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위글로우가 북적거렸다. 이전에도 종종 이럴 때가 있었지만 이번엔 특히 더했다. 영주가 직접 나와서 확인할 정도로 이번 행사에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영주가 그리 나오니 그 밑에서 일을 보는 자들은 분주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위글로우는 성대한 축제를 맞은 것마냥 도시 전체가 들떴다.
"위글로우의 시민들은 행복할 겁니다."
"어째서?"
"매 년 몇 번씩 이렇게 도시가 시끌시끌해지니 심심할 틈이 없을 것 아닙니까."
바오룸의 말에 할렌은 코웃음을 쳤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익숙해지고 나면 번거로움 밖에 남지 않아.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아무 일도 없더라도 그냥 조용한 게 좋을 거다."
"어떻게 아십니까?"
"응?"
"아니, 할렌님도 평범한 백성이었던 적은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뭐…그냥 그럴 거다 하는 거지. 나라면 그랬을 거라는 뜻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
"흐음."
"뭐가 흐음?이냐! 자식이……."
할렌이 걷어차려 다리를 뻗었지만 바오룸은 잽싸게 고삐를 당겨 거리를 벌렸다. 할렌이 작은 키는 결코 아니었지만 벌어진 말의 간격을 채우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그나저나 대단하군요. 한 마디 말로 위글로우를 넘어 코누다이안과 주변 모든 영지들을 이토록 분주하게 만들다니."
바오룸은 일전에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던 영주가 이다지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실감하고 있었다.
"대단하지."
긍정하는 대답치고 할렌의 목소리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꺼려하는 기색을 읽은 바오룸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제법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부족 내에서는 소족장의 지위로, 남 시선 신경 쓸 필요 없는 위치였던 그였으나 타고난 재치가 있었다. 비록 그 재치는 타고난 그의 위치와, 다소 급한 성미로 인하여 빛을 볼 겨를이 없었으나 요 근래에 들어 조금씩 그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할렌과 어울리며 파악한 바로, 할렌은 영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야 어떻든, 공식적으로는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갔다. 바오룸은 영주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짧게나마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코누다이안에 몸을 담은 이후로 영주의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다. 스스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으니, 영주에 대해서는 알 만큼은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가 본 바로, 영주는 영리한 자였다. 별 볼일 없었던 시절부터 꾸준하게 출세의 길을 밟아온 자였고, 기어이 자신만의 세력을 일구어낸 능력자였다.
판국을 보는 능력, 본 것을 토대로 계획을 짤 수 있는 머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실행해 옮기는 능력까지. 이런 자를 영리하다 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굴 영리하다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영리한 영주가 이 눈앞의 할렌과 맞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영주는…좋게 말해 영리하고, 나쁘게 말해 교활한 자였다.
'아니, 교활하다는 말은 조금 심한가.'
음. 대충 사내답지는 못하다고 해두겠다. 여기서 말하는 사내답다 함은, 일 처리가 떳떳하고 대범한 것을 이른다. 그런데 영주는, 필요하다면 음습한 짓을 저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증거는 없지만 정황이 그랬다. 무언가 은밀한 곳에서 일이 치러지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영주의 지난 행적에는 꽤나 있었다. 그리고 바오룸은 그 행적이야말로 할렌이 영주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군터에 대한 영주의 오락가락하는(그렇게 보이는) 신임이겠지만.
"전사들이 부대에 잘 녹아 들고 있어. 네 공이 없지 않겠지."
할렌의 뜬금 없는 칭찬에 바오룸은 재깍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쯧! 전엔 그렇게 미친 망아지마냥 굴더니, 이제는 왜 또 이리 재미 없어졌지?"
"…그때는 철이 없었지요."
누구나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절은 있기 마련이다. 지우기가 싫다면, 조금이라도 고쳐보고 싶은 시기가.
바오룸에게 있어 그 시기는, 그 순간은 뭣도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할렌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땅을 뒹굴었던 바로 그때였다. 소식 하나 없는 부친과 부족 전사들에 대한 걱정, 앞날에 대한 막막함 등으로 정상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다 변명일 뿐이다.
그때의 자신은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설쳐대던, 할렌의 말마따나 한 마리 미친 망아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이 되었으니, 망아지였을 때처럼 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곳에서 저는 아직도 이방인이 아닙니까. 하다 못해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행동거지를 조심해야지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하지? 너와 네 부족…아니, 너와 함께 온 자들은 모두 장주님의 이름 아래 들었다. 장주님께서 살피시는 이상 너희는 나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미 '우리'야."
"말씀 감사합니다. 아직은 어렵습니다만, 차차 익숙해지겠지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든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워진다.
'구분 짓는군.'
방금 한 말에서도 그렇다. '장주님의 이름 아래' 들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영주는 배제한 것 같은 내용이다. 할렌의 충성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한 마디였다.
그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은 이들이 무수하다. 군터의 밑으로 모여 있는 이들은 모두가 그렇다.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전력으로는 코누다이안 최고라 할 수 있는 자들이 군터의 이름 아래 똘똘 뭉쳐 있다.
'어쩌면, 영주가 군터 경에게 은근히 거리를 두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지.'
사람들은 영주가 군터를 이용해 미트라스를 견제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는 고려하지 않는다.
뭐, 그럴 만도 하다. 겉으로 드러낸 세를 보면 군터의 세는 미트라스에 비하면 다소 초라하니까. 게다가 군터가 워낙 밖으로 나오는 일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만을 살피니 권력에는 그다지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바오룸은 그런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군터를 따르는 힘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았다. 규모는 작아도, 수는 적어도 그들이 지닌 힘은 모르긴 몰라도 미트라스에 비해 그리 밀리지 않을 것이다.
영주는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작은 돌멩이처럼 크지는 않아도 단단히 뭉친 힘의 위력을 알고 있기에 은연중에 견제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
"군터 경의 집으로 드나드는 이들의 수가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명실상부한 코누다이안 군부의 2인자다. 그 무명이 높고, 영주의 총애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에게 줄을 대보려는 자들이 줄을 잇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막시밀리언은 수하의 보고를 들으면서 눈은 보고 있는 서류에서 떼지 않았다.
"수고했다. 이만 물러가 보아라."
"옛."
홀로 남은 막시밀리언.
그때 뒤편의 가림막 너머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가림막에 달려 있던 자그마한 장식들이 밀어내는 손길에 저들끼리 부딪쳐 소리를 내었다.
"내가 잠을 깨웠소?"
"아닙니다."
"그럼 어찌 나왔는가."
"그 자가 권신이 되려 합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 오히려 많이 늦은 감이 있어."
"그 자가 권력에 손을 뻗게 되면, 미트라스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해질 것입니다."
"아직도 그 소리인가."
막시밀리언은 탁! 소리가 나게 보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는 표정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라일라 역시 그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그를 견제하지? 일족의 원한 때문인가?"
"그것이 아님은 당신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알지. 하지만 정말 이유를 모르겠네. 단지 그가,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길'하기 때문인가?"
"그의 안에는 흉험한 존재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의 손에 들러붙은 원혼의 수만 해도 수백은 될 테니까. 그는 범인(凡人)이 아니니까. 제국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위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인재요. 당신의 그 뜬구름 잡는 말만 듣고 그에게 억하심정을 품을 수는 없소. 그는 능력이 있고, 무엇보다 내게 충성하지. 내겐 그걸로 충분해."
"그는 불입니다. 사나운 불은 언제고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 당신을 해칠 것입니다."
"등 안에 담긴 불이 몸을 할퀸다면 그건 오직 불을 든 자의 잘못이오. 주의를 소홀히 한 탓일 뿐, 불의 탓이라 할 수는 없소."
"불은 불이기에, 그 자체로 위험합니다."
"불이 없으면 해가 지고 캄캄한 밤이 되었을 때 코앞의 돌부리도 볼 수 없지. 당신의 말처럼 위험하지만 유용하지.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니 그 어떤 것이든 다루는 자에게 달렸을 따름이오."
"저는 당신께서 모든 불길한 것과 멀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단지 그렇기에 드리는 말일 뿐,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라일라의 숙이는 듯한 말에 막시밀리언의 굳어있던 표정이 풀렸다.
"당신은 현명하지.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살피고 있는 신이 당신에게 귀띔을 해주는 모양이지만, 그 신의 전언도 모두 들어맞지는 않았소. 기억하시오? 당신이 그토록 겁에 질려 벌벌 떨었던 죽은 신. 타르가이 베르겐은 전장에서 죽었소. 당신은 세상이 끝날 것처럼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는 결국 인간의 창칼에 죽었단 말이오."
"……."
"신은 강대하지. 부정하지 않겠소. 하지만 인간의 세상이오. 신의 뜻만으로 굴러가지는 않아. 당신은 깊은 곳에서 들리는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인간의 세상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들이 그리 강대했다면 어째서 신들은 지금의 세상에 보이지 않겠소? 그들은 강대했지만, 결국 지금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오. 그 이유를 알고 이해하라는 뜻이오."
가볍게 웃은 막시밀리언은 그녀를 한 번 안아준 뒤 씻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
막시밀리언이 방을 나가고,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라일라는 나직이 읊조렸다.
"인간의 세상."
초를 태우며 시들어가는 불빛이 영롱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