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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21화 (321/1,064)

321화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칩거 생활을 한 지 엿새 째 되던 날 저녁이었다.

"그간 집에서 잘 쉬었는가? 안색이 좋군."

"송구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막시밀리언의 얼굴은 다소 초췌해 보였다. 며칠 사이 여러 가지 일들에 시달렸다는 것을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송구할 게 무언가. 오늘은 그저 간만에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부른 것이니 굳어 있을 필요 없네."

"예."

식사자리 겸 술자리였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없이 오직 그들 단 둘만이 마주 앉은 자리였다.

"리에론의 반응이 꽤나 격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적의를 끌어버려서, 남 좋은 일만 시켜준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네."

"송구합니다. 소관이 불민했던 탓에."

"아니. 아니야.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스스로 죽으려고 드는 이를 어찌 막았겠나. 게다가 우발적인 것도 아니었을 거란 말이지. 그 여자 단독으로 저지른 일도 아니었을 것이고."

"무슨 말씀이신지."

"리에론에서 죽으라 하지 않았겠나. 명예를 지키고, 가문에 이로운 일도 하라고 은근히 등 떠밀었겠지. 뭐 확실한 건 아니지만, 나라면 그리 했을 것이니 리에론이라고 다르겠는가."

"……."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막상 확인을 하게 되니 입맛이 썼다. 우울해 하는 벨리사의 얼굴이 머릿속에 겹쳐지면서 더 그랬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는 해야 하지 않겠나.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자네도 사람인데 어찌 서운한 마음이 없었을까. 나라도 그랬을 텐데, 이해하네."

서운함이라. 굳이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면 그런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크지 않다. 이미 그런 사소한 것들로부터 멀찍이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속내에 대해 이해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둘뿐.

"도적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로발이 삼백을 이끌고 갔네."

"들었습니다."

"십중팔구 낭패를 보게 될 테지. 자네가 나설 때는 바로 그 직후네."

로발이 누구인지 안다. 미트라스 쪽에 가까운 자였다. 별로 인상적인 자는 아니었다. 적당히 능력이 있고, 또 적당히 약은 자다. 그가 이번 일에 나서며 적극적으로 자신감을 피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막시밀리언은 그의 실패를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삼백이나 끌고 갔는데, 설마 낭패를 보겠습니까."

"상대가 평범한 도적들이 아니라서 그렇지. 자네도 짐작은 하고 있지 않나? 미겔이 귀띔을 해주지 않던가?"

등골이 차갑게 식었다. 그런 와중에도 군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폴사도의 위장 병력일 수도 있다고……."

"어쩌면, 이 아니라 맞을 걸세. 그것도 상당한 정예겠지. 커닐레이의 입장에서도 제법 중한 일이니까. 수백이나 되는 병력을 꼬리 자르는 식으로 버릴 수는 없을 테니, 정예로 추려서 보냈겠지."

"미트라스는 모르고 있습니까?"

로발은 미트라스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나섰을 때 미트라스가 몇 마디 거들었다고 들었다.

로발이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면 거들었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미트라스가 도적들의 정체를 몰랐다는 말인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일이다. 막시밀리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겔이 아무리 정보력이 좋다지만 미트라스 역시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었다.

어리석은 자는 더더욱 아니었고.

"군터. 이보게 군터."

막시밀리언이 피식 웃었다.

"자네는 나를 어찌 그리 낮추어 보는가."

"오해이십니다. 소관이 감히 어찌."

군터가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으려 하자 막시밀리언이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그에 군터는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미트라스가 만만한 자가 아닌 것은 맞네. 하지만 이 땅의 주인은 나야. 난 이 코누다이안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지. 힘 있는 수하 하나의 눈을 가리는 것? 그런 것은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로발이 이끌고 간 삼백은 수만 많지 쭉정이에 불과하네. 일개 도적들을 상대하러 가는 것이니 굳이 정병을 보낼 이유가 없지."

하지만 적은 일개 도적이 아니다. 로발이 흑포장군 정도가 되지 않는 이상, 그는 이번에 크게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알겠나? 내가 직접, 자네를 위한 무대를 만든 것이야. 그러니 날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게."

막시밀리언이 잔을 채웠고, 군터는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

며칠 뒤. 위글로우로 급보가 날아들었다. 로발이 이끌고 간 병력이 도적들과 교전해 패퇴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그냥 패배가 아니라, 지휘관인 로발이 전사하고 태반의 병력이 죽어버렸을 정도의 대패였다.

"대체 어떻게 싸워야 그깟 도적놈들 따위에게 그리 처참하게 패할 수 있단 말인가!"

막시밀리언은 관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노발대발했다. 그의 살벌한 시선이 로발의 등을 밀어주었던 자들 하나하나에게 가 닿았다.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한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영주님. 이 참사는 물론 지휘관인 로발의 무능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정규군을 대패시킨 도적들의 힘이 예상 밖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오. 아모트에서 손을 못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비웃었었는데, 이제 보니 조금은 납득이 가는구려."

"이미 한 번의 쓴 맛을 본 이상, 적을 얕잡아 봐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그 도적들이 정규군과 교전한 이상 필시 달아나려 할 것이니,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 수모를 갚을 길이 없어집니다."

"그 역시 옳은 말이오. 즉시 다시금 병력을 파병해 놈들의 목을 모조리 거둬들이겠소. 놈들의 수급을 하나 씩 장대에 꽂아 위글로우 광장에 내다 걸겠소."

막시밀리언의 호흡이 가라앉자 관료들의 끄트머리 즈음에 서 있던 할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영주님. 영주님과 코누다이안의 위신을 위해, 두 번의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군터 경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이끌고 그 도적 놈들을 추살 하도록 하십시오. 영주님께서 근신하고 있는 군터 경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신다면, 그는 밤낮으로 말을 달려 도적 놈들의 목을 베어 올 것입니다."

"그렇다는데, 어찌들 생각하시오?"

몇몇 어두운 표정을 짓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발언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군터 경이라면 더 없이 확실하겠지요."

"군터 경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심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곧 부름을 받은 군터가 갑옷을 입은 채 걸어 들어왔다.

"군터. 로발이 실패했네. 덕분에 내 체면이 땅바닥으로 떨어졌어. 자네가 나서서 내 체면을 지켜주게."

"명만 내려주십시오. 영주님의 땅에 멋대로 발을 들인 놈들의 목을 자루에 담아 가져오겠습니다."

"좋아. 병력은 얼마나 필요한가?"

"제 휘하 기병 백이면 충분합니다."

"…백이라고?"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퍼졌다. 막시밀리언조차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허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누구보다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소관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소관은 허언을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어찌 영주님의 앞에서 아무 말이나 내뱉겠습니까."

"백이라고?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도적들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놈들이 도망치기 전에 따라붙으려면 그 정도가 좋습니다."

"좋아!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지금 당장 출발해라. 그리고 감히 내 땅에 기어들어온 벌레 놈들의 목을 가져오라."

"옛!"

군터는 즉시 휘하의 최정예 기병 백을 소집했다.

"할렌. 넌 남아 있어라."

"괜찮으시겠습니까? 놈들의 병력이 조금 상했다고 해도, 그 수가 이백은 넘을 겁니다."

이미 적이 보통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반 밖에 안 되는 병력만을 데리고 간다니 군터를 믿는 할렌으로서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정예라고 해봐야 어차피 제 깃발 하나 제대로 못 올리는 떨거지들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러시다면…마음 편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군터는 할렌을 남기고 살라스를 대동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살라스 역시 공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살라스는 한 자루 칼 같이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말수도 전에 없이 줄어 있었고,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놈들이 영지 밖으로 도망치기 전에 따라붙어야 한다. 서둘러라!"

싸우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터는 무엇보다 시간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자신이 있다 해도, 일단 마주쳐야 싸우든 말든 할 게 아닌가.

그렇기에 밤낮으로 말을 달리려는데, 살라스가 의견을 냈다.

"앞서서 소문을 내시지요."

"무슨 말이냐?"

"우리의 병력은 고작 백입니다. 반면 놈들의 수는 못해도 우리의 배는 될 테니, 수가 적은 우리가 수가 많은 쪽을 치러 간다 하면 영주님이나 관료들이 보였던 반응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는 건, 놈들 역시 그리 생각할 거라는 뜻이지요."

"우리의 수가 적은 것을 알면 놈들이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우려 할 거란 뜻이냐?"

"어렵지 않은 싸움으로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리 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장주님의 무명은 폴사도에도 모르는 이가 없을 테니, 분명 욕심이 날 겁니다."

일리 있는 생각이다 싶었다.

군터는 살라스의 의견대로 따랐다.

적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되, 일부러 사람을 앞서 보내어 소문을 냈다. 군터가 이끄는 병사 백 명이 도적들을 소탕하러 움직였다는 소문을.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접경 지역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들이 약탈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말인즉, 적들이 떠나지 않고 여유를 부리고 있다는 뜻이고 이는 즉.

"놈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간이 부었군."

"속도를 올립니까?"

"아니. 이대로 간다. 기다리고 있는 놈들을 치러 가는데 기운을 뺄 수는 없지."

물론 여기서 속도를 더 올린다고 해도, 심지어 밤낮으로 말을 달려 간다고 해도 승리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피해가 조금이라도 커질 가능성이 있다.

"정찰병의 수를 늘려라. 놈들은 도적이 아니다. 매복이나 기습을 해올 수 있으니 경계를 늦추지 마라."

"옛."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이동한 그들은 오래지 않아 적과 조우할 수 있었다. 아모트 쪽으로 넘어가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적을 반나절 거리에 뒀을 때, 군터는 느슨하게 쥐었던 고삐를 바짝 당겼다.

"오늘 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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