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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20화 (320/1,064)

320화

"아모트 접경 지역에 도적들이 모습을 보였다더군요. 근자에 보이는 놈들답지 않게 제법 규모가 되는 듯합니다. 아모트의 토벌대를 이리저리 따돌리면서 활보하는 중이라지요."

"아모트군이 어지간히도 무능한가 보군."

"아모트군이 약졸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무능하다고 해도 도적 무리 하나 어쩌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가? 그래서?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는?"

"놈들이 아모트 접경 지역에서 모습을 보였다 말씀 드렸습니다. 코누다이안에 발을 디디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가장 최근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제법 맹랑하게 굴고 있는 모양입니다."

"…잠깐. 무슨 소리인지 알겠군."

미겔이 슬쩍 웃었다.

"나더러 나서서 놈들을 토벌하라는 뜻이군. 그렇지 않나?"

"공을 세울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쪽 수비병력이 알아서 처리 할 일이 아니겠나."

"쉽지 않은 듯합니다. 말씀 드렸듯, 근자에 보였던 부랑배 같은 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제대로 된 도적 무리라서 말이지요. 아모트가 괜히 어려움을 겪은 것이 아니라, 수도에서 출병을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할수록 한심하군. 영지에 출몰한 도적 놈들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어찌 영주라 할 수 있지?"

"경.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국을 통틀어도 코누다이안 만큼 군사력이 출중한 영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작령 이하는 말할 것도 없고, 백작령이나 후작령 중에도 군사력에서 만큼은 코누다이안보다 못한 곳이 꽤 있을 겁니다."

막시밀리언은 일찍부터 군사력 증강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왔다. 그것이 빛을 보아 일전의 전쟁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고, 전쟁에서 피해를 보고 골골대는 다른 영지들과는 달리 여력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미겔의 말처럼, 코누다이안의 군사력 만큼은 고위 영주들의 영지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직은 조용하지만, 놈들이 곧바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조만간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회의가 열리고 토벌대 편성에 대해서 말이 나오게 되면 경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경의 실력을 의심하는 이는 없지요. 안정적으로 처리하고자 한다면 경이 나서는 게 가장 낫다는 걸 모두가 알 겁니다. 더군다나 영주님께서도 경을 용서할 구실을 찾고 계실 테니 흔쾌히 허락해주시겠지요. 경은 그때 믿음직스럽게 나서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연후에 병사들을 이끌고 출병해 도적들을 쓸어버리고 귀환하시면, 이번의 불미스런 사건은 없었던 일이 될 겁니다."

"그대로 이루어진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말처럼 그리 쉽게 되겠나? 공을 세우고 싶은 무관들은 한 둘이 아니야. 그리고, 아마 미트라스가 반대하지 않겠나?"

"그럴 수도 있지요. 허나 상관 없습니다."

"무슨 뜻인가. 다른 자들이 나선다면 내 차례까지 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음…이건 아직 추측입니다만, 그 도적 놈들이 아무래도 평범한 놈들 같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아모트가 아무리 무능하다고 해도, 경이 조금 전 말씀하신 것처럼 도적 무리 하나 어쩌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놈들은 어렵지 않게 아모트를 통과하다시피 하여 우리와의 접경지역까지 다다랐지요. 이건 둘 중 하나입니다. 그것들이 정말 도적의 수준을 뛰어넘을 정도로 제대로 된 놈들이거나, 아니면 아모트가 길을 열어준 것이겠지요."

"길을 열어줘? 도적놈들에게?"

"예. 그 경우, 놈들은 도적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도적이 아니면? 도적으로 위장한 다른 놈들이란 말인가."

"남쪽에는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리가 있지 않습니까."

"…폴사도? 커닐레이 백작을 말하는 건가?"

"호전적인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소 무모하고 거칠지만, 우리를 떠보려는 수작일 수도 있지요. 또, 커닐레이 백작이라면 아모트가 순순히 길을 열어준 이유가 되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억측이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럴 수도 있다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이 '그럴 것이다'로 들리는 이유는 뭘까. 군터는 정말 그 도적 무리가 폴사도에서 온 위장 병력일 경우를 떠올려 보았다.

'도적 무리로 위장을 했고, 아모트를 지나오게 할 정도이니 수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수가 많으면 눈에 띄기 마련이고, 그러면 조용하게 움직이는 데 여러모로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말 폴사도의 병력이 위장을 한 것이라면 그 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이, 삼백 정도? 그것도 최대로 잡았을 경우에 그 정도가 될 것이다.

"경이 나서는 것을 막으면서 공을 세우려 하는 이들은 아마도 적을 가볍게 보겠지요. 기껏해야 도적무리, 정도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적을 가벼이 보고 나서면 크게 데이기 십상이다. 특히나 적이 폴사도의 위장 병력일 경우에는 더욱 그럴 위험이 크다.

"한번쯤 실패하는 것도 좋습니다. 경이 나설 무대가 더 화려하게 깔리는 셈이니까 말입니다. 또 성공한다 해도 나쁠 것 없습니다. 놈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해도 크게 손해를 입었을 것이니, 경이 나섰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소리들이 나오게 되겠지요."

"기분 좋을 정도로 낙관적인 예측이군. 아무튼 알겠네. 두고 보도록 하지."

"예."

"그나저나 이리 마음을 써주니 고맙군. 자네가 한 말대로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자네의 마음 씀씀이는 기억하고 있겠네."

"하하. 그럼 다음에 뵙지요.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자숙하고 계시는 모양이 되었으니 저 같은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겠지요."

"음."

미겔이 돌아가고, 군터는 고민에 빠졌다.

조금 전 미겔이 했던 이야기들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만약 미겔의 말처럼 일이 흘러간다면 생각보다 빨리 복귀하는 셈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어떻게든 복귀하게 될 것이다. 막시밀리언은 자신을 버릴 수 없을 테고, 밀어낼 수도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의 고민거리는 다른 데에 있었다.

카트리나 리에론의 죽음. 그것을 벨리사에게 어찌 알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말하긴 해야 한다.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알게 할 수는 없다. 직접 알려주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배짱도 없는 계집이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군.'

일찌감치 여러 조언들을 따라 벨리사를 그녀에게서 떼어놨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후회를 둬봐야 뭐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무의미한 생각이 들 만큼 군터는 짜증이 났다. 아니 짜증을 넘어 화가 치밀었다.

'배짱이 없다. 아니, 오히려 배짱이 너무 두둑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는 것. 그것은 보통 사람은 하기 힘든 일이다. 정말 극한까지 몰렸다고 해도 택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오명을 쓰고 신세를 망쳤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최고 권력가의 여식이 고를 만한 선택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 했다는 것. 그건 단순한 절망이나 두려움 이상의 의지가 작용했다는 뜻이다. 도피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복수겠지. 영주와 코누다이안을 향한.'

이혼의 명분은 분명히 코누디스 쪽에 있었다. 후계자를 살해하려 했다는, 이혼까지 치닫기에 합당한 사유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카트리나 리에론의 죽음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결을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코누다이안 내에서 죽었다. 리에론이 분노하기에 충분한 사유다.

더군다나 자결이라고 해도, 지금까지는 코누다이안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곧 리에론에서도 사람을 보내 확인을 하겠지만, 증거가 명백해도 인정하지 못한다 하면 끝이다.

코누디스에서 후계자 살해 미수 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뭉개버렸듯이 말이다.

'예정된 파국이다.'

코누디스에서 먼저 빌미를 잡았다면, 이제는 리에론도 잡았다. 두 가문이 원수로 변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코누다이안에 큰 위기가 닥친 셈이다. 하지만 정작 군터의 근심은 리에론의 칼날이 아니라 그의 집 방 한 구석에서 비롯되었다.

'눈물도 빨리 흘려야 빨리 마르는 법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굳힌 군터는 벨리사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러워 하는 그녀에게 담담하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

"마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군터는 쓴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에 할렌이 탄식했다.

"큰일이군요. 장주님께서 근심이 크시겠습니다."

"나보다는 아이들이 더 그렇다."

"아, 그렇겠군요……."

"반대로 아이들 덕분에 그녀가 조금이나마 기운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만. 어쨌든, 시간만이 해결해줄 일이겠지."

벨리사는 천성이 선하고 정이 깊다.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 번 마음을 주면 도로 거둬들이는 일이 없다. 이제껏 봐 온 바로는 그랬다.

"그렇지요. 시간만이 해결해줄 일이겠지요."

"음."

"그나저나, 요즘 군영 내 분위기가 시끌시끌합니다. 제법 규모 있는 도적 놈들이 아모트의 접경 지역을 넘어 왔는데, 조만간 토벌대가 꾸려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

"예. 몸이 닳은 작자들이 한 둘이 아닌데, 정말 토벌대가 꾸려진다면 앞으로 나설 자들이 한 둘이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전장에 나가려 줄을 선 자들이 넘치니, 장주님께까지 순서가 돌아오겠습니까?"

"돌아오면 좋고, 오지 않아도 별 수 없지."

할렌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그러느냐."

"아니…뭐랄까, 조금 변하신 것 같습니다."

"음?"

"솔직히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은데, 장주님께서는 전혀 걱정이라든지…신경 쓰시는 기색이 없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찌 그리 여유로우십니까?"

"신경 써도 변하는 것이 없으니까. 어쨌든 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가 아니더냐. 이럴 때는 조용히 있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할렌의 말처럼 그는 변했다. 스스로도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모페이브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하니 쓸 데 없이 마음이 지치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관여할 수 없는 일에 무심해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코앞에서 모든 일들을 바라봤다면, 이제는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다고 할까.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반응이 무미건조하게 나갔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그랬다.

"대단한 분이라는 건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점점 더 대단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범부는 이제 올려다보기도 힘이 드는군요."

"아부해봐야 줄 수 있는 것은 차 한 잔 밖에 없다."

"차 대신 술은 안 됩니까?"

"근신하는 처지에 매일 술 냄새를 풍기고 있을 수는 없지. 차로 만족해라."

"으음. 예. 그럽죠."

근래에 차 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마시기는 일찍부터 마셨지만 대부분 무슨 맛인지는 모르고 마셨었는데, 요즘에는 조금씩 자발적으로 마시고 있다. 어쩌면 이 또한 모페이브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들리는 말들을 잘 귀담아 듣되, 말은 적게 해라."

"……."

"네 말대로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다. 혹시라도 트집 잡힐 일은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예. 유의하겠습니다."

몸은 자택에서 나가지 않고 있지만, 군터의 영향력은 여전히 군부 내에 짙게 자리하고 있었다. 할렌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장교들과 병사들이 모두 그의 권속이었으니, 아직까지 막시밀리언이 별다른 벌을 내리지 않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과장을 조금 하면 군터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그렇듯, 고래들이 싸우면 새우만 등이 터지는...

답답한 면이 다소 걸려도, 소설이기 때문에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주인공을 제국 군주 정도로 잡고 시작했다면야, 어쩌면 현 트렌드에 맞는 사이다물이 됐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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