달 받고 그대로 따르는 것뿐이오."
"말씀이 조금 과하신 것 같습니다."
아르테가 센트리올 남작. 동부의 유일하다 봐도 좋을 왕당파 영주다. 그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꿋꿋이 할 말을 했다.
"왕도에서의 결정은 모두가 국왕 전하께서 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하로서, 왕도에서 어떠한 명이 내려오든 마땅히 그를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막시밀리언이 몸을 뒤로 기대며 손에 깍지를 끼었다.
"옳은 말이오. 우리는 모두 나라의 신하이며, 국왕 전하의 신하이지. 허나 신하의 책무는 그저 군주를 섬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오."
"무슨 말씀이신지."
"군주를 바르게 섬기는 것이 신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오. 섬기는 군주가 잘못된 길로 가려 하실 때는 마땅히 간언을 해서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하지."
"……."
"작금의 중앙정계를 보시오. 두 권신이 나란히 권력을 나누며 왕국의 대소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이끌고 있지 않소."
"어찌 그런 불경한 말씀을 하십니까."
"국왕 전하를 향한 그대의 충심은 내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는 조금 더 솔직해지는 것이 어떻소?"
"대체 무엇을……."
"힘들지도 않으시오? 왕도에서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서 홀로 목소리를 낸다고 그대가 무엇을 이룰 수 있으며, 전하께서는 무엇을 알아주시겠소? 또 알아주신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오?"
"신하로서 할 말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렇소? 난 오히려 신하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언의 대치 후, 먼저 피한 것은 센트리올 남작이었다.
"누구도 우리를 돌봐주지 않소.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리에론 공작의 막하에 있었소. 통혼까지 했었지. 그러나 나는 내 몫을 스스로 챙겨야 했소. 살펴준다는 것은 말뿐이었고, 헌신만을 강요 받았지. 내가 스스로 나서서 손을 뻗지 않았다면 수 년간 그를 따랐어도 난 지금 아무 것도 쥐지 못했을 거요"
별로 설득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있었지만 막시밀리언은 그들의 반응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저들은 그저 어쩔 수 없이, 혹은 나름대로의 계산을 거치고 나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겠다 싶어 이 자리에 온 이들.
'그거면 충분하지.'
충성을 바라지 않는다. 그건 과욕이다.
"언제까지 찬바람을 맞으며 있을 수만은 없소. 우리의 목소리를 조정에 전할 필요가 있으니, 그를 위해 우리는 뭉쳐야 하오."
"으음."
"흘러간 시간은 다시 쥘 수 없소. 그러니 쓸데없이 끌지 마십시다. 내가 여러분을 청한 까닭도, 여러분이 내 청에 응한 까닭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소."
"…자작님의 뜻을 가늠하고 싶습니다."
가늠한다 함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묻는 것. 막시밀리언은 뒤로 뺐던 몸을 다시 앞으로 당겼다.
"건물을 지탱하는 데 기둥이 두 개라면 너무 적지 않소. 비나 피할 자그마한 집도 아니고 많은 이들이 머무는 큰 집이라면 더 그렇지."
"그 말씀은, 또 하나의 기둥이 되시겠다는?"
"나라를 위해서도, 국왕 전하를 위해서도 이로운 일이 아니겠소. 타칸을 병합한 이때, 하나 남은 잠재적인 대적은 제국이라 할 수 있소. 그리고 그 앞에 선 것은 우리요. 우리야말로 베이고르의 성벽이요 방패라 할 수 있으니, 방패와 벽은 두터울수록 좋지 않겠는가."
"스스로 두터워지는 방패며 성벽이 어디에 있답니까."
막시밀리언은 대답 없이 웃었다.
그가 잔을 들고 영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영주들도 하나 둘씩 잔을 들었다.
"이 가슴 안에 충심을 담았으니,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일들이 베이고르와 국왕 전하를 위한 것이라 확신하오. 허나 영지를 비우고 수도의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이들도 우리와 같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는군."
탁!
"실망스럽군요 코누디스 자작님. 리에론 공작님과 불화가 있으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 하여 어찌 근거도 없는 비방을 하시며 본질을 흐리십니까."
묵묵히 듣고만 있던 군터가 센트리올 남작을 쳐다보았다.
'뭘 믿고 있는 거지?'
아무리 이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해를 가할 수는 없더라도, 센트리올 남작의 입장에서는 코누다이안에 밉보여서 좋을 것이 없다. 당장 덤펠드를 비롯한 세 영지에 어떤 식으로 일이 벌어졌는지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저렇게나 뻗대는 이유가 무엇일까. 믿는 구석이 없다면 저럴 수는 없다. 그가 알기로, 센트리올 남작은 대범함으로 이름이 난 자가 아니었다.
"본질을 흐리다니. 어찌 말을 그리 하시오. 나야말로 실망스럽군."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그리 똑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 그리 어리석은 자도 아니오. 아무리 화가 치밀었다 하나, 설마하니 믿는 구석 하나 없이 저 리에론 공작과 척을 졌겠소?"
"그 무슨……."
"말했듯이…나는 베이고르의 신하요, 국왕 전하의 신하네."
"……!"
무언가를 깨달았을까. 슬쩍 붉어졌던 센트리올 남작의 얼굴이 한 순간에 돌덩이라도 된 양 굳었다.
"그대는 나보다 현명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셨겠지."
"……."
하고픈 말이 많아 보였으나 그의 입이 더 열리는 일은 없었다.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한 얼굴이 되어 침묵을 지킬 뿐.
"우리가 힘을 모은다면 두 공작에게 굴하지 않고 우리의 뜻을 전하께 직접 전할 수 있소. 이는 나라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크게 득이 될 일이니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오."
유일하게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던 센트리올 남작이 조용해지자 일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날의 자리가 있은 후에 막시밀리언과 독대를 한 후에는 센트리올 남작마저도 그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둘이 무슨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몰라도, 대화가 있은 후에 센트리올 남작은 상당히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우리가 같은 수레에 올랐음을 알려주었지. 그 어리석은 작자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더군. 얼마 안 되는, 소위 왕당파라는 이들 사이에서도 그의 위치가 그만큼 별볼일 없었다는 것이겠지."
막시밀리언이 센트리올 남작을 비웃었다.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단순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도록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었기 때문이리라.
"어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요."
"내가 원했으니까."
위벨이 눈을 좁혔다.
막시밀리언은 그를 보며 씩 웃고는 몸을 돌렸다.
"내 세력을 일군들 바로 옆에 왕의 추종자가 있다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지 않겠나? 하여 잘라내 달라 했네."
"언제 그런 일을."
"물론 처음부터 요구했지. 바라누엔 백작이 날 찾아왔을 때부터."
센트리올 남작 본인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왕에게 버림 받은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목에 힘을 준 채 따박따박 대들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 막시밀리언은 다시 한 번 비릿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