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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23화 (323/1,064)

323화

군터와 백 명의 병사들은 위풍당당하게 위글로우의 성문으로 들어갔다. 개선이라 하기에는 초라한 규모였으나, 그들은 수십의 포로를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대로를 지났다.

거창한 식도, 환영 나온 인파도 없었으나 그런 것들 따위는 당사자들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 그들 자신은, 하나의 전쟁을 완벽한 승리로 장식하고 돌아온 승전군이었으니까. 사실 틀린 것도 아니다.

규모가 조금 초라하다 뿐이지, 어쨌든 승전은 승전 아닌가.

그렇기에 군터는 병사들이 수문병들이나 거리 통제를 나온 병사들 앞에서 어깨를 쫙 펴고, 조금은 거만한 모습을 보여도 그냥 넘겼다.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으스대는 것이야 귀엽게 넘길 일이다.

그래도 살라스에게 한 마디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수하들을 믿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병사들을 잘 단속해라."

"예. 심려치 마십시오."

살라스에게 병사들을 맡기고, 군터는 영주의 친위병들, 그리고 포로들과 함께 영주 관저로 들어갔다.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들 모여 있나?"

"예. 낮부터 회의가 있었고, 아직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음."

어쩐지 평소보다 더 공손한 것 같은 장교의 모습에 군터는 내심 웃었다.

오늘의 자신이나 어제의 자신. 혹은 보름 전의 자신도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일진대 바라보는 시선이며 태도는 어찌 이리들 다른 것인가.

"어서 오게. 내 자네를 믿었지만 고작 백 명으로 충분하다 했을 때는 의구심을 가졌었지. 허나 이제 보니 괜한 걱정이었군."

똑같은 시선이 영주의 앞에 갔을 때도 느껴졌다.

그를 바라보는 눈길들. 경탄, 혹은 경계. 자신을 둘러싼 감정의 소용돌이를 군터는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저들은 자신을 무엇으로 보고 있을까. 자신을 통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조금 궁금하기는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스치고 사라지는 바람에 눈을 두는 사람이 없듯이, 그는 덤덤히 받아넘겼다.

"또 다시 공을 세웠군. 나의 검이 내 체면을 지켰구나."

막시밀리언은 환히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걸어 내려와 군터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친위병들이 지키고 선 포로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래. 저 발칙한 도적 놈들. 심문은 해봤나?"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해도 될 일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그래?"

포로들은 굵은 포승줄에 팔을 묶인 채 무릎 꿇려져 있었다. 막시밀리언은 그들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포로들의 면면을 훑어 보았다.

"내 땅에 기어들어와 설치는 것을 보고 목숨은 내놓은 놈들이구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군.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놈들이었어. 살고 싶으냐?"

막시밀리언이 손을 뻗어 포로 중 한 명의 턱을 들어올렸다. 유난히 고개가 아래로 떨어져 있던 자였다.

"……."

두려움에 잠긴 눈이 막시밀리언의 형형한 눈과 마주쳤다.

"한 명. 너희 중에 단 한 명만 살려주마. 내가 묻는 말에 진실로 답하는 자. 그 한 명만은 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태어난 것을 후회하며 참혹하게 죽어갈 것이다."

그가 옆에 있던 친위대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을 다오."

병사가 즉각 허리춤의 검을 풀러 그에게 건넸다. 막시밀리언은 검집에서 검만 뽑아 들었다. 날을 시험하듯 가볍게 허공을 벤 검이 포로들의 눈앞을 지나갔다.

"이제부터 한 명씩 처형할 것이다. 살고 싶은 자는 어찌 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병사들이 각기 포로를 한 명씩 붙들었다. 우악스럽게 몸을 누르고, 입을 벌렸다. 포로들은 저항했으나 며칠 째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끌려온 그들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이란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꿈틀거리는 것뿐이었다.

푸욱!

"끄으으읍!"

내리찍은 검이 포로의 등을 꿰뚫었다. 돌 바닥에 피가 번졌다. 관리들 중 몇이 침음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들을 본 몇몇 무관들이 소리 없이 비웃었다.

푸욱!

"읍읍읍!"

막시밀리언은 광인처럼 날뛰었다. 포로들의 핏대 선 얼굴을 보며 그들과 눈을 맞추고, 등이며 뒷목 등에 사정 없이 칼을 꽂았다. 매사에 크게 흥분하는 일이 드문 그답지 않은 모습.

문관들 중에는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는 자들이 제법 있었다. 무관들 중에도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포로들을 제압하고 있는 병사들을 제외하고 막시밀리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래서 피 몇 방울이 몸에 튀기까지 한 군터는 처음과 같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물론 그 역시 이 우스운 살육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막시밀리언이 그저 분풀이나 하려고 직접 검을 들고 피를 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름대로 속셈이 있기에 저러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끄으으으읍!"

막시밀리언은 쉽게 죽이지 않았다. 검을 꽂은 채 헤집고, 한 명에게 몇 번씩 찌르기도 했다. 번들거리는 눈을 치뜬 그의 모습에서는 살기와 광기가 섞여 흘렀다.

"딱 적당한 수를 생포해 왔군. 더 많았더라면 숨이 찰 뻔했네. 확실히 요즘 너무 앉아만 있었던 것 같아. 벌써 조금씩 지치는군."

한 절반쯤 죽인 후에 막시밀리언은 멀찍이서 달려온 시종에게 손수건을 건네 받아 흐르는 땀이며 튄 피 등을 닦았다.

"내 직접 손에 칼을 쥐고 피를 본 것이 언제던가. 사실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어. 그렇지 않나?"

그에게 묻는 말이다.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그런데 이상하다는 말이네. 얼마 안 됐는데도 기억이 가물가물해. 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이었던 것처럼 말이야. 내 이 몸에 군살이 덕지덕지 붙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이제 다시 전장에 나가라고 하면 아마 고생 깨나 해야 할 것이야."

뜻 모를, 상황에 맞지도 않는 소리를 주절대는 막시밀리언은 정상인 같지 않았다. 특히나 아직 살아 있는 포로들이 보기에는 더욱 그랬다. 이제 곧 그들의 몸에, 동료들에게 했던 것처럼 칼을 박아 넣을 사내는 섬뜩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사냥에 성공하고 아직은 살아있는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종종 들리게 군터. 내 몸이 너무 녹슬었어. 솔직히 충격적이야. 자네가 와서 훈련을 좀 도와주게."

"찾으신다면 언제든 그리 하겠습니다."

"하하. 자, 그럼 다시 시작할까."

붉어진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그가 다시 움직였다. 죽음에 끌려가며 몸부림치는 이들이 절망을 토했다.

푸욱!

또 한 명이 꿈틀대다가 멈췄다. 검에 느껴지는 진동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막시밀리언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다음 희생양에게로 눈을 돌렸다.

"으읍! 으으으으읍!"

딱 다섯이 남았을 때였다. 막시밀리언의 바로 뒤에 있던 포로가 자기 차례가 오지도 않았는데 발광을 했다. 몸을 누르고 턱을 부술 기세로 움켜 쥐고 있는 병사 때문에 제대로 말소리를 내지 못했으나, 무언가 굉장히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필사적인 발악은 막시밀리언의 눈에도 들어왔다. 다음 차례를 향해 움직이려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거친 숨을 토했다.

"뭐지? 할 말이라도 있나?"

"으으읍!"

"놔줘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

병사가 포로를 놔주었다. 물론 턱을 쥔 손만 푼 것이다. 무릎은 여전히 등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마, 말하겠소. 다 말하겠소."

"좋아. 현명하군. 현명한 사람들이 오래 사는 법이지."

막시밀리언은 그의 앞에 서서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 우리는 폴사도의 병사들이오."

"…폴사도? 커닐레이 백작께서 다스리시는 폴사도를 말함이냐."

"…그렇소. 우리는 커닐레이 백작 각하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왔소. 코누다이안을 정탐하고, 가능하다면 가벼운 도발까지……."

"폴사도…커닐레이 백작이 보냈다라."

남은 네 명이 일제히 발광했다. 그들은 줄줄 새는 발음으로 온갖 저주의 말들을 쏟아 부었다. 막시밀리언이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포로들의 턱을 쥐고 제압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그들의 목을 꺾었다.

"폴사도에서 왔다? 커닐레이 백작의 명을 받고?"

"그, 그렇소."

"흐음. 그럭저럭 재미 있었다."

푸욱!

검을 고쳐 쥔 막시밀리언이 단번에 포로의 목을 찔렀다. 눈을 크게 뜬 포로가 말을 하려 했지만 검이 박힌 목에서 부글거리는 피가 새어나올 뿐, 하려던 말은 낼 수 없었다.

그는 눈으로 물었다. 그가 눈으로 쏟아내는 무수한 말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어째서'일 것이다.

막시밀리언은 헐떡이는 그를 보며 말했다.

"진실을 말하면 살려준다 하지 않았느냐. 내가 원한 건 진실인데, 그런 터무니 없는 거짓을 말하면 안 되지. 죽여달라는 것밖에 더 되겠느냐."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피 묻은 손을 털면서 관리들을 둘러보았다.

"지독한 놈들이오.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군. 마지막까지 이런 되도 않는 헛소리나 지껄이고 말이지."

막시밀리언은 널브러진 시신을 경멸스런 눈으로 내려 보았다.

"지독한 놈이오. 곧 죽을 상황에서도 이런 간계를 부리니 말이지. 폴사도라고? 이는 명백히 나와 커닐레이 백작을 이간질 시키려는 수작이 아닌가. 아니 그렇소?"

"영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간악한 놈입니다. 하긴, 그러니 국법을 우습게 여기고 도적질을 하고 다닌 것이겠지요."

여기까지 왔을 때 막시밀리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이라면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군.'

현재, 코누다이안은 대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전까지는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던 든든한 그늘이었으나, 이제는 원수가 되어버린 리에론 공작.

코누다이안은 그의 견제를 받으면서 동부에서 입지를 다져야 하는 처지다. 이런 상황에서 신경 쓰이는 적을 하나 더 만들 수는 없다.

이번에 일을 벌인 것은 커닐레이 백작이지만 당사자가 직접 문제 삼지 않는다면 별 잡음 없이 넘길 수 있는 사안이다. 속으로야 부글부글 끓겠지만, 코누다이안에서 도적들을 토벌했노라 선언하고 넘긴다면 그 역시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다.

무작정 참고 넘긴 것도 아니고, 폴사도의 위장 병력을 몰살 시켰으니 제대로 힘도 보인 셈이다. 코누다이안의 입장에서는 감정적으로 불쾌할 수는 있어도 손해 본 일은 아니다. 손해를 보고 체면을 구긴 것은 폴사도 뿐.

그러나 이번엔 이렇게 넘긴다고 해도 다음은 모르는 일이다. 이미 한 번 이를 드러낸 이상, 싸움은 물밑에서 치열하게 이어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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