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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16화 (316/1,064)

316화

영주부인, 카트리나 리에론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 비극이라 할 만한 일이다.

제 배로 낳지 않은 아이가 생긴 것? 아니다.

그로 인해 세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 커진 것? 역시 아니다.

리에론 가문에, 리에론 공작령에서 관리로 일을 하고 있던 그녀의 아비가 죽었다. 병사(病死)였다.

본래부터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한다. 군터는 이 이야기를 아내를 통해 들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은 이야기였는데 벨리사가 워낙 울적한 얼굴로 말하는 터라 한동안 자리에 앉아 영주부인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간간이 '안됐군' 정도의 공감 표시도 해주면서 말이다.

"안됐군."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반복하는 말이다. 낮은 목소리에 벨리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역시 같은 횟수 반복하는 행동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주변에서 부인을 어떻게 보는지, 수군거리는지를 빤히 알면서도 그저 방치하시는 영주님이 야속해요."

"…조심하시오. 입 밖에 내는 말은 종종 내지 말아야 할 때도 흘러나갈 수 있으니."

"조심할게요. 어차피 제가 밖에서 만날 사람이라고 해도 영주부인뿐이에요.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제게 다가오지 않더군요."

군터가 혀를 찼다.

"못난 여인네들 같으니."

"괜찮아요. 오히려 전 편해서 좋은 걸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았기에 군터는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못마땅한 속마음까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예전, 벨리사와 함께 어울리던 미트라스 부인(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이 요즘에는 척을 진 것처럼 행동한다는 이야기를 벨리사를 호위하는 호위병들을 통해 얼핏 들었다.

아무리 상황 따라 변하는 게 사람의 태도라지만, 특별히 벨리사가 그녀에게 잘못한 일도 없을 것인데 그리 나온다는 말에 군터는 못마땅함을 넘어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사자나, 미트라스를 찾아가 뭐라 하지는 않았다. 여인네들의 일은 여인네들의 일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화가 나는 건 나는 거다.

"개의치 마시오. 못난 이들일수록 입을 놀리기 좋아하는 법이니."

"전 괜찮아요. 그저 영주부인이 딱할 뿐이에요."

"부인에게도 그리 말하시오. 그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벨리사가 싱긋 웃었다.

"예. 당신이 그리 말했다고 전할게요."

"마음대로 하시오."

벨리사가 갑옷 끈을 조여 묶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병사들보다도 더 능숙했다. 아마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같이, 수 년 동안 한 일이니까 말이다.

"다녀 오겠소."

"다녀 오세요."

군터는 아내와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살라스와 할렌을 비롯한 수하들이 준비를 마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오룸이 장주님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미트라스 경이 회유한 모양입니다. 그에 대해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다더군요."

"영악하군."

군터가 실소했다. 굳이 미트라스의 이름을 들먹이는 이유가 쉬이 짐작이 갔다.

"머리가 쉽게 뜨거워지긴 해도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지요."

"흥! 그 자식. 세상을 배우니 어쩌니 하더니만 안 좋은 것만 배워갔군요."

"매도할 필요는 없지. 나름대로 필사적인 것뿐."

바오룸이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한 무리를 거느린 입장이다. 되도록 따져보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얻어내는 것이 맞다. 그렇기에 군터는 바오룸의 이런 행동이 불쾌하기 보다는 기껍게 보였다.

"만나겠다 해라. 오늘 저녁 쯤이면 괜찮겠군."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

모렌스 자작이 그의 새로운 영지로 떠났다. 코누다이안의, 막시밀리언의 입장에서는 '드디어'라고 생각할 만큼 반가운 일이었다.

그에 따라 영지 병합이 이루어지면서 코누다이안 이라는 이름의 땅이 크게 불어났는데, 이에 따라 부족해진 것이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란 영지의 인구가 아니라 관리들을 이름이었다.

기존 브록스의 관리들, 그러니까 하급 관리들은 대부분 모렌스 자작을 따라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지만(정확히 말하면 모렌스 자작이 데려가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들을 관리할 중간 급 이상의 관리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기존의 관리들 중 대충 올려 쓸 수도 없었다. 막시밀리언은 이제껏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쓰고자 했다.

그런데, 빈 자리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미리 인선을 어느 정도는 준비를 했지만, 새로이 병합된 기존 브록스 영지 출신들의 반감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현지인들을 어느 정도 기용해야 했기에 문제가 생겼다. 누가 능력이 있는지를 어찌 알 것인가.

영지의 관리 임용은 기본적으로 영주의 재량이다. 하지만 영주가 수많은 관리들의 인사를 직접 챙길 수는 없는 만큼, 기본적으로 일정 위치 이상의 관리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지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추천이었다. 기존 관리, 혹은 이름 있는 이들이 인물들을 관리로 추천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능력이 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한 안타까운 인재이기에' 같은 이유를 들며 추천을 한다. 하지만 실은 당사자와 혈연이든 지연이든 해서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상응하는 대가를 받고 추천을 해주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러니 능력 있는 자보다는 능력은 없지만 욕심만 있는 자가 자리에 앉게 되는 경우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막시밀리언은 이런 부조리를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군터가 알기로는 그랬다. 그리고 그런 문제는 코누다이안에도 없지 않았다. 토착세력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이권을 안겨줘야 했고, 그 이권에는 권력 역시 포함이었다.

다만 막시밀리언은 감찰대를 운용하면서 관리들이 저지르는 묵과할 수 없는 수준의, 필요에 따라서는 자잘한 비리들까지 잡아내면서 관리들이 마냥 무능하고 부패할 수 없도록 고삐를 조였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물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영지의 관료체계가 무능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영지 병합 후, 막시밀리언은 즉각적인 조치에 들어갔다. 그는 관리들의 기강확립이라는 명목 하에 가차 없는 숙청의 칼을 휘둘렀다. 그 칼은 당연 감찰대였다.

막시밀리언의 허락을 얻은 미겔은 그야말로 감찰대의 역량을 총동원했다. 영지의 주인이 바뀌면서 관리들은 몸을 사렸지만, 눈에 불을 켠 감찰대는 그들이 과거 저지른 실수 혹은 비리들까지 철저하게 파헤쳤다. 죄질이 심한 자들은 즉각 감옥에 갇혔고, 덜한 자들은 면직 혹은 파직되어 쫓겨났다.

그에 따라 가뜩이나 적지 않던 빈 자리가 더 늘어났고,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막시밀리언은 한 가지를 시행했다.

"시험을 치르겠다."

기존 관리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었다. 승진 시험이라고 해야 할까. 시험에 응시한 관리들은 한 자리에서 제시된 문제에 대한 답안을 작성하며, 답안에 대한 평가는 영주가 직접 한다. 문제의 출제에도 영주가 참여를 하니, 시험 전체를 영주가 관리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바뀐 주인 아래서 긴장과 두려움, 혹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관리들이 의욕에 불탔다. 능력 있거나, 욕심 있는 자들이 대거 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그 중 소수가 위에 있는 빈 자리에 올라섰다.

"그래도 쓸 만한 재목이 없지는 않군.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쓸모 없는 것들을 쳐내고, 쓸 만한 것들을 위로 올린다. 아래에 남은 빈 자리는 그렇게 올린 이들로 하여금 채우게 한다.

능력 있는 자들이 고르는 자들은 대개 능력이 있기 마련이다. 문제가 있다면 다시 쳐내면 된다.

그때는 쳐낸 이들을 천거한 이들 역시 책임을 지게 될 터이니, 그런 작업을 몇 번만 반복하면 인사 문제는 더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음? 가장 큰 문제를 해결했지 않은가. 그간 신경을 많이 썼으니까…후련하지."

"소관의 생각에는…단지 그뿐이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하. 자네 눈에도 보이는가?"

보이기만 할까. 마치 알아달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표정이 하루 종일 밝다. 그 이유를 짐작했지만, 그래도 군터는 물었다.

"자식이 생긴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싶다네. 아들놈 얼굴만 봐도 피로가 풀리는군."

"신기한 경험이지요."

"맞아. 정말 신기해."

겪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진귀한 보물이 갑자기 생기는 느낌이다. 자신의 목숨만큼, 어쩌면 그보다도 더 소중한.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품에 안으면 그게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은.

"전과는 달라졌어. 이제는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다네. 하하."

"주제넘은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영주님께서는 좋은 아버지가 되실 것 같습니다."

여전히,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 듣기에 좋았던 것일까.

"그러길 바라네. 그럴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어."

다만 그 한 마디를 뱉는 그의 얼굴은 뭐랄까, 묘했다. 웃고는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텅 빈 것 같다고 할까. 무언가 다른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

"볼드의 잔당이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설마 했었지. 살아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군."

"이렇게 높으신 분일 줄은 몰랐소."

미겔과 니클라스는 마주 앉았다. 미겔은 웃었고, 니클라스는 예의 그 딱딱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경계심이나 적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다분히 사무적인 태도였다.

"당치도 않군. 그저 남들 눈총이나 받으면서 사는 사람일 뿐이네."

"감찰대는 영주직속이지 않소. 눈총을 받는 것이야 하는 일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말이 맞아. 어쨌든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자리니까 말이네."

"이제 슬슬…날 부른 용건을 알려주셨으면 좋겠소."

"급하군. 자네와 자네 무리들에 대해 업무적으로 용무가 있는 것은 아니네. 자네들이 위글로우에 오고 나서 그새 잘못을 지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안심해도 좋아."

"그렇다니 안심은 되지만, 더 궁금해지는군. 그렇다면 용건이 뭐요?"

"내 자네와 자네 수하들의 실력을 알고 있지. 그래서 권하는 것이네만, 감찰대로 오지 않겠나?"

"……."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감찰대에 들면 누구도 자네들을 쉬이 여기지 못할 것이야. 자랑은 아니지만, 감찰대라는 곳이 그런 곳이지."

감찰대의 업무는 크게 두 가지다.

영지의 사찰. 그리고 관리의 사찰.

전자는 사실 특별할 것 없다. 비슷한 일을 각지의 병력들도 하고 있으니까. 감찰대가 특별한 이유는 후자 때문이다.

관리들을 사찰한다는 것. 그것은 영주의 눈 역할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직 영주의 명만을 받고, 오직 영주에게만 보고한다. 두려울 것이 없는 관리들의 치부를 쥐고, 그들을 두려움에 젖게 한다. 설혹 잘못이 없다 해도 마찬가지. 감찰대는 필요하다면 없는 잘못까지 만들어내어 목에 줄을 걸 수 있는 집단이다.

그런 감찰대의 대장이 직접 나서서 영입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 없던 파격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미겔은 니클라스와 그의 무리들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직접 칼을 부딪쳐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두 자루 검을 사용하는 볼드의 잔당. 혹시나 했건만.'

솜씨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의리까지 있다. 죽은 주인을 위해 수 년간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하기 힘든 일. 만약 니클라스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든든한 수하 하나를 얻는 것 이상이다.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겠네. 섭섭지 않을 거라 약속하지. 어떤가?"

"제안에 감사하오. 허나 즉답은 어렵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오."

"얼마든지. 답을 줄 때까지 기다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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