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자작령이 된 코누다이안은 사실 자작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본래 남작령이었을 때도 크루기스의 절반 가량을 병합한 만큼 보통의 남작령들보다 훨씬 컸었고, 이번에 브록스를 또 다시 병합하면서 다시 그 크기를 배 정도로 늘렸다. 사실상 영지의 크기만 보면 어지간한 백작령 이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에 쓸데없이 크기만 큰 것도 아니었다. 코누다이안에는 비옥한 곡창지대도 있었고, 전란을 피해 왔다가 정착한 유민들로 인해 인구도 땅을 비우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 외에 어떤 면을 보더라도 코누다이안은 명백히, 한낱 자작령이라고 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영지였다.
그러나 이런 코누다이안에도 골치를 썩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 가장 큰 것이 동쪽으로 마주한 본다인이었다.
이제는 제국 7황자의 휘하로 들어간 그곳이 베이고르 최동단에 위치한 신생 코누다이안과 맞닿고 있었다. 아무리 현재 7황자 측과 베이고르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언제 제국의 군대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위험이 있으니까 말이다.
다만 이런 위험성을 코누다이안의 영지민들은 그다지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영주인 막시밀리언이 적극적으로 코누다이안의 군사력을 영지민들에게 과시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코누다이안의 군세가 도적들은 물론이고, 외적들도 충분히 막아낼 만큼 강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인데, 코누다이안의 영지민들뿐만 아니라 베이고르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백성들은 제국에 대해 그리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억하는 제국이란 엄청나게 크다고만 들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고르에게 패배한 나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게는 수십 년을 제국의 백성으로 살아왔지만, 실상 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아는 게 없는 만큼 두려움도 몰랐다. 아는 게 많아 제국의 일거수일투족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고위층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어느 나라의 나이 지긋한 귀족이 이런 말을 남겼다. 백성들은 무지할수록 좋다고.
그의 말은 비단 다스리는 자의 입장만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다스려지는 쪽, 즉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는 것이 없으니 걱정이 없고, 그러니 좋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상당히 좋아했다. 정확히는 그 말을 들어보고, 아는 사람들이 말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 사람들은 대개 권력층이었다. 사실, 그의 말을 들어보기라도 한 이들은 열이면 아홉은 권력자거나 그에 비견하는 이들이었다.
농사 짓기에 바쁘고 벌어먹고 살기에 바쁜 일반 백성들이 높으신 귀족나리의 말씀을 언제 들어봤겠는가.
"나도 이 순간만큼은 무지해지고 싶구만."
"어인 말씀이십니까."
코르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른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더 태연히 당당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막시밀리언은 씩 웃었다.
"지금 내 모습, 어떤가."
"좋습니다."
"더 자세히. 초조해 보이지는 않나? 안색은 어떻지? 창백한가?"
"전혀요. 평소와 같아 보이십니다."
"좋아."
귀한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귀하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손님이다. 칼 한 자루 쥐고 있지 않지만, 칼을 쥔 백 명의 적보다도 더 무서운 자다.
막시밀리언은 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코누디스 자작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베이오프 공.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머리를 단정히 뒤로 넘긴 체격 좋은 중년인이 싱긋 웃었다.
"이야기요?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자콥 전하께서 총애하는 신하라는 이야기였지. 전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대가 말을 하면 귀 기울여 들으신다지?"
"과장 된 이야기군요. 전하께서는 제 말뿐 아니라 모든 이의 말을 귀담아 들으십니다."
"호오. 그런가. 자콥 전하께서는 듣던 대로 명군의 자질을 지니신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제가 모시고 있는 분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제국의 주인이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지요."
"공의 굳은 충심이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겠군. 명군 밑에는 좋은 신하가 모이는 법이라더니, 그 말이 참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소이다."
"하하. 제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듣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러는 코누디스 자작께서도 베이고르에서 명망이 높으시지 않습니까. 국왕께서도 적잖이 총애하시는 듯하고요."
"능력에 어울리지도 않는 과분한 자리를 맡은 몸이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마냥 위태롭기 그지 없소. 내 오늘 공을 만나 내 이 불안이 가시기를 기대하고 있소이다."
"아! 그리 되어야지요. 저 역시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기분을 풀어주는 말들이 오간 뒤에, 본격적인 탐색전이 시작됐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베이오프라 불린 사내였다.
"일찍이 바라누엔 백작께서 자작님과, 아! 그때는 남작이셨군요. 아무튼,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었지요. 생각보다 그 날이 빨리 와 놀라울 뿐입니다."
"베이고르는 새로 일어난 나라요. 아직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 하지만 앞으로는 문제 없을 거외다. 난 계속 여기에 있을 것이고, 코누다이안 또한 그럴 것이니."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자작님도 아시겠지만, 전하께서는 큰 일을 앞두고 계십니다. 본격적으로 대업을 향해 나아가기 전에 등 뒤에서 번잡함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요."
"물론 그러시겠지. 거듭 말하거니와,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네."
"좋습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보지요."
베이오프가 품에서 자그마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돌돌 말려 있어 작았던 두루마리는 봉인을 제거하고 펼치자 곧 큼지막하게 변했다.
"부족한 몸이나 전하께 전권을 위임 받고 왔습니다. 고치길 바라는 곳이 있다면 기탄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어디까지나 기본은 두루마리 안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깔고 간다. 협상치고는 상당히 고압적이지만 막시밀리언은 아무 말 않고 태연히 두루마리를 들었다.
이들과의 관계는 단순히 코누다이안의 이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황자 한 명이 다스리고 있을 뿐이지만, 저 쪽의 세력은 베이고르와는 비할 수 없이 거대하고 강력하다.
거래라고는 해도 실상은 조공관계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낼 수 있는 목소리는 한정적이다. 이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에서 얼마나 고쳐달라 요구할 수 있을까.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숨기며 막시밀리언은 내용을 읽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상당히 일방적이고, 일반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 제법 무리한 요구가 적지 않게 쓰여 있었다.
'이건 여차하면 싸우자는 식이군.'
그는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7황자의 거칠고 오만한 성미가 글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은밀히 행한다고는 하지만 이 또한 외교일진대, 어찌 이렇게 시종일관 무례하게 나올 수 있는지 기가 찰 지경이었다.
'힘이 있기 때문이지.'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 화를 내면 그대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면 그만이라는 생각. 손해를 감수하기는 싫지만, 그렇다고 욕심을 버리지도 않겠다는 식의 저돌적인 행태.
"힘들긴 하지만, 수용 못할 것도 아니군."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요."
딱 욕이 목구멍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출 정도의 요구다. 이쪽의 사정은 다 파악하고 있다는 뜻.
"허나 알고 있겠지만,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걸리오."
"물론 그렇겠지요. 기다리겠습니다. 저희는 베이고르에서 최선을 다해줄 것을 믿고 있습니다."
베이오프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막시밀리언도 마주 웃었다. 그는 두루마리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떠들썩하게 벌일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리를 마련해 두었소이다. 그대를 위해 내 나름대로 애써 준비한 자리이니 부디 사양치 마시오."
"제가 어찌 자작님의 성의를 거절하겠습니까. 기쁘게 함께 하지요."
*
이번에 도적떼(겉으로 드러나기에는)를 성공적으로 토벌하면서 군터는 완벽하게 명예회복을 했다.
더불어 그는 카트리나 리에론의 죽음에 대한 책임(정확히는 그 책임을 진 살라스를 비호하면서 얻은)을 씻어내고 화려하게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코누다이안 정계에서는 이런 군터의 복귀가 단연 화제였다. 특히 군부에서는 그가 단 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나가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돌아온 것에 대해 입이 아플 정도로 이야기가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만고만한 도적들이 아니었다. 로발과 그의 병력을 처참하게 패퇴시켰던 전적이 있는, 일반적인 도적이라 보기 힘든 상대였다.
"역시 군터 경이십니다. 솔직히 휘하 기병 백 명만 데리고 가시겠다 했을 때는 우려하는 마음이 컸습니다만, 괜한 걱정이었군요. 정말 탄복했습니다."
"부끄럽군.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그리 치켜세울 것 없네."
군터는 이전부터 군부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의 출신에도 불구하고, 군터는 일찍부터 코누다이안 군부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었다. 특히나 그가 흑포장군의 목을 베는, 베이고르의 다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위업을 세운 뒤로는 군부에서 그의 위치는 그야말로 확고해졌다.
물론 그럼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은 있었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군터의 실력이라든가 존재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군터는 그의 이름값을 증명해냈다.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트라스가 군부 내에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만들었듯, 군터도 얼마든지 하려면 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곁에 축하를, 칭찬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이들을 모아서 몇 번 연회를 열고 따로 자리를 갖기만 해도 그들은 모두 그의 이름 아래로 모일 것이다.
하지만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껏 그래왔듯,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 이들을 호의로 맞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사적으로 따로 자리를 갖지도 않았고, 공무를 마치면 곧바로 귀가하고 바깥 출입을 삼갔다.
"정말로 권력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경을 뵐 때마다 사람 같지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바오룸이 감탄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군터는 작게 실소했다.
"권력은 이미 충분히 쥐었는데, 뭘 또 욕심을 내겠나."
"욕심이 아니라 절로 굴러들어오는 것마저 일부러 밀어내시지 않습니까. 저 같은 범부는 그 속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사람마다 입맛이 달라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듯, 나 역시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른 것뿐이지."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권력은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것들과도 달라, 아무리 탐해도 부족함만을 느낀다 하였는데 말입니다."
"직접 경험해보았나?"
"예?"
"그 권력이라는 놈을 가져 보았냐는 말이네. 탐하고, 또 탐해보았는가?"
"음…그건…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말을 하지 말게. 남이 하는 말을 무턱대고 신봉하지 말고, 스스로 경험해 보고 판단하게."
군터가 잔을 드니, 바오룸과 다른 이들이 따라 들었다.
"진미와 미주를 앞에 두더라도 속을 터놓을 수 없는 자들과 거짓으로 웃음을 주고 받느니, 조금 부족하더라도 마음을 열어둘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