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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25화 (325/1,064)

325화

사실 원래는 바오룸도 부르지 않을 계획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몇 안 되는 측근들만 불러 모으려 했었다.

그런데 문득, 군터는 자신이 너무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영주에게 미운 털이 박힌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사람 만나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가.

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이제껏 너무 소극적이었다. 나름대로는 관심 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혹은 조심을 한다 정도로 생각하면서 자위했었지만…지금 와서 되짚으니 그저 소극적이었을 뿐이다.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신경을 썼었던 거다. 그 자신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에 대해,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늘 착각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이 온전히 알기에, 사람은 너무나 깊고 복잡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말이다.

'나는 나를 모른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와 같지 않으니, 오늘의 나를 조금 보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온전히 다 알았다 자부하는 것은 어리석고 오만한 짓이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알고자 노력하는 것. 그리고 오늘의, 또 내일의 자신을 그때마다 속이지 않는 것뿐.

그래서 불렀다. 바오룸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하지만 평소 가까이 하는 측근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이들까지.

어차피 언제고 되도록 가까운 시일에 이런 자리가 한 번쯤은 필요했었다. 미트라스가 그간 꾸준하게 자극을 해왔던 덕에, 그리고 이번에 마음을 새롭게 먹게 된 덕에 그 시기가 조금 빨라진 것일 뿐이다.

"장주님. 인사 올립니다."

이포레테스가 공손히 몸을 낮췄다. 군터의 후원을 받으며 상단을 이끌고 있는 그가 이런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자리를 피한 것이 아니라, 그간 군터가 한 번도 수하 무관들과의 자리에 다른 이들을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이런 자리를 마련한 적이 없었지. 내가 생각해도 그 동안의 나는 조심스러웠다. 틀린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은 과했지. 이번에 한 번 곤란한 일을 겪고 나니 생각이 좀 바뀌더군."

"어떻게 말입니까?"

할렌이다. 기대 어린 목소리다. 그의 목소리는 이 자리에 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통째로 대변했다.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 해도 바람이 흔들면, 흔들려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뿌리를 깊이 박고 억지로 버틴다면 버티겠으나, 누구를 위해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겠나.

"그래 바오룸. 미트라스가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던가?"

"달콤한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달아도 너무 달아서 귀가 다 썩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적어 미트라스 만큼 챙겨주지는 못한다."

"경. 저를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그저……."

바오룸이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말을 쏟아냈다. 그에 군터가 그의 앞으로 가,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어찌 모르겠나. 이해한다. 한 부족을 이끄는, 아니 이끌던 몸이 아닌가. 그들을 위해서라도 자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오룸은 조금 울컥한 얼굴이었다.

군터는 그가 자신에게 상당한 호의를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동족으로서의 호의가 아니라(그것도 조금은 있겠지만), 한 사람의 전사로서 갖는 호의요 동경이었다.

바오룸은 셈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며, 비열한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그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이제는 소족장도 아니지만, 어쨌거나그는 부족민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데 대해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얻어낼 수 있는 것을 얻어내려 하는 것이다.

사욕 때문이 아니다. 그렇기에 군터는 미트라스를 들먹이며 자신을 상대로 협상을 시도한 바오룸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껍게 여겼다.

그의 휘하 중 특색 있는 이를 두 명 뽑는다면 단연 살라스와 할렌이다.

살라스는 이성적이며, 날카로운 면이 있다.

반면에 할렌은 다분히 감성적이다. 날카롭기 보다는 거칠고, 차갑기 보다는 뜨겁다.

바오룸은 그리 길게 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간 본 것을 토대로 말하자면…앞선 두 사람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성미는 할렌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소족장으로서의 자각이 있기 때문인지 큰 일을 앞두었을 때는 종종 살라스처럼 이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좋고 나쁘고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책임감에 대함이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해줄 만큼은 해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삶을 꾸릴 것이며, 저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경의 휘하에서 몸바쳐 일할 것을 맹세합니다."

"좋지도 않은 머리로 저 정도 말을 짜내려고 머리가 아팠을 것입니다. 청컨대, 그 정성을 봐서라도 이전의 무례는 용서해주시지요."

할렌이다. 일전에 바오룸을 신나게 씹어댔던 것을 떠올려보면 지금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의외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오룸이 미트라스와 선을 대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을 때 누구보다 화를 냈던 그가 이렇게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하니, 그때 반감을 품었던 다른 이들이 별 말을 할 수가 없게 됐다.

명백하게, 할렌이 의도한 것이리라.

할렌은 불 같은 사내다. 한 번 타오르면 가까이 있기만 해도 데일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계기만 있다면 쉽게 꺼진다.

아마도 그는 속으로 바오룸의 사정을 납득한 것이리라. 그러니 이렇게 나서서 편을 들어주는 것이겠고.

'머리 좀 썼군.'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말로 편을 들었다. 조금 전까지 은연중 아니꼬운 기색을 얼핏 드러내던 이들이 이제는 입맛만 다시고 있지 않은가.

"한 잔의 술로써, 오해로 쌓인 그간의 섭섭함을 털어내지."

"한 잔이 아니라 열 잔, 백 잔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마시겠습니다."

바오룸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로써 기쁜 자리의 유일한 껄끄러움이 해결되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그간 서로 인사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군터의 주변으로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군터는 그들을 하나하나 상대해주었다.

"장주님. 일전에 말씀 드렸던 사람입니다."

"이름 높으신 군터 경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포레테스가 소개할 사람이 있다며 진작부터 말을 했었다. 상행을 다니며 이래저래 도움을 주고 받은 사이라고 했던가. 그 역시 상인이었다. 능력이 좋고, 주변의 평판도 좋은 자그마한 지역의 유지라던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군터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허락한다면 데리고 가겠다 했었다.

그것을 군터는 허락했고, 지금 그들은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샤익이라 합니다."

온순한 인상의 사내였다. 이포레테스의 말로는 상인으로서의 능력도 좋다 하는데, 겉으로만 봐서는 그저 마음씨 좋고 부유한 호인으로만 보였다.

"뒤쪽은?"

"아! 제 호위입니다. 호위라고는 하지만, 오래 전부터 저희 집안을 따랐던 친구라 가족과 다름 없습니다."

샤익의 뒤쪽. 가라앉은 눈빛이 인상적인 날렵한 체구의 사내가 있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관심 없게 넘겼으리라.

'이상하군.'

샤익의 호위무사는 평범했다. 눈빛이 깊다고는 하지만, 그런 자가 한 둘이던가.

특별히 기세가 풍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외형적인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시선이 갔을까. 샤익의 인상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심하여 무언가 다른 특별함을 찾고자 했던 걸까. 그래서 뒤편에 우두커니 선 자에게 눈길을 줬던 것일까?

"장주님. 함께 잔을 나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뭘 그런 것을 묻나. 얼마든지."

조금 더 길게 이어지려던 상념은 뒤이어 다가온 무리에 의해 깨졌다. 군터는 자리가 이어지는 내내,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이들과 잔을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머릿속에 작게 자리하고 있던 샤익의 호위무사에 대한 생각은 깨끗하게 지워졌다.

*

마차가 고요한 대로를 지났다.

"그 군터라는 자. 어땠소?"

샤익이 입을 열었다.

인심이 묻어나는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길게 자리가 이어진 탓에 그도 술 기운이 어느 정도 올라온 것이다.

"……."

섬기는 이가 물었음에도 사내는 침묵했다. 일개 호위무사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무례였으나, 샤익은 그를 문제삼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히려 조심스러운 태도로 호위무사를 대했다. 마치 상전을 대하는 것마냥.

마차 안에 흐르는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샤익이 목소리를 낮췄다.

"원하는 바를 얻었다면 좋겠소. 그게 아니라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지금이 너무 힘들 것 같으니."

은근히 자신의 노력을 알아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꾹 입을 다물고 있던 호위무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얻지 못했다.]

"으음.그렇다면 헛고생을 한 거요?"

[헛고생은 아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요?"

[확신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의심은 있다. 그 자는 무언가를 품었음이 확실하다. 하지만…….]

귀를 최대한 열고 흐려진 머리를 최대한 맑게 유지했지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샤익은 상대를 떠보기를 포기했다. 아무리 명령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엄연한 사람이었다.

몸을 담그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은 양의 술을,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마신 덕에 그의 몸과 정신은 이미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무식한 무부 놈들 같으니!'

샤익은 이를 갈았다. 자신에게 웃는 얼굴로 다가와 큼지막한 잔을 건네던 무수한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할렌이라고 하는 이름의, 얼굴에 굵직한 흉터를 훈장처럼 달고 있던 야만인 놈은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에게 받아 마신(거의 강요당한) 술만 해도 보통 사람 몇을 눕히고도 남음이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대충 몇 잔 마시고 쓰러진 척을 할 것을, 괜히 탐색해보겠답시고 버텨서 험한 꼴을 보고 말았다.

후회막심이지만 어쩌겠는가. 후회는 늦을 때 해서 후회인 것을.

깨질 것 같은 머리와 불덩이를 담은 듯 끌어 오르는 속을 힘겹게 달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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