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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14화 (314/1,064)

314화

"사망자는 없습니다. 중상자도 없습니다. 다만 며칠 요양이 필요한……."

"이쪽의 수가 몇 배는 더 많았다"

군터의 질책에 살라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적들의 실력이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던 데다가, 되도록 죽이지 않고 생포하려 하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게다가 수가 많았다고는 해도, 적은 한 데 뭉쳐 있었고 아군은 흩어져 있었기에……."

변명일 뿐이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가 직접 상대해 잡은 도적들의 수괴. 그의 솜씨는 보기 드물 정도로 빼어난 것이었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두목이 그 정도라면 그 부하 놈들 역시 보통 이상은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더냐."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이곳에는 의사도 없으니 하루 이틀 동안이라도 몸을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알겠다. 어차피 심문도 해야 하고 하니, 그 정도는 괜찮겠지."

"예. 헌데 장주님. 혹……."

"뭐냐."

"놈들을 거두려 하십니까?"

"왜 그리 생각했지?"

"그게 아니라면, 굳이 되도록 생포하라는 명을 내리시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심문을 한다면 몇 명 정도만 살려도 충분했을 터인데……."

"브록스의 추적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은 놈들이다. 실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허면."

"아직은 결정한 것이 없다. 놈들이 그저 원한에 사무친 도적 놈들일 뿐이라면 거둘 가치도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군터는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눈에 불을 켜고 있던 놈들의 우두머리를 떠올렸다. 그 정도 독기는 덜떨어진 도적 수괴 따위는 지닐 수 없는 것이다.

"심문은 내가 직접 하겠다."

"옛.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의식을 되찾았다 합니다."

군터가 몸을 일으켰다.

*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화전민들 중 나이 좀 있어 보이는 사내가 간단한 약초 몇 가지를 만질 줄 안다 하여 그에게 부상자들을 돌보게 했지만, 이 사내가 입은 상처는 그런 풀 몇 개로 다스릴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았다. 급소는 피했다지만, 마지막 순간 칸젤에 베인 상처는 제법 컸다.

"니클라스. 그게 네 이름이라 하더군."

"……."

사내, 니클라스는 침묵했다. 눈빛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말할 기운도 없는 것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케일리스 볼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었나 보군. 아니면 모렌스 자작을 정말로 증오했었거나."

"왜 살려둔 거지?"

"들은 바로, 네놈들이 보통의 도적 놈들과는 조금 다르다 했으니까. 직접 내 눈으로 봤을 때도 그랬고."

"…도적이 아니라 했다."

"도적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세간에서 보는 너희는 도적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는 저열한 침략자 놈에게 반기를 들뿐이다."

군터는 재미있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이미 국왕께서도 모렌스 자작의 볼드 합병을 용인하셨다. 나라가 인정했는데 너희가 뭐라고 정당한 지배자를 부정하지?"

"큭!"

니클라스가 이를 갈았다.

군터의 말은 허점을 제대로 찔렀다. 발단이야 어쨌든, 현재에 이르러 모렌스 자작이 볼드의 지배자라는 것은 베이고르 전체가 인정했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니클라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 뿐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국왕의, 나라의 뜻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솔직해지지.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 복수가 너희 개개인의 복수든, 이전에 섬기던 주인의 복수든."

"그쪽이야말로 솔직해지는 것이 어떤가. 어설픈 말로 나를 욕보이면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

나름대로 잘 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역시 말재주는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닌 듯했다. 군터는 내심 혀를 차고 자세를 바꿨다. 의자에 기대어 내려다보던 것에서 몸을 바로 세우고 그를 노려보는 니클라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복수는 불가능하다. 모렌스 자작은 너희 따위가 노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야. 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제대로 된 시도는 못해보고 상단이나 털고, 떨어져 나온 순찰대나 덮치면서 그래도 성과를 내고 있다 자위하는 것이 아닌가?"

"……."

니클라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대로 짚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모렌스 자작은 이제 곧 이곳을 떠난다. 멀리 떨어진 서부의 새 영지로 기반을 옮기게 됐지. 그러면 어찌할 것이냐. 그를 따라 서부로 옮겨가기라도 할 것이냐?"

입술을 달싹이지만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보아하니 이 마을에는 그가 데리고 있는 부하들의 가족도 상당수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즉, 그의 기반은 이곳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도망자인 그들이 전시의 난민들처럼 이리저리 옮겨갈 수는 없는 노릇.

"내게 뭘 바라나."

그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는 기세가 꺾였다.

군터는 이때다 싶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너그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제 그만 도망자 생활은 청산해라."

"…그 말은, 코누디스 자작을 섬기라는 뜻인가?"

"그래."

"코누디스 자작 역시 리에론 공작의 막하가 아닌가. 그가 우리를 거둘 수 있겠는가."

"세간에 알려진 만큼 영주님과 모렌스 자작의 사이는 그리 돈독하지 않다. 밑으로 들어온 수하를 건넬 정도는 되지 않아."

"……."

"잘 생각해라. 가벼운 제안은 아니다. 그랬다면 굳이 네 수하들까지 살리려 애쓸 필요가 없었겠지."

군터는 니클라스의 수하들을 최대한 살려서 제압한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요인이 되리라 확신했다. 화전민 모두에게서 나쁜 소리 하나 듣지 않는 우두머리라면 수하들을 아끼는 마음 역시 크기 마련. 그렇다면 그가 내릴 결정 역시, 그 자신만을 위한 결정이 아닐 것이다.

"시간을 주지. 충분히 생각해보도록."

군터는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살라스가 다가왔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더군. 신중한 자야."

"신중하지 않다면 이제껏 이 무리를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쫓겨 다니지 않았습니까."

"위글로우로 전령은 보냈느냐."

"예. 이곳의 일을 소상히 적었습니다."

전령이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대충 시일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니클라스가 고심을 끝내고 답을 줄 무렵, 혹은 그 직후쯤 되면 영주의 답을 받아올 수 있을 터.

"영주님께서 허락을 하실는지."

"영주께서는 실리를 중시하시는 분이다."

영주가 불허한다면 이들을 다 죽이거나 포박하여 압송해야 한다.

"쓸만한 병력이 공짜로 굴러들어오는데 마다하실 이유가 있겠나."

군터는 막시밀리언을 잘 알았다. 때문에 그럴 일은 없으리라 보았다. 그럴 확률은 니클라스가 제안을 거절할 확률보다도 더 낮으리라.

*

"영주님. 어찌하시겠습니까?"

"받아들인다. 어려울 것 없지 않은가."

"하오나, 이 일이 모렌스 자작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곤란한 경우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모렌스 자작은 이제 곧 떠난다. 그의 귀에 들어갈 일도 없을뿐더러, 들어간다 해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이런 자그마한 일로 나와 얼굴을 붉히려 할 자가 아니니까."

막시밀리언은 간단히 우려의 목소리를 일축했다.

"그보다…내 자네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네. 음, 알려줄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소신들에게 말이십니까? 무엇입니까?"

"내 안사람과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자네들의 우려가 컸던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들의 우려가 큰 만큼, 내 우려 역시 컸다네. 어찌 되었든 내 후사가 아닌가. 나 역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스스로 덮어두었던 민감한 주제를 도리어 먼저 들추니 관리들은 표정관리를 하는 데 급급했다. 그런 중에 그나마 침착한 자가 입을 떼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소신들이 영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아아. 괜찮네. 탓하고자 한 것이 아니야. 아무튼 들어보게들. 아무튼, 그렇다 보니 내 안사람과의 사이가 소홀해지고 답답한 마음이 나날이 커져갔네. 그러다 바깥에서 몇 번 계집들을 안았었는데."

공석에서 할 이야기는 분명 아니었다. 영주의 잠자리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기어이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작게 헛기침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도 막시밀리언은 꿋꿋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쯤 되어서는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는 자들도 있는 반면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낯빛을 굳힌 자들도 몇 있었다.

"그런데…그 중에 하나가 아이를 가졌다네."

"헙!"

이제는 모든 이들이 눈치를 챘다. '설마'하는 표정을 지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막시밀리언은 그들의 의심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었다.

"사내 아이를 낳았더군. 나도 얼마 전에 알았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더군. 어찌 되었든 내 아이고, 사내 아이가 아닌가. 비록 떳떳하게 본 자식은 아니라지만, 지금 내 처지에 그런 것을 가릴 형편은 아니지 않은가."

"그, 그렇지만……."

"리에론 가문에서 어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느슨했던 막시밀리언의 표정이 굳었다.

"내 가사를 논하는데 어찌 리에론이 나오는가. 그들이 내 후사에 간섭이라도 하겠는가."

"무, 물론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하오나 부인께서는 리에론 가문의……."

"내 안사람의 성은 코누디스다. 리에론이 아니지. 말인즉, 내 가사에 있어 리에론과 연결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는 뜻이네."

"영주님의 말씀이 십이면 십, 모두 옳사옵니다. 리에론에 관한 이야기는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허면 영주님. 영주님께서는 이번에 얻으신 공자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미트라스가 적절히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에 막시밀리언은 굳은 표정을 풀고 대꾸했다.

"내 안사람의 밑으로 넣어야겠지. 말했듯, 떳떳하게 얻은 아이가 아니니까. 양자로 들여야 하지 않겠나."

"확실히 그 편이 매끄럽지요."

"그래. 내 이 이야기를 하려 자네들을 불러 모았네. 어찌 되었든 내 후사가 생겼으니, 자네들의 걱정도 이제는 덜 수 있지 않겠나."

막시밀리언이 웃으며 말할 때, 몇몇 이들은 조심스럽게 미트라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이제껏 미트라스가 후계 건에 대해 제법 발을 깊게 담갔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제이린 가문에서, 영주의 친형이 낳은 사내 아이를 후계자로 들이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들이, 지금에 이르러 깨끗하게 무산이 되고 말았다. 미트라스의 심기가 좋을 거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생각과는 달리, 미트라스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영주의 말에 드문드문 대꾸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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