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수 년 전부터 코누다이안의 문제는 줄곧 한 가지였다.
후계자의 부재.
영주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것. 그것이 코누디스를 섬기는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후계자가 생겼다. 그 하나만으로도 영지에 안정감이 생겼다. 비록 정실의 자식은 아니라 하나, 어찌 됐든 영지의 핏줄을 이은 후계자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다른 말이 나올 이유도, 감히 그럴 배짱을 가진 이도 없다.
"니클라스가 감찰대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렇군."
살라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를 흘깃 본 군터는 피식 웃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느냐."
"장주님께서 그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자는 말 한 마디도 없이 감찰대로 들어갔습니다."
"괘씸하다는 거냐."
"속이 좁다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마음이 드는군요."
"득을 보기 위해 끌어들였던 것이 아니다."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니클라스와 얽힌, 다소 꺼림칙한 관계를 알게 된 후에는 수하로 들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말 한 마디 없이 가지는 않았다."
"예? 아, 그 자가 장주님을 찾아 뵀었습니까."
"그래."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처음에는 어렴풋하게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며칠 동안 함께 움직이면서 알게 되었으리라. 어쩌면 과거를 물은 이후부터 어색해진 군터의 태도를 보고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당신이 그때, 그 투기장에 있던 자였군.'
홀로 찾아온 니클라스가 그 말을 꺼냈을 때, 군터는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춤으로 눈길을 주었다. 검을 가지고 왔는지 본 것이다.
하지만 니클라스는 죽으러 온 것은 아닌 듯했다. 그의 태도는 차분했다. 속으로 품은 감정이야 어떨지 몰라도 일단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다.
'당신을 원망할 수 없다는 것을 아오. 그런데 그걸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군.'
'이해한다.'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당신을 따를 수는 없소.'
'그 역시 이해한다.'
'다만 당신을 적대하지는 않겠소. 원한 역시 품지 않겠소. 당신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잘 아니,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그 빚을 갚겠소.'
'어쩔 셈인가?'
'감찰대로 들어가려 하오. 감찰대장이 직접 나를 청했으니, 따를 생각이오.'
그것이 니클라스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럭저럭 깔끔하게 해결 됐다고 생각했다. 미겔이 니클라스를 직접 청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그러니 그 녀석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라."
"예."
그러고 보면 위글로우로 돌아오는 길 내내 살라스와 니클라스의 사이가 썩 괜찮았던 걸로 기억했다. 성격이 비슷한 면이 있었는지, 검을 겨루지는 못해도 둘이 이런저런 대화를 꽤 나누었었다.
살라스가 이렇게 감정이 상한 듯 보이는 것도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친구, 내지는 동료가 생겼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살라스. 넌 어째서 가정을 꾸리지 않느냐?"
"아…소관은 아직, 마음에 차는 여인을 만나지 못하여."
"꽤 이야기들이 들어오는 것으로 아는데, 만나보지도 않고 거절만 하는 것은 아니냐?"
"음.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본인이 원치 않는다는데 억지로 권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그러나 살라스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보다는 서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말단 군졸이어서 벌이가 시원치 않다면 모를까, 살라스 정도 되는 고위 장교면 더 이상 돈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다.
가진 건 돈뿐인 상인들이 자기 딸을 데려가 달라고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다. 그 많고 많은 여식들 중에 어찌 마음에 차는 여인 하나가 없을까 싶건만, 살라스는 고개를 저으니 군터로서는 의아할 뿐이었다.
"장원의 인구가 너무 늘어, 목책을 새롭게 세워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음."
바오룸의 부족 일부와 다른 부족들민들 일부가 군터의 장원에 정착했다. 덕분에 인구가 거의 천 명에 가까울 정도로 불어나 집 몇 채 더 짓는 것으로는 감당이 어려울 지경이 됐다.
"목책이라. 기왕에 세운다면 제대로 해야겠지. 그러려면 목수들이 필요할 텐데."
"이포레테스 상단주를 통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도 물자도, 그를 통한다면 쉽고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인사를 드린다고 하니, 그때 의논하시지요."
"좋아. 적당한 때에 약속을 잡아라."
"예."
이포레테스와의 약속은 사흘 뒤로 잡혔다.
그러나 사흘 뒤, 군터는 이포레테스를 만날 수 없었다. 약속을 깬 셈이 되었지만, 이포레테스도 이해했다. 권위에 눌려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사정을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온 위글로우가, 온 코누다이안이 발칵 뒤집힐만한 일이 벌어졌다.
영주부인이 영주의 젖먹이 아들을 독살하려 했다. 그녀의 끔찍한 악의는 때마침 요람을 살펴보러 들렀던 시녀에 의해 발각 되어 저지당했으며, 덕분에 영주의 아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영주부인의 행각을 뒤늦게 전해들은 영주는 그야말로 대노했다. 그는 즉시 부인을 유폐시키고 수하 관료들을 불러모았다.
늦은 밤. 막 잠에 들었거나 들 준비를 하고 있던 관리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영주 관저에 모여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수하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막시밀리언은 길길이 날뛰었다. 평소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표정을 구기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드문 그가, 이번만큼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처음 간밤에 발생한 끔찍한 일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 줄곧 그의 목소리는 낮아질 줄을 몰랐다.
"부인께서 어찌 그런……."
"부인이라는 말도 쓰지 마라! 내 아들을, 이제는 제 아들이 된 갓난아이를 죽이려 한 여자다!"
"영주님. 그렇다면 혹……."
잔뜩 노기가 서려 있으면서도 단호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 그에 무언가 낌새를 느낀 이들이 슬쩍 영주의 의중을 떠보았다.
막시밀리언은 감출 것 없다는 듯, 그들의 의문을 즉각 해소시켜 주었다.
"내 아들을 죽이려 한 여자와 어찌 한 집에 살 수 있겠는가! 리에론 가문에 즉시 사람을 보낼 것이다. 그 사람, 카트리나 리에론과 이혼하겠다고 말이다!"
"으음."
"여, 영주님. 심경을 이해하나, 조금 더 신중하셔야 합니다. 일단 이혼을 하게 되면,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게 됩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내 아들이! 내 뒤를 이어 코누다이안을 이끌 내 후계자가 죽을 뻔했단 말이다! 그것도 어머니라는 작자에게!"
만류하는 이들을 당장 벌하기라도 할 것처럼, 반론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쏘아붙였다. 대다수가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가운데, 군터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영주부인이 소공자를 해치려 했다고?'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도 몇 번 본 적도 있는 데다 벨리사에게 귀가 따갑도록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녀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성품이 선하고 속이 깊은 여인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 그녀가, 어린 아들(자기 배로 낳지는 않았다고 하지만)을 죽이려 했다고?
"늦은 시간에 그대들을 불러 모은 것은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알리기 위함이었다.
내 이미 결심을 했으니 그대들은 더 말하지 말라. 나는 카트리나 리에론과 이혼할 것이며, 이로 인해 리에론이 나를 밀어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비로서 내 아들을 지킬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라면 리에론과 적이 된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영주의 마음이 이리도 확고하니 감히 누가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관리들은 저마다의 속내를 숨긴 채 고개 숙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군터는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고민했다. 그가 들은 이야기를 벨리사에게 알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말이다.
솔직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벨리사는 눈물부터 쏟을 것이다. 그리고 속을 까맣게 태우겠지.
하지만 지금 그가 알리지 않는다 한들, 어차피 하루 이틀 내로 알게 될 것이다. 들리는 이야기를 듣든, 영주부인을 만나러 나섰다가 알게 되든, 결국에는 알게 된다. 그때가 되어 그녀가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원망 섞인 물음을 던진다면 그때 가서 그는 그녀에게 뭐라 말할 것인가.
'…어쩔 수 없군.'
군터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잠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벨리사에게 그가 들은 모든 이야기를 전했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부인께서 소공자를 해하려 했다니요? 부인께서는 소공자를 당신의 아이처럼 여기셨다고요."
예상했던 대로, 벨리사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절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군터는 그럴 리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그녀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요. 뭐, 뭔가 잘못 된 게 분명해요."
"증인이 있소 벨리사. 한 시녀가 영주부인이 소공자를 해치려 한 것을 보고, 그것을 막았지. 그 뒤에 달려온 시녀며 하인들이 똑같이 증언했다 들었소. 영주부인이…소공자에게 독이 묻은 천을 가져다 대려고 했다고 말이오."
"그럴 리가…그럴 리가……."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거리던 벨리사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그, 그래요. 부인께서 말씀하셨었어요. 저택에서 일하는 종들조차 당신을 우습게 보고 있다고요. 어, 어쩌면 그들이 합심해서 부인을 모함하려 한 게 아닐까요?"
"……."
"부인은, 부인은 함정에 빠진 거에요.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부인께서 소공자를 해하려 했다는 것보다는 더 신빙성이……."
횡설수설하는 벨리사를 군터가 막았다.
"벨리사. 내 말을 들어보시오."
"……."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르오. 정말 영주부인이 결백하고, 당신 말처럼 함정에 빠진 것일지도 몰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맞아요. 부인께서 그러실 리 없……."
"내 말을 끝까지 들으시오. 혹시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칩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아무 의미 없소."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째서."
"당신과 내가 생각하는 것을 영주님께서 생각지 못하셨을까? 나는 아니라고 보오."
막시밀리언은 냉정한 자다. 자식의 문제이기에 흥분할 수는 있어도, 그런 와중에도 이성적인 판단을 그르칠 사내는 아니다.
그런 그가 조금 전 관료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펄펄 날뛰었다. 이성을 반쯤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만큼.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만큼 화가 났구나 하겠지만, 군터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막시밀리언이라는 사내를 잘 알기 때문이다.
"영주부인이 결백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영주님께서 부인과 갈라서기로 마음을 먹으셨다는 거지."
벨리사가 말을 잃었다. 굉장히 충격을 받은 듯, 살짝 벌린 입에서는 자그마한 숨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힘들겠지만…받아들이시오. 영주부인은 이제 끝났소. 누구도 그녀를 구하지 못해."
아주 조금, 무력감이 고개를 들었다.
착각일 것이라 여기며, 군터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은 아내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