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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19화 (319/1,064)

319화

"도대체 넌 뭐 하는 놈이더냐!"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납던지 잘못이 없는 이들까지도 몸을 움찔 거릴 정도였다.

"호송임무를 맡겼다! 호송의 뜻을 모르느냐! 호송 대상이 마차 문을 걸어 잠그고 자결을 하는 동안 네놈은 대체 뭘 했단 말이냐!"

막시밀리언의 거친 고함에는 분노에 더불어 살기까지 실려 있었다. 그 노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살라스는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관의 불찰입니다. 그 어떤 말로도 용서받지 못함을 압니다. 소관이 저지른 잘못을 엄히 벌해주십시오."

"당연하지! 염치라는 것이 있다면 어찌 용서를 바라겠는가! 여봐라! 이놈을 당장 끌어내라!"

막시밀리언의 노기가 절정에 달한 순간, 눈을 감고 있던 군터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살라스는 제 휘하이고, 그에게 호송 임무를 맡긴 것은 소관입니다. 일이 틀어진 데 대한 책임 역시 제게 있습니다. 청컨대, 소관을 벌하여 주십시오."

"자네를 벌해 달라?"

서늘한 시선이 방향을 바꿨다.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막시밀리언은 무거운 정적 속에서 숨을 골랐다.

"실망이 크네 군터. 실망이 커. 설마 자네가 이런 일을 그르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겠지. 나도 할 말이 없네.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막시밀리언이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살라스를 노려보았다.

"죽어도 영지 밖에서 죽었어야 했다! 내게 품은 원한을 이리 갚는 것인가? 멍청하지 않은 줄은 알았어도, 이리 독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구나."

돌이라도 된 것 같았던 살라스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틀어졌구나. 틀어졌어. 이제 리에론과는 완전히 원수가 되게 생겼구나."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투는 아니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는 분노의 감정만이 느껴졌다.

"사람인 이상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 군터 자네 역시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게 하필 지금이어야 했는지, 참으로 원망스럽군."

"……."

"벌해 달라하니 주지. 어찌 벌할지 생각해보겠네. 당분간은 맡고 있는 일에서 모두 손을 떼고 근신하도록 하게."

"예."

군터는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짙은 모멸감과 분노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으나 가까스로 내색하지 않고 영주 관저를 나올 수 있었다.

"…송구합니다."

살라스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비틀어지려는 이성을 일깨웠다. 그에 답하기 위해, 군터는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조금 전 막시밀리언이 내뱉었던 것 이상으로 큰 호통이 터져 나왔으리라.

"호송이었지, 호위가 아니었다. 네겐 그 여자를 관리할 책임이 있었다."

"드릴 말씀이…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 더 이상 책망하지는 않겠다. 너나 나나 근신을 명 받았으니…따르면 그뿐이다. "

"다시는…다시는 실망시켜드리는 일이 없을 겁니다."

"물러가거라."

다소 매몰차게 살라스를 보낸 군터는 집으로 돌아갔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본 벨리사가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냐며 물었지만 군터는 혼자 있고 싶다며 그녀마저 물렸다. 보리스는 아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조심스러워했고, 실비아만이 눈치를 보면서도 다가왔다.

"미안하구나. 오늘은 아버지가 조금 일이 있어서, 오라비와 놀아야겠다."

거친 손이 자그마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사이 보리스가 동생의 손을 잡고 물러갔다.

혼자 방으로 들어간 군터는 갑옷도 벗지 않은 채 앉았다.

굳은 시선이 무겁게 허공을 노려보았다. 표정은 변하지 않는 가운데 숨소리만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똑똑-

"모페이브인가."

"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용무가 있나."

"예."

"…들어오게."

짜증이 이는 와중에도 무슨 용무인가 싶어 들어오라 했더니, 문을 열고 들어온 모페이브는 술 한 병과 잔 하나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 있었다.

군터의 표정이 일그러지려 하자 모페이브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가?"

"모르지요. 다만 장주님의 기분이 좋지 않으시다는 것은 압니다. 전에 없을 정도로 심하게…말이지요."

"정확히 보았네. 솔직히, 지금은 감정이 잘 통제가 되지 않아. 그러니 괜한 불똥 맞지 말고 물러가는 게 어떤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보필할 책무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런 것뿐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자네, 생각보다 고집이 있었군. 왜 여태 몰랐을까."

"드러낼 기회가 없었지요."

"잔은 필요 없네."

술병을 낚아채듯 들고 단단히 막힌 뚜껑을 힘으로 뜯어내다시피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에 가져가 단숨에 반 정도를 비웠다. 병에서 입을 떼자 독한 주향이 퍼졌다.

"카트리나 리에론이 자결했다. 살라스는 그것을 막지 못했고, 모든 신료들이 보는 자리에서 추궁을 당했지."

"…안타까운 일이군요."

"나는 살라스를 지켜야 했고, 덩달아 책망을 받았다. 각오하고 나서긴 했지만, 솔직히 기분이 더럽더군."

"상관으로서 수하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요. 찬사와 동시에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따지고 보면 내 실수였다. 살라스를 보내는 게 아니었어. 살라스가 카트리나 리에론과 면식이 있으니 나름대로 배려하는 측면에서 보냈는데,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됐지. 차라리 할렌을 보낼 것을. 그랬다면 카트리나 리에론은 자결은 시도조차 못하고, 죄수처럼 갇혀서 얌전히 리에론에게로 보내졌겠지."

"그랬을 수도 있지요."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건가."

"제 말은, 지나간 일에 대해 가정을 해봐야…그 가정에 대한 결과는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미련과 후회의 소산이지요."

"……."

꿀꺽! 꿀꺽!

또 다시 반이 비었다. 군터는 굳은 표정을 풀고 눈을 감았다.

"장주님께서 분노하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제 생각에는, 살라스님이 일을 그르쳐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장주님께서는 살라스님에게 화가 나신 것이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맞아. 그런 것 같군. 자네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솔직히 그에 대해서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아. 안일하게 마음을 먹은 것은 꾸짖어야 하겠지만, 그뿐이지."

모페이브가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영주님께서 노하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밥 버러지 같은 것들 앞에서 수모를 당했으니까. 내 체면에 손상이 갔음에 화가 난 것이야."

"그렇군요."

"결국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내 이 마음이 단단하지 못하고 무겁지 못했기에 가벼운 바람에 상처 나고 흔들린 것이지."

"영민하십니다."

"오늘은 땀 좀 흘려야겠군."

"평소에도 흘리지 않으십니까?"

"오늘은 조금 더 흘릴 걸세. 살라스에게 사람을 보내 불러오게. 마음이 힘들 때는 몸을 혹사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지."

"그리하겠습니다."

군터는 그날 살라스를 불러 날이 다 저물 때까지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에 온 할렌과 다른 장교들까지 합세하여 군터와 그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모조리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입에서 단내를 풀풀 풍기며 연무장 바닥에 쓰러졌다.

군터조차도 마지막까지 서 있기는 하였으나, 결국엔 바닥에 등을 대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재수가 없었던 것이라 생각해라. 그 계집은 코누디스에 복수를 하고자 한 것이야. 처음부터 입에 재갈을 채우지 않은 이상, 이미 죽으려고 작정을 한 계집을 네 어찌 막을 수 있었겠느냐.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나 역시 그럴지니."

"…송구합니다."

살라스의 목소리에서는 독기가 풀풀 풍겨져 나왔다. 몸에 힘이라고는 전부 다 빠져버렸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건만.

"후에 벌을 하신다고 했다지만, 별 일은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헉헉대던 할렌이 슬그머니 물었다.

군터는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홀로 십 수 명이나 되는 인원을 때로는 한꺼번에, 때로는 돌아가며 쉬지 않고 상대한 터라 진한 피로가 그의 몸을 잡아먹고 있었다.

"글쎄. 크든 작든 벌은 있겠지."

"별 일 없을 겁니다. 영주님께서 장주님을 내치시기라도 하겠습니까?"

적어도 코누다이안 근방, 베이고르 동부에서 만큼은 군터라는 이름이 막시밀리언 코누디스라는 이름과 맞먹을 정도, 아니 그 이상으로 유명했다. 군인으로서, 무인으로서의 무명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이름값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막시밀리언이 군터를 내치거나, 크게 벌한다면 군터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았다. 여차하면 몸을 빼서 타 영주에게 의탁해버리는 수도 있었다.

방금 전, 설마 내치기라도 하겠냐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군터도 그것을 알았지만 침묵했다.

"영주님께서 장주님을 실각시키기라도 한다면, 군부는 미트라스 경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영주님도 그걸 잘 아실 테니, 장주님께 큰 벌을 내리지는 못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요식행위로 가볍게 벌을 내리고 마시겠지요."

맞장구 치는 말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듣고 있던 군터는 어느 순간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비슷한 말들을 잘라냈다.

"불안해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겁쟁이처럼 굴 필요는 없다."

"그……."

"자잘한 걱정들은 이 자리에서 땀과 함께 다 털고 가라. 이 이후로는 이런 모습들, 용납하지 않겠다. 알겠느냐?"

"예, 옛."

늦은 시간이 되어 수하들이 다 물러갔다. 땀도 실컷 흘렸겠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려던 군터는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미겔이었다.

"며칠 정도는 기다릴 줄 알았는데."

예정에도 없던 손님이었지만 군터는 맞아들였다. 그는 가벼운 차림으로 미겔을 맞은편 자리에 앉게 했다.

"그리 무겁게 책망을 들으신 것치고, 상당히 여유로워 보이십니다."

군터의 가벼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는지, 미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몇 마디 들었다고 전전긍긍 하기라도 해야 하나?"

"흐음. 영주님께서는 그러길 바라실지도 모릅니다."

"미트라스겠지."

"이거, 정말 의외군요.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었는데 말입니다."

"큰 걱정이 있으니 자잘한 걱정들은 하지 않게 되더군."

"영주님께서 직접 언성을 높이셨는데, 그것이 자잘한 걱정입니까?"

"이미 벌어진 일이 아닌가. 내가 바꿀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가슴을 무겁게 할 필요는 없지."

"허! 그렇다 치고, 그게 작은 일이면 큰 일은 무엇입니까?"

"내 안사람. 떠나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리 울적해 했는데, 더한 소식을 어찌 전해야 할지 고민이네."

"농담 같지만…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자네에게 농담을 왜 하겠나."

미겔은 잠시 침묵했다. 몇 번 눈을 깜빡 거리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범하신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거야 원."

"그보다, 어쩐 일인가? 위로라도 하려고 왔나?"

"그럴 리가요. 저라는 사람이,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은 못 되어놔서 말입니다."

"그럼 무슨 일이지?"

"동지가 곤란에 처했으니, 도우려 왔지요."

"도와? 나를? 어찌 말인가."

"자고로 과는 공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뜻이지?"

"재미있는 소식이 들려와서 말입니다."

미겔이 씩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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