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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22화 (322/1,064)

322화

"들은 것보다 수가 적습니다!"

살라스가 외쳤다.

저 멀리 보이는 적들의 수를 한 눈에 가늠했다. 위글로우를 나서기 전에 들은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찰병이 전한 것보다 적의 수가 적어 보였다.

"매복일까요?"

또 다른 수하의 말에 군터는 고개를 저었다.

"매복은 아니다."

탁 트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십 명 정도가 몸을 숨길 수 있는 지형도 아니다. 수풀이 길게 우거지지도 않았고, 경사가 가파른 언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매복이 아니라 우회하여 우리의 뒤를 치려는 생각일 겁니다. 아마도…장주님을 노리는 것이겠지요."

"재미있군."

군터의 입매가 구겨지듯 비틀렸다.

승리는 확신하고, 자신의 목을 어디 잠깐 맡겨둔 것마냥 군다.

"얕보였구나! 얕보였어!"

자신인가, 오만인가. 그건 이제 곧 확인해 보면 알 터.

"돌아오는 적이 도착하기 전에 끝낸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군터는 늘 그랬듯 가장 앞에서 군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와 나란히 말을 달리려 하는 이가 있었다.

"제게 선봉을 맡겨주십시오!"

살라스였다.

평소의 진중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그 위에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흉맹함이 덮여져 있었다.

그래. 공을 세워야 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살라스가 속에 품고 있는 불덩이는 군터 자신의 것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뜨거웠다.

"허락할 수 없다."

살라스의 눈에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살짝 시들어졌다. 그에 군터는 씩 웃었다.

"나보다 앞서 나가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다만, 내 옆에 서는 것은 허락하마. 그 정도로 만족해라."

"옛!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한 사람이 전장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도 후방에서 전체적인 지휘를 내리는 게 아니라 전투가 벌어지는 한복판에 있는 자라면 특히 그렇다.

제 아무리 용맹한 자일지라도 주변에 널리고 널린 적, 혹은 아군과 똑같다. 결국 머리 하나에 팔다리 두 개씩 달린 사람일 뿐이다.

한 사람을 죽이든, 열 사람을 죽이든, 한 사람의 용력은 그 주변 창칼이 닿을 거리에 밖에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홀로 수십의 적을 벨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계를 인지한다는 것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할 수 없는 것을 두고 과한 만용을 부리지 않으며, 할 수 있는 것을 두고 움츠러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수천이 맞부딪치는 전장에서, 군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크지 않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고작해야 수백이 다투는 전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두두두!

선두가 보인다. 뒤따라 붙은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당황해 하거나 불안해 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명백히, 이쪽이 따라붙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직은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군터의 눈은 맹금의 그것과 비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는 선봉에 선 적의 얼굴을, 여유가 묻어나는 표정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예상대로 되었다는 듯이. 곧 벌어질 전투에서 낙승을 확신한다는 듯이.

순간 안장에 건 활에 손을 가져간 군터는, 활을 대신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활을 쏘아 머리를 꿰뚫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렇기에 너무 싱겁다.

"뒤쳐지지 마라!"

"옛!"

속도를 높였다. 땅을 찍는 말발굽소리가 다른 모든 소리들을 묻어버렸다.

그의 가슴은 평온하게 뛰었다. 머리를 틀어 피한 화살이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지나가고, 가슴이며 말머리로 날아든 것들을 창칼로 쳐내는 와중에도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고동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적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칸젤을 내지르는 그 순간까지.

콰직!

길게 뻗은 창극이 방패를 그대로 꿰뚫었다. 방패 너머 팔까지 꿰인 적이 비명을 질렀다. 군터는 즉각 칸젤의 창대를 당겨 잡으며 박힌 창날을 빼냈다. 동시에 왼 손에 쥔 검으로 비명을 지르는 적의 목을 쳤다.

서걱!

기본은 되어 있는 자였다. 선봉에 설 자격이 있었다. 당혹과 고통의 와중에도 목으로 날아드는 공격을 막기 위해 창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날이 선 무기를 들면 어지간한 방패마저도 거뜬히 갈라버리는 군터였다.

명검을 쥔 채, 그가 마음 먹고 날린 일격을 창 하나로 막기는 불가능했다. 그걸 몰랐던 적의 선봉은 허망하게 목을 잃고 말 위로 쓰러졌다.

"무, 무슨!"

시야를 다 가리는 적군 사이에서 대장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지휘관이라 함은 후방, 즉 두터운 병사들의 벽을 앞세우는 데다가 일선 지휘관이라서 비교적 앞에 나와 있더라도 대장기를 세워놓지 않는 한 찾기가 쉽지 않다.게다가 세워 놓더라도 위장, 그러니까 함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이 소규모 병력끼리의 교전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짐승의 그것만큼, 어쩌면 더 뛰어난 군터의 귀는 병사들이 뱉는 것과는 뭔가 다른 목소리를 포착했다.

촤악!

양손에 쥔 창과 검이 혈선을 그었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말을 몰았다. 선봉이 으깨지다시피 하며 적군은 대형의 붕괴를 일으켰다. 군터가 찢은 틈을 살라스가 거의 동시에 벌려놓았다.

"하아압!"

군터의 솜씨가 커다란 도끼처럼 강렬하고 거칠다면, 살라스의 솜씨는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살라스의 창은 유연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창술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방어를 위한 움직임을 제외하고, 창이 한 번 움직이면 반드시 적의 목에서 피가 솟았다. 갑옷이나 투구 등에 긁히는 일은 일절 없었다. 오직 투구 아래 살짝 드러난 목을 찌르고 베었다.

호언했던 대로, 살라스는 종횡무진 하는 군터의 옆에서 조금도 뒤쳐지지 않았다.

막아서는 적을 쉽게 거꾸러뜨리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선두에서 말을 달리니, 뒤따르는 병사들은 수월하게 적진을 돌파했다.

"살라스! 저놈이 대장이다! 베어라!"

"옛!"

본래라면 대장을 지키는 벽은 두터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작해야 수백이 엉킨 전장. 그러한 전장에 세워진 얇은 벽은 군터의 우악스런 힘 앞에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군터가 벽을 깨고, 살라스가 뛰어 넘었다. 처음으로 군터를 앞질러 나간 살라스는 눈을 부릅 뜬 적장을 향해 돌진했다.

"이, 이익!"

살라스의 창이 적대장의 검을 튕겨냈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느라 벌어진 입에 창날을 틀어 박았다.

*

군터는 선봉에 섰으나, 전력으로 길을 여는 데 집중하기 보다는 뒤따르는 병력을 통솔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그가 길을 뚫는 데 전념하지 않아도 옆에 있는 살라스가 거들어주어 여력을 남길 수 있었고, 군터는 그 여력을 시야와 사고에 집중시켰다.

이제껏 전장에서 숱하게 활약을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마다 그의 역할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전투에 돌입하기 전부터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기본적인 방침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군터는 그에게 주어진 무대를 힘껏 누볐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는 그를 따르는 기병들을 통솔했다. 그러나 그 통솔이라는 것이 그저 '내 뒤를 따르라.' 한 가지였다. 그가 길을 열고, 수하들은 알아서 뒤를 따라오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지휘관이라기보다는 부대의 앞에 선, 선봉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에, 군터는 지휘관으로서 앞에 서서 수하들을 이끌었다. 적진을 헤집는 데 열중했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그 안에 숨은 과정이 달랐다.

본능이 아니라 이성을 따랐다. 주먹구구식의 임기응변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머리로 판단하여 병사들을 이끌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중상자도 없습니다. 팔다리에 자상을 입은 정도의 경상자만 스무 명 정도입니다!"

보고하는 수하의 얼굴이 밝다.

대승이다. 세상 그 누구를 데려다 놓고 보게 해도 백이면 백 완벽한 대승이라 말하리라.

이백하고도 스물에서 서른 가량 되는 적들을 맞아 싸워 사망자는커녕 중상자 하나 없다는 것은 실상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결과다.

하물며 그들이 싸운 적은 오합지졸의 부랑배들이 아니었다. 폴사도의 위장 병력이었다. 나름대로 정예라 할 수 있는 상대인 것이다.

"얼마나 살았나."

"사십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 열 대여섯 정도는 상처가 심해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군. 허나 답을 듣는 것은 뒤로 미뤄야겠지."

"전원 위글로우로 끌고 갑니까?"

"아니. 상처가 심하다 한 놈들은 정리해라."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할 정도의 상처라면 가는 도중에 죽어 나자빠질 터. 처음부터 가벼운 것만 챙겨가는 것이 좋다.

"옛."

군터는 몸을 일으키고 살라스에게 향했다.

"훌륭한 솜씨였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발악했을 뿐입니다."

"훈련 때보다 오히려 더 낫구나. 마음에 칼이 섰기 때문인가?"

"음…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라스는 얼굴에 묻은 핏물만 닦아낸 채 그의 군마를 살피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갑옷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말이다.

"이제는 할렌이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부끄럽습니다."

살라스와 할렌의 실력은 비등했다. 처음 할렌이 군인이 되었을 당시 둘의 실력은 비교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까마득한 차이는 빠르게 좁혀졌다.

재능의 문제는 아니었다. 할렌의 재능이 빼어나기는 했지만 살라스 역시 그에 못지 않았다. 단지 무술이라는 것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르면 그 격차가 크지 않기에 생겨나는 자연스런 일이었을 뿐.

때문에 현재 둘의 실력은 비등하다. 군터는 그리 생각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둘 중 누가 더 뛰어나냐 묻는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살라스라고 답할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기질의 차이 때문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더 낫군.'

살라스는 냉철하다. 결코 흥분하지 않으며, 흔들리지도 않는다. 그와 함께 나란히 말을 달리면서, 군터는 전장의 열기가 오직 살라스만 비껴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전력의 우위, 상황의 유리에서 나온 여유가 아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냉철함이다. 이런 것은 할렌은 물론이요, 군터 자신조차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은 훈련한다고 해서, 경험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타고난 기질이다.

'전에도 이랬던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단 살라스가 가장 앞에서 말을 달린 것이 그가 알기로는 처음이었고, 전투에 돌입하여 살라스의 상태를 시시각각 확인했던 것도 처음이었다. 때문에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군터는 아마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느낀 바가 있었는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번에 곤혹스러운 일을 겪은 것은 살라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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