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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13화 (313/1,064)

313화

화전민촌의 냄새 나는 침대에서 잠을 청한 지 닷새째가 지났다. 군터는 그 동안 억류해 놓았었던 화전민들을 풀어주었다.

물론 풀어주었다고 해도 이제 곧 돌아올 반군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잠깐 놓아준 것뿐이었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바로 목이 날아갈 것을 충분히 주지시켜 놓았다.

"도, 돌아오고 있습니다."

닷새 전 군터가 직접 이야기를 나눴던 중년인. 화전민촌의 촌장이 극도로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말을 전했다.

이들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마을로 돌아오면서도 바로 오는 게 아니라 은밀히 신호를 주고 받는 절차가 있었다. 마을이 무사한지, 주변에 적은 없는지를 신호로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당연히 마을에서는 아무 이상이나 위험이 없음을 신호로 알렸고, 반군들은 이제 곧 마을로 돌아올 것이다.

"수고했다."

"가, 감사합니다."

덥지도 않은데 얼굴에 땀이 흥건한 촌장을 뒤로하고, 군터는 몸을 일으켰다. 칸젤을 쥐고 건물 밖으로 나가니 긴장된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이제 곧 운명이 결정될 마을 사람들이 풍기는 긴장이었다.

"놈들이 오고 있다면 이제 이놈들은 필요가 없다. 한 곳에 가둬놔라."

"예."

대여섯 명 남짓한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촌장의 집에 가뒀다.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수의 병사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고분고분히 따랐다. 이미 그들은 마음에서부터 철저히 꺾여 있었다. 저항은 꿈도 꾸지 못했다.

막아!

으아아아아!

살기 가득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산인지라 소리가 울리는 감이 있어 더 또렷하게 들렸다.

"시작된 모양입니다."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까지 오는 놈이 있을까요?"

"글쎄."

적이 진을 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움직인다면 밖으로 달아나려 할 것이다. 그러니 이쪽까지 올 놈이 과연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왠지, 요 며칠 동안 귀가 따갑게 이름을 들었던 그 놈이라면 여기로 올 것도 같았다. 가족이 여기 있어서이기도 하고, 왠지 그냥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군터는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놈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아아아악!

몰아붙여라!

마을 공터 한 가운데, 평평한 나무 밑동에 앉은 군터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생생히 보이는 것 같았다. 부딪치는 칼날, 투지 넘치는 적의 얼굴.

"헉…헉……."

우렁차게 울리는 고함과 비명을 음악처럼 감상하고 있던 군터는, 흐릿하게 들리는 거친 숨소리에 눈을 떴다.

멀찍이, 빠른 속도로 달려 마을로 다가오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왔군."

약간 들뜨는 마음을 제지하지 않으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

사내는 자꾸만 튀려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필사적이었다.

불안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평정을 유지했다. 거기에 들어가는 노력이 호흡을 가다듬는 데 들어가는 노력보다 배는 더 컸다.

'침착해. 침착해라.'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전장은 브록스였지, 코누다이안이 아니었으니까.

'브록스 놈들인가? 하지만 어떻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브록스다. 그러나 그들이 코누다이안까지 들어왔을까? 조금 전 맞닥뜨린 적들은 보통이 아니었다. 수도 많았다.

그 정도 병력이 타 영지로 들어온다고? 아무리 코누디스 자작과 모렌스 자작이 같은 세력에 속했다지만, 타 영지의 병력을 자기 영지로 들이게 해줄 만큼 사이가 돈독하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눈은 정면을 향해 뜨여 있으되, 생각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헤매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뒤늦게 발견했다. 멀찍이 공터에서 몸을 일으키는 한 사내를.

"왔군."

큰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그 한 마디는 복잡하게 헝클어진 이성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사내를 노려보았다.

무장한 사내. 저 자가 바깥에서 맞닥뜨린 적들과 한패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도적이 주인에게 누구냐 묻다니. 이상하군."

"주인?"

"이 땅의 주인이지."

두서 없는 말이었지만 사내는 바로 이해했다.

'코누다이안의 병사들이구나.'

이들은 코누디스 자작의 병사들이었다. 그것을 이해한 순간 사내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코누디스 자작이 우리를 치는 건가?"

"도적들을 치는데 일일이 영주님의 재가를 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도적이 아니다."

조금은 발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언성이 높아지자 사내는, 군터는 입매를 비틀었다.

"내 눈엔 도적으로 보인다. 설마 반군이라고 불러주길 원하나?"

"우리의 적은 브록스다. 코누다이안과 적대할 마음은 없다."

"너희는 영주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영지에 둥지를 틀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너희를 쳐낼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대화의 여지는 없는 건가."

"이제와 대화를 말하는 건 너무 구차하지. 안 그런가? "

사내는 이를 악 물었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두 자루 검을 뽑아 들고 땅을 박찼다. 그에 맞추어 군터도 검을 뽑아 들었다.

카앙!

부딪친 칼날에서 불똥이 튀었다. 달려든 사내가 뒤로 크게 밀려나며 균형을 잃었다. 단 한 번의 격돌로 힘에서의 우위를 확실히 보여준 군터가 기세를 이어 거세게 몰아쳤다.

카캉!

힘에서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는 두 자루 검을 교묘하게 놀리며 몰아치는 공격을 흘려내는데 집중했다. 그 솜씨가 굉장히 탁월한지라 힘에서 앞서는 군터로서도 쉽게 틈을 노릴 수가 없었다.

'쌍검술. 제대로 다루는군'

두 개의 무기를 동시에 다룬다는 건 힘의 분산뿐 아니라 신경의 분산까지 불러온다. 때문에 어설프게 다루는 것은 차라리 맨손으로 싸우는 것보다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그 어려운 것을 제대로 해냈다. 마치 두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두 자루 검이 따로 노는 듯하면서도 때에 따라서는 하나처럼 움직이니, 이런 것을 처음 경험해 보는 군터로서는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쾅!

거칠게 밀어냈다. 그의 검술 실력은 빼어난 수준이지만, 기교에 있어서 만큼은 지금 상대하는 이 사내에게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것은 기본적인 힘의 차이. 이미 인간의 수준을 한 단계, 아니 두 단계는 뛰어넘은 군터의 괴력은 사내에게 당혹스러움을 선사했다.

"크윽!"

우악스러운 일격을 비스듬히 흘려낸 사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몸이 쭉 밀려나고 난 뒤에도 덜덜 떨고 있는 두 자루 검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말도 안 되는 힘. 술법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흡사 곰의 앞발로 후려치는 것 같은 힘에 그는 자연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한 번씩 칼이 부딪칠 때마다 그랬다. 충격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키기 위한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쌍검이라니. 희귀하군. 어디서 배웠지?"

처음 들은 것에 비해 다소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사내는 알아차렸다.

'봐주고 있다.'

아니, 봐주고 있는 것까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에게 여유가 있음은 확실했다. 숨이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빙빙 돌아가는 검을 쥔 손목은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느낌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뭐 하자는 거지? 내 목을 칠 생각은 있나?"

"글쎄. 내가 생각이 없어도, 이 이상으로 해내지 못하면 곧 네 목은 떨어질 거다."

"오만하기 짝이 없군! 죽고 나서 후회해봐야 늦을 것이다!"

수세로 일관하던 사내가 일갈과 함께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위태로운, 어쩌면 무모하게 느껴질 만큼 거칠게.

채앵! 채챙!

하지만 군터는 방어를 소홀히 하는 것 같은 그 공세 속에서 무모함이 아닌, 그보다 더 깊은 한 수를 읽었다.

적어도 전투에 있어서 만큼은, 특히 직접 무기를 맞대고 겨루는 싸움에서 만큼은 군터의 머리는 글줄 읽으며 똑똑하다 자부하는 이들에 버금갈 만큼 뛰어났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틈을 보이면서 틈을 노린다.'

교활한 기만술이다. 몸을 방패로 써서라도 한 순간의 방심을 이끌어내겠다는 거다. 입에서 터져 나왔던 노성은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관객에게 보이는 광대의 연기와 같은 것.

쾅!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검을 정면에서 부딪쳐 튕겨냈다. 사내는 물러나는 대신 몸을 틀어 충격을 해소하며 더 가까이 붙어왔다.

순간 두 자루 검이 서로 다르게 비틀렸다. 하나가 목을 쳐옴에 받아 치니 충격을 전하기도 전에 손이 검을 놓고, 또 하나의 검이 더 크게 힘을 실어 연달아 쳐 왔다.

퍼억!

검이 다가오기 전, 군터의 주먹이 사내의 가슴을 후려쳤다. 타격을 가한다기보다 밀어내는 느낌의 일격이었고, 사내의 몸과 군터의 몸이 서로 반대로 밀려났다. 뻗어간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군터의 목 앞을 스쳐 지나갔다.

"큭!"

허공을 베어버린 사내가 인상을 구겼다. 군터는 무표정하게 몸을 띄우며 사내의 가슴을 걷어찼다. 주먹으로 밀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육중한 충격이 사내의 몸을 뒤흔들었다. "컥!", 사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영리하고 용감하군.'

미리 읽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안일했다면 방금 전의 한 수에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는 잘 알지만, 형세의 유불리를 냉정히 판단하고 과감한 수를 던지는 실행력은 인정할 만했다.

"회심의 한 수도 꺾였군. 이제 뭘 더 할 수 있지?"

"크으으……."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두 자루 검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몸을 비틀거렸다.

무리도 아니다. 전력을 실은 발길질이었다. 어지간한 나무 한 그루는 단번에 박살내버리는 위력이 있다. 그걸 정통으로 맞고도 바로 일어서는 것은 맷집도 맷집이지만 어지간한 근성 없이는 힘든 일일 터.

"끝난 것처럼…말하는군."

"아닌가?"

"목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끝나지 않는다."

"그건 그냥 포기가 아니냐. 차라리 항복하는 것은 어떤가."

"어림 없는 소리."

칼을 부딪치면서도 짐작했지만, 역시 대가 세다. 쥘 수 있는 한, 손에서 칼을 버리지 않을 자다.

기껏 건넨 제안이 깔끔하게 거절당했음에도 군터는 불쾌하지 않고 도리어 즐거웠다. 쉽게 항복했다면, 어쩌면 오히려 조금 싱겁다 여기며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좋아."

검을 검집에 넣었다. 몸을 돌리고 걸어가, 처음 앉았던 나무 옆에 꽂아둔 칸젤을 뽑아 들었다. 손에 창대를 쥐자마자 온 몸에 넘치듯 힘이 돌았다.

쿵!

몸을 날렸다. 사내에게 돌진해 들어가는 순간, 그의 몸은 창과 하나가 된 듯 움직였다.

쾅!

일격에 검과, 검을 쥔 사내의 팔이 튕겨 나갔다. 곧바로 떨어져 내리는 창을 또 하나의 검이 막아 섰다.

챙강!

검이 뚝! 하고 부러졌다. 방해물을 치운 창날은 그대로 사내의 가슴을 갈랐다.

피가 튀고, 굳건하던 사내의 눈이 일순 초점을 잃었다.

털썩!

두 무릎이 땅에 닿았다. 부러진 검이 늘어진 손에서 빠져나갔다.

군터는 창끝에 뭍은 피를 털었다. 그리고 무릎 꿇은 사내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끝이군. 그렇지 않나?"

"쿨럭!"

사내가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건 말이 아니라 핏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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