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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18화 (318/1,064)

318화

영주 부인이 저지른 일. 그리고 그에 대한 영주의 반응에 대해 물밑으로 시끌시끌했다. 이야기가 퍼지면 퍼질수록 옳네 그르네 하는 말들은 더 많아졌다.

영주의 이혼은 기정사실이고, 그에 따라 리에론 공작(가문)과의 관계도 경색될 것이 뻔한 상황. 그런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영주가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물밑으로 말이다.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주절대고 다닐 무모한 자는 없었다.

그들은 영주부인에게 책임을묻기는 하되, 리에론 가문과는 최대한 신중하게 일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겁쟁이들의 생각이지요."

할렌이 투덜거렸다. 큼직한 고기 덩어리를 한 입 크게 베어 무니 육즙이 턱 끝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뭐만 하면 리에론, 리에론. 리에론을 빼고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이들 같습니다. 이제는 듣지 않아도 그네들이 할 말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 할렌.

군터가 픽 웃었다.

"겁이 많으니까. 본래 그런 자들인데 새삼스럽게 그러느냐."

"지겨워서 그렇습니다 지겨워서. 말이야 바른 말롤 리에론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먼젓번의 전쟁에서도 리에론 공작은 타르가이 베르겐에게 패퇴하여 밀리고 밀린 것 말고 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위험한 말이다. 바깥에 새어나가면 칼이 들어올지도 모를.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면서 할렌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식사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군터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장교들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앞에서라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이 리에론 공작을 잘근잘근 씹는 이야기일지라도.

"군사적인 능력과는 상관 없지. 왕국을 받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아닌가."

"기둥이고 뭐고, 너무 과대평가 되어 있는 게 아니냔 거지 내 말은. 솔직히 리에론 공작이 두렵기 보다는 그의 세력이 두려운 게 아닌가?"

"그 둘이 뭐가 다른가."

"다르지. 엄연히 다르지. 당장 우리 영주님만 해도 그렇지 않나? 그분께서는 세간에 리에론 공작의 막하로 알려져 있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계시지 않은가? 과연 우리 영주님만 그럴까?"

"호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군터가 나직이 감탄했다. 할렌답지 않은 식견(?)에 놀란 것이다.

군터의 반응에 용기를 얻었는지, 할렌은 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세력이라고 하는 자들은 결국 리에론 공작이 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의 밑으로 몰려든 것이야. 하지만 정작 알고 보니 리에론 공작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느꼈다면, 언제든지 그의 밑에서 떠나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으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행동으로 옮기는 건 또 다른 문제 아닌가."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한 방만 있으면 돼."

할렌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싸움도 그렇지 않나? 눈으로 서로를 몇 번씩이나 죽여도 한 번 먼저 치기 전까지는 싸움이 시작되지 않아. 바꿔 말하면, 먼저 한 번 치고 나면 그때부터는 쉽게 멈출 수 없게 된다는 거지."

군터가 웃으며 말했다.

"할렌. 네가 이런 생각도 할 줄 알았더냐?"

"하하.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이 깊은 속을 드러내면 다들 놀랄까 봐서 가만히 있는 것뿐이지요."

할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는 이도 한 번쯤은 맞는 소리를 할 때가 있듯이, 할렌이 이런 소리를 할 때도 있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할렌의 말을 듣고 보니 떠오르는군요."

살라스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웃고 있는 가운데 그 혼자만이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주님께서 아무런 믿는 구석도 없이 리에론과 등을 지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이번에 리에론과 틀어지게 된 이유는 영주부인, 이제는 전 영주부인이라고 불러야 할 확률이 높은 카트리나 리에론의 행각 때문이었지만 그게 구색에 불과함은 알 만한 이들이라면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막시밀리언은 리에론과 거리를 두려는 기색을 측근들에게 몇 차례 보인 적이 있었고, 그것을 떠올려보면 이번 일을 두고 반응이 너무 과하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영주는 자신의 하나뿐인 자식이 죽을 뻔한 데 화가 났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리에론과 거리를 두려 하는 구실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어쩌면…정말로 영주부인이 결백할지도 모르지.'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그녀는 벨리사의 말처럼 함정에 빠진 것이리라. 그리고 그렇다면, 그녀를 함정에 빠뜨린 자는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벌였겠는가.

'느지막이 얻은 후계자를 잃을 뻔했다는 건, 제법 훌륭한 명분이 될 터.'

조심스럽게 머릿속으로만 추측하게 된다. 느지막이 얻은 아들을 그렇게 예뻐하던 막시밀리언의 얼굴이 떠오르고, 길길이 날뛰며 이혼을 이야기하던 얼굴이 뒤이어 떠오른다.

씁쓸한 마음이 들던 차에, 살라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영주님께서는 어쩌면, 첨병과 같은 역할을 맡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무슨 뜻이냐."

"할렌의 말처럼, 처음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까. 언뜻 견고해 보이는 리에론 공작의 세력이지만 그 내부는 여러 권력자들이 저마다의 이득을 위해 뭉쳐있을 뿐이니, 그 단단한 결속을 안에서부터 흔들 수 있다면 겉에서 두드리는 것보다 쉽게 흩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첨병이라.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쨌든 영주가 국왕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은 사실이니, 살라스의 말처럼 그런 특별한 역할을 맡은 것일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후계자 독살 미수 같은 큼직한 일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명분이야 어차피 만들기 나름이니 이런 일이 터지지 않았다 해도 지금과 같은 일은 결국 일어났을 것이다.

"조만간, 영주부인…카트리나 리에론을 리에론 영지로 돌려보낸다더군."

"빠르군요. 영주님께서는 이미 마음을 굳히셨나 봅니다."

"그래. 살라스의 말이 맞든 틀리든, 어쨌거나 대외적으로 영주님께서는 크게 노하신 상태이니까. 감정적으로 움직이시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 같다."

이 또한 명분이다. 카트리나 리에론이 눈물로 결백을 주장해도 영주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는다.

"소공자만 불쌍하게 됐군요. 이제는 꼼짝 없이 유모의 품에서 자라셔야 할 게 아닙니까."

"글쎄."

소공자에 대한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수하의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때문에 군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그 순간의 표정 변화를 눈치 챈 이는 없었다.

*

카트리나 리에론이 위글로우를, 코누다이안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막시밀리언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무장한 병사들을 시켜 그녀를 끌어내다시피 하여 마차에 태웠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인원은 그녀가 결혼하여 위글로우로 올 때 데려왔던 하녀 몇 명 밖에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코누다이안의 안주인이었던 여인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방에 유폐 되었던 며칠 동안 그녀는 외부인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방에 갇혀 곧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상상하고 기다리기만 했다.

마차에 올라타기 전,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처량하기보다는 공허해 보였다. 틀림없이 숨을 쉬고, 몸에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사람이건만 속이 텅 빈 인형처럼 보였다.

'벨리사가 못 보길 잘했군.'

군터는 카트리나 리에론이 떠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막시밀리언이 자신은 더 이상 신경쓰기 싫다는 듯, 그에게 전 영주부인의 마지막 처리를 맡겼기 때문이다.

"살라스가 모실 겁니다."

그 한 마디가 카트리나 리에론과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사실 나눴다고 하기도 뭐한, 일방적으로 건넨 한 마디에 불과했지만.

"……."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축하는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른 것이 그녀가 한 행동의 전부였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군터는 굳은 얼굴로 있는 살라스에게 다가갔다.

"유쾌한 임무는 아니다만, 네가 그나마 부인과 면식이 있지 않았더냐. 마지막까지 잘 호위해서 리에론 가에게 인도해라."

"…예."

영지 경계까지 가야 하는 일이다. 호송하는 인물도 요인이라 할 수 있으니,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자가 이끌어야 했다.

카트리나 리에론과의 면식을 들먹였지만, 설령 살라스가 그녀와 생판 모르는 사이였더라도 군터는 그에게 이 일을 맡겼을 것이다. 중요한 일을 맡겨야 할 때,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수하는 역시 살라스였으니까.

"그럼, 이만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살라스와 백 명의 병사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위글로우를 나섰다. 먼 길을 가야 하고, 카트리나 리에론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일정은 더 이상 느슨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하게 잡혔다.

평범하게 말을 달릴 경우 하루면 갈 길을 그들은 나흘에 걸쳐 이동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법도 하건만, 살라스는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고 병사들을 다독이며 말은 물론 행동까지 조심하게 했다.

그것이 마차 안에 타고 있는 가련한 여인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예우였다.

"부인. 오늘은 이쯤에서 쉬어가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나마 처음 위글로우를 떠나올 때에 비해서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생겼다. 바깥 공기를 쐬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은 것이리라. 살라스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했다.

'조금씩 속도를 올려도 되겠군.'

병사들을 엄히 관리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도 이 느릿느릿한 이동속도가 답답하기는 했다. 이제까지는 카트리나 리에론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심스러웠지만, 그녀가 점점 기운을 차리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조금은 풀어도 괜찮을 듯싶었다.

하루의 이동을 끝내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음?"

타 들어가는 모닥불 앞에서 상념에 잠겨 있던 살라스는,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다시피 한 병사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어슬렁거리는 하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 하녀는 카트리나 리에론과 같이 마차에 타며 움직이는, 말하자면 하녀장이라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무슨 일이시오?"

"아, 그게…아가씨께서 잠시 혼자 있고 싶다 하시어……."

혼자 있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날이 다 저물고 나서 찬바람이 부는데 바깥으로 사람을 내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기가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아랫사람들을 챙기던 카트리나 리에론이었다.

그렇기에 살라스는 별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람이 차니 불이라도 쬐면서 기다리시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사양치 마시오. 부인께서 언제 다시 부르실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어차피 나도 주변을 한 번 둘러볼 생각이었소."

살라스는 자신이 있으면 불편할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한 대로 말을 타고 주변을 쭉 한 바퀴 돌아보고 왔다.

그런데 그가 돌아오고 나서도 하녀장은 여전히 불 앞에 앉아 있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음에도 말이다.

"부인께서 아직도 부름이 없으셨소?"

"예. 생각하실 거리가 많으신 모양입니다."

말로는 이해한다 하면서도 표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

갑자기 싸늘한 예상에 사로잡힌 살라스는 마차로 달려갔다.

턱!

문을 열려고 하니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잠근 것이다.

"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콰직!

살라스는 대답도 없이 닫힌 마차 문을 부쉈다. 우악스런 힘에 자물쇠가 나무문째로 부러지고, 닫혔던 문이 활짝 열렸다.

안의 공기가 바깥으로 흐른 순간,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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