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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12화 (312/1,064)

312화

여유로운 임무였다.

토벌을 나온 것도 아니고, 그저 느긋하게 돌다가 오면 되기만 하는 간단한 일. 너무 쉬운 일이어서 낯설기까지 했다.

"한적하군."

길을 잡은 것은 살라스였다. 그는 일부러 농지들이 있는 쪽을 멀찍이 도는 쪽으로 경로를 택했다. 아무래도 병사들을 보면 백성들은 겁을 먹기 마련이니, 쓸데없는 소요를 피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송구합니다. 아무래도 이맘때가 농번기인지라."

"아니. 탓하려는 게 아니다. 조용해서 좋다는 말을 하려 했다."

시끄러운 것보다는 조용한 것이 좋다. 문득 시선을 위로 하니 흰 구름이 하늘 가득 깔린 것이 보였다. 어쩐지 마음까지 푸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모트의 깃발을 든 기마 몇 기가 멀찍이서 살펴보다 사라졌습니다. 정찰병인 것 같습니다."

"부지런하군."

벌써 몇 번째였던가. 아마 다섯 번은 넘은 걸로 기억한다.

지금 그들은 아모트와 코누다이안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정찰병들 역시 자신들의 영지 경계에 걸쳐서 이쪽을 살피는 중이었고.

만약 저들이 조금이라도 경계를 넘어 들어왔다면 즉각 추격하여 사로잡거나 해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신경이 쓰였다.

"폴사도의 앞잡이들이 어지간히 애가 탔다 봅니다."

아모트의 영주는 폴사도 영주 커닐레이 백작의 수하나 마찬가지다. 듣기로는 폴사도의 관리들이 아모트를 제집처럼 드나든다고 하니, 이만하면 아모트 영주가 커닐레이 백작의 가신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어쩌면 저 날파리 같은 자들도 아모트의 영주가 아니라 커닐레이 백작의 명을 받고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틀 후면 브록스의 경계에 닿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저들도 더는 따라붙지 못하겠지요."

모렌스 남작이 곧 떠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모렌스 남작이 호전적인 사내라는 것은 동부의 영주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이고, 그런 자가 떠나는 마당에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은 이는 없었으니까.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막시밀리언은 그에게 특별히 브록스 인근을 지날 때에는 보다 조심스럽게 행동하라는 말을 따로 내렸다.

조금 우스운 일이다. 무력시위를 하라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라니. 어차피 떠나는 사람을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

살라스의 말처럼 이틀을 더 이동하여 브록스와 가까워지니 아모트의 정찰병들이 더 따라붙지 않았다.

"저쪽 산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습니다."

길도 없는 외진 땅을 지날 무렵이었다. 옹기종기 모인 산들 중 하나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번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연적으로 난 불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인근에 마을은 없다 하지 않았나."

"아마도…화전민 마을 같습니다."

관을 피해서 사는, 도망자들의 마을.

"어찌 할까요?"

"가보지."

군터는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산을 에워싸고 다가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병사 반을 시켜 산의 포위를 유지하게 하는 한편, 그 자신은 나머지 반절을 이끌고 직접 산을 올랐다.

산은 제법 경사가 있었으나, 숙련된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오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연기가 올라오는 곳까지 갈 때까지 숨이 거칠어진 이가 하나도 없었다.

"정말 화전민들입니다."

큼직한 바위를 딛고 서니 조약한 목조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백 명 정도 될 것 같은데…화전민촌 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군요."

바쁘게 움직이는 촌민들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던 군터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제압해라."

"옛."

병사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으아악!"

"도, 도망쳐!"

병사들은 달랑 검 한 자루만 들었을 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대다수가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고, 그들을 위해서인지 정신이 나갔는지 농기구를 들고 저항하던 몇몇 사내들은 즉시 제압되어 쓰러졌다.

촌민들이 모두 군터의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는 차 한 잔 마시는 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군터는 촌민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고, 불안에 떠는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중년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국법에 따르면 너희는 노예가 된다."

영지에서 도망친 영지민들의 처우는 영주의 재량이고, 대다수의 영주들은 도망민들을 죽을 때까지 노역에 부려먹는다. 영주의 사노예인 셈이다.

"나, 나리! 저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부, 부디 아이들만은……."

제 어미의 옆에 딱 붙어서 벌벌 떠는 아이들이 일곱. 아마 이 중년인의 아이 역시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

사실 군터는 딱히 어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마을을 덮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불법이 눈에 띄었기에 나선 것뿐이다. 물론 그간의 여정이 너무나 지루했던 것도 한 몫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하자면 변덕이 지금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에게는 재앙이 되어 다가왔다.

이들의 처우를 어찌할까 잠깐 고민에 빠진 군터에게, 살라스가 다가와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장주님."

"뭐냐."

"이들은 화전민들치고는 제법 잘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망쳐 나올 때 이것들을 다 짊어지고 나오지는 못했을 테니, 어디선가 구했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구해다 준, 그러니까 연결된 놈들이 있다는 거냐."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이들이 달리 보였다. 군터는 아마도 촌장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에게 물었다.

"도망쳐 사는 것치고는 제법 잘 꾸려놓고 사는군. 그 옷이며 농기구 같은 것들은 다 어디서 구했느냐?"

"예? 아, 이것들은 도시에서 도망쳐 나올 때 가져온 것들로……."

"아이들을 살려달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런 식이면 힘들 것 같군."

중년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릎을 꿇고 있던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을 가지고 협박을 해서가 아니라, 목소리가 낮아지며 군터의 기세가 일변했기 때문이다. 마치 칼바람이 온몸을 할퀴고 지나가는 것 같은 섬뜩한 감각이 그들을 덮쳤다.

"성의를 보인다면 나 또한 성의를 보이겠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내게 너그러움을 바라지 마라. 내가 여기서 너희를 이 산과 함께 불태워버린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으으……."

중년인이 고개를 떨구고 침음을 흘렸다.

그 순간, 뒤편에 꿇어 앉아 있던 사내 한 명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군터가 번개처럼 허리춤에 단검을 뽑아 던졌다. 화살처럼 날아간 단검은 막 몸을 날리려던 사내의 무릎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구는 사내에게 군터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심문해라. 죽여도 좋다.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게 해."

"이들은 어찌 할까요?"

"심문하라고 하지 않았나.'

"옛?"

"둘 다 하라는 뜻이다. 저놈도, 이놈들도."

단순한 화전민촌인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제법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군터는 심문을 살라스에게 일임하고 조약한 목조건물들 중 그나마 가장 괜찮아 보이는 곳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얼마 후에 그가 잠에서 깼을 때, 살라스가 심문 결과를 가지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좀 알아냈느냐."

"예. 이놈들은 반군들이었습니다. 아니, 반군의 협력자라고 해야 옳겠군요."

"반군? 협력자?"

살라스의 설명은 이랬다.

이들은 영지에서 도망쳐 나온 화전민이 맞았다. 하지만 동시에 반군들의 정보원 및 거점 노릇을 하면서 반군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군이라니. 반란군이라는 뜻인가."

"나라에 대한 반군이 아닙니다. 옛 볼드의 잔당들입니다. 모렌스 자작에 저항하는 이들이지요."

"볼드의 잔당? 아직도 남아있었나?"

"근자에 그들에 대한 소식이 들린 적이 없는 걸로 압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을 뿐이지 나름 소소하게 활동은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볼드의 잔당은 이미 수 년 전에 일소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는 모렌스 자작 측에서 퍼뜨린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모렌스 자작을 습격하여 크게 실패하고 위축이 된 것은 맞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합니다."

다만 그때 크게 세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 그 후로는 깃발을 내걸고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외진 길을 오가는 상단을 습격하고, 소규모 순찰대를 공격하는 정도.

"말이 반군이지, 도적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명분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겠지요."

"웃기는군."

먹고 살기 위해서 도적질을 하면 도적이고, 모렌스 자작이 싫어서 도적질을 하면 반군인가. 명분이라는 것이 이처럼 우습게 들린 적이 또 없었다.

"그러니까, 브록스에 거점을 마련해두면 위험하니 코누다이안에 거점을 마련한 것인가?"

"영지의 경계를 오가면서 활동을 하면 추적대가 붙더라도 몸을 빼내기 쉬울 테니까 말입니다."

군터는 냉소했다.

"벌레 같은 놈들."

"우습게 볼만한 자들은 아닙니다. 무장병력이 3, 40에 달한다 하니……."

그것도 입을 연 자의 말에 따르면 같은 수의 정규군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정예란다. 그러나 이 또한 군터의 입장에서는 우습기 그지 없었다.

정예는 무슨 정예. 도적들 주제에 정예라는 말의 뜻을 알기나 할까.

"그래서 그 놈들은 어디에 있다던가."

"브록스에 들어가 있답니다. 브록스의 관용 상단을 털 예정이라고 하는군요."

"언제 돌아올 예정이지?"

"닷새 뒤입니다."

"닷새라……."

"놈들을 기다릴 생각이십니까?"

"영지 내에서 도적들이 설치게 둘 수는 없지 않겠나. 게다가 이놈들은 상당히 조직적이야. 보통의 도적놈들보다 더 위험하지."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닷새나 끌리게 되면 일정이 촉박해집니다."

"어차피 여유롭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나."

군터는 결정을 내렸다. 그것으로 끝이 났다.

병사들을 인근 산들에 나누어 숨기고, 일부를 남겨 화전민들을 감시케 했다. 그 얼마 안 되는 인원에는 군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놈들일지 기대 되는군.'

말로는 도적놈들이니 뭐니 잔뜩 욕을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군터는 그 반군이라는 놈들에 대해 흥미가 있었다.

모렌스 자작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매우 사납고 유능한 자다. 그런 자에게 이를 드러내고도 이렇게 오랫동안 버틴 것을 보면 이 반군이라는 놈들은 질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 능력이 있는 놈들임은 확실했다.

'이런 놈들이 영지 내에 둥지를 틀었음에도 모르고 있었다니.'

물론 영지가 무슨 도시 하나 정도의 크기가 아닌 만큼, 영지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설마 이런 놈들이 있을 줄이야.

군터는 흥미를 느끼는 와중에도 약간의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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