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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15화 (315/1,064)

315화

"코누디스 자작을 섬기겠소."

"좋아."

니클라스는 예상했던 대로 결정을 내렸다. 군터는 그 즉시 가둬두었던 니클라스의 수하들을 풀어주었다. 화전민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두려운 기색이 아직 남아 있었으나 니클라스로부터 코누디스 자작을 따르기로 했다는 말을 듣자 크게 안도했다. 적어도 목 달아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일이 마무리가 되고서도 군터와 병사들은 마을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니클라스의 무리들이 떠날 준비를 해야 하기도 했고, 막시밀리언의 전갈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위글로우로 향했던 전령은 정확히 하루 뒤에 돌아왔다.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서신을 받아 읽고 곧바로 태웠다.

"함께 돌아오라시는군."

"생각보다 빠르군요."

"영주님께서 후계자를 얻으셨다."

"예? 그게 무슨."

살라스가 눈을 크게 치떴다.

"말 그대로다. 영주님께서 득남하셨다."

그 아들이 영주부인에게서 얻은 게 아님은, 그럴 수 없음은 살라스도 잘 알았다. 그의 당황이 조금 더 길게 이어졌던 이유다.

"위글로우는 지금 난리가 났겠군요."

"글쎄. 아마도 그렇겠지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담담한 목소리 속에 숨은 못마땅함을 읽었는지, 살라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자연스럽게 화제가 돌아가자 그제야 다시 말을 내기 시작했다.

"니클라스와 그의 수하들은 정병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지의 군대보다도 더 낫습니다. 군율을 알고, 기강이 칼처럼 잘 서 있더군요. 하지만 그래서 더 신경이 쓰입니다."

"무엇이 신경 쓰인단 말이냐."

"그들은 모두 니클라스의 부하들입니다."

"그 니클라스가 따르기로 했지. 걱정할 것 없다."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다른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방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리 없다."

"어찌 확신하십니까?"

군터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개가 어찌 우는지 아느냐."

"예?"

"아니, 짖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개는 개처럼 울지. 닭처럼 울지 않아. 그렇지 않으냐?"

"그야 당연히……."

"마찬가지로 니클라스 역시 그렇다. 어설프게 잔머리나 굴리는 녀석이 아니다. 내가 그 녀석을 잘 모르긴 하지만, 내 눈엔 그리 보였다."

게다가 만약 그런 놈이었다면 이제껏 도망자 생활을 계속 하면서도 수하들이나 화전민들에게 이렇게까지 인망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 봐도, 그의 입장에서 코누다이안에 귀의하는 것이 절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복수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 했지만, 대신 그 자신과 따르는 이들의 안위를 얻지 않았는가.

"넌 어찌 생각하느냐."

"그 자가 어떤 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망 없는 바람만큼 잔인한 것은 없겠지요. "

니클라스도, 그를 따르는 무리도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꿈꾸는 복수는 사실 이루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은 억지로 붙들고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자그마한 계기로 다시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들이 다시 현실도피를 할 이유는 없다.

살라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우려를 드러낸 것은, 자그마한 위험 요소라도 피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위글로우에 당도할 때까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그래야만 안심이 된다면, 그리해라."

"예."

일단 복귀명령이 내려온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병사들 및 니클라스와 그의 수하들이 몸을 회복하기를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몸이 상한 이는 없었기에 군터는 미적거리지 않았다.

"몸은 좀 괜찮은가."

"괜찮소."

모든 이들을 통틀어 가장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이가 바로 니클라스였다. 칸젤에 베인 상처는 그리 깊지는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에게 상당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니클라스는 그저 잘못 베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군터는 그게 아님을 잘 알았다.

군터의 창, 칸젤이 머금고 있는 사기가 그의 몸에 흔적을 남긴 덕에 그의 고통이 심한 것이었다. 단지 베고 지나갔을 뿐이라고 해도, 칸젤의 사기는 끈적하게 달라붙는 점액마냥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별한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최소 열흘 정도는 고생해야 하리라.

"조금 더 시간을 주고 싶지만 영주님의 명령이 내려온 이상 어쩔 수 없다."

"내 몸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괜찮소. 이 정도쯤은……."

말은 그리 해도, 파리한 안색을 보면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사실 군터는 지금도 손을 쓰기만 하면 간단히 니클라스의 상처에 달라붙어있는 사기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의 자그마한 비밀이 밝혀지게 되니,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어차피 며칠 정도 괴로울 뿐이다. 지금도 상처에 맺힌 사기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

이동속도는 느렸다. 부상자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화전민들을 같이 데리고 가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하면 그냥 놔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화전민들 중 일부가 니클라스 무리의 가족들이었던 탓이다.

"도망자 신세에도 용케 가정들은 꾸렸군."

"정처 없이 떠돌던 와중에 유민들을 조금씩 받아들이다 보니 그리 되더이다."

군터는 니클라스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가는 길에 심심한데 말동무나 삼을 요량에서였다.

"자네들 이야기나 좀 들려주게."

"이야기라도 해도, 딱히 늘어놓을 만한 것은 아니오."

"그럴 리가. 제법 파란만장했겠지. 어차피 며칠은 가야 할 텐데, 그 동안 할 일도 없지 않나."

니클라스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더 거부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거부권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난 작고하신 영주, 볼드 남작 각하의 신하였소. 과분하게도 기사 서임까지 받은 몸이었지."

"호오."

그렇다면 군터 자신과 동급이다. 물론 이제는 사라진 신분이니 크게 의미는 없지만.

어쨌든 잘 선 칼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묘하게 기품이 느껴지는 이유가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니클라스는 분명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일 것이다.

"반드레온이 영지를 침략해왔을 때, 나는 영지의 병사들을 이끌고 맞서 싸웠소. 하지만 경도 알다시피 패퇴했고, 영지를 침략자들의 손에 넘겨주고 말았지. 섬기던 주인까지 잃었고, 그런 주제에 구차하게 한 목숨은 건져서 몸을 피했소."

자괴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후로 어떻게든 살아남은 병사들을 규합하여 침략자 놈들에게 저항했지. 정면에서 맞설 힘이 없었기에 대대적인 전투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한에서 모든 것을 했소."

저항군이 깃발을 휘날리던 초기에는 분명 그 위세가 제법 대단했었다. 종종 그 소식이 군터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놀랍군. 아니, 그렇다기보다 신기해. 우두머리를 잃은 군대가 어떻게 그리 버틸 수 있었던 건가."

우두머리라는 표현에 잠깐 눈썹을 꿈틀거린 니클라스였지만, 딱히 반발하지는 않았다.

"우리를 한데 뭉치게 하는 분이 계셨었으니까."

"음?"

"영주님의 자제분이 계셨소. 떳떳한 핏줄은 아니었으나, 계승권을 지닌 직계혈족이 모두 명을 달리하신 탓에 그분께서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지."

'사생아인가.'

아니면 뭐 비슷한 경우겠지. 하지만 니클라스 스스로도 떳떳하지 않은 신분이라 말을 하는데도 반군의 구심점이 될 정도면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으리라.

"뛰어난 분이셨소.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앞선 계승권을 가졌던 그 누구보다도 더 자격이 있는 분이셨지. 용감하고, 현명하며…사려가 깊은 분이셨소."

한탄하는 투였다.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분노와 서글픔이 묻어났다.

"그는 죽었나?"

"그렇소. 브록스 군의 함정에 빠져 생포 당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구하려 틈을 노렸었지. 그러던 중 반드레온이 코누디스 남작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리고 그분과, 함께 사로잡힌 동료들이 같이 호송된다는 정보까지 입수했지."

그때, 군터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무슨 의도인지는 알 수 없었소. 십중팔구 함정일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가지 않을 수는 없었소. 그분을 구할 수 있다면, 일말의 가능성에라도 목숨을 걸어야 했지."

"으음."

침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니클라스의 충의에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당황, 당혹이었다.

'이거 참…얄궂군.'

혹시 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모렌스 남작(당시). 그가 이끌고 온 죄수. 아니길 바라지만 아닐 확률은 이제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틀림없다.'

영주의 생일을 기념하며 모렌스 남작이 선물로 가져왔던, 기이한 능력을 썼던 죄수들.

많은 시민들이 보던 앞에서, 군터는 그 죄수들을 모조리 베었었다. 딱히 악감정을 가졌던 것은 아니나, 그들의 피를 손에 묻히고 그들의 숨을 끊어놓았던 것은 분명 그였다.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유쾌한 이야기도 아니고, 굳이 말을 해서 득 될 것도 없다.

문득 괜히 과거를 들췄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죄를 진 것도 아닌데 뭔가 자그마한 찝찝함이 마음에 얹혔다.

'어차피 어떻게든 죽을 자들이었다.'

구질구질한 자위가 아니다. 분명한 사실이다. 어차피 그들은 그 투기장 안에서든, 아니면 다른 곳에서든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숨은 쉬었으나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머리가 텅텅 비고 살육의지 밖에 남지 않은 인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상태를 살았다 할 수는 없다.

때문에 그가 한 일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인형의 머리 위에 붙은 실을 잘라낸 것에 불과했다. 군터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때도, 지금도.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지. 원한을 잊으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이제부터는 새롭게 섬기게 된 주인께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야."

"…그리하겠소.."

"편치 않은 목소리군."

"아직 미련이 남아있으니까."

모든 것을 다 잃었음에도 그토록 오랫동안 항거불가의 대적에게 억지로 맞서온 니클라스다. 그 동기가 오롯이 충심에 있지는 않았다 해도, 일부나마 자리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충신이라 할만하다.

군터는 그런 자를 싫어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줏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니클라스를 바라보는 눈매가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이번 일이 자네에게도 좋은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지."

"나 역시, 그랬으면 좋겠소."

니클라스의 담담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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