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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11화 (311/1,064)

311화

"분수도 모르는 계집이 과욕을 부리는군."

군터는 한 마디로 정의했다. 그런데 미겔은 조금 생각이 다른 듯했다.

"이룰 능력이 없다면 과욕이지만,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부릴 만한 욕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계집에게 그런 능력이 있단 말인가?"

"충분히 있지요."

군터는 차갑게 웃었다.

"어떤 능력이지? 궁금하군."

"영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까.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그만한 능력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할 말이 없었다. 한 번도 그런 것이 능력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나, 미겔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틀리지 않다 싶었다.

"그래서, 자네는 그 계집에게 힘을 보태고자 하나?"

"나쁘지 않지요. 그녀와 손을 잡는 것은 현재에 대한 결정이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투자이기도 합니다.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이변이 없는 한은 그녀의 아들이 영지의 후계자가 될 테니까 말입니다."

"리에론을 등지는 일이다."

"영주님께서는 이미 리에론과 갈라서신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경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이 또한 옳은 말이다. 영주가 그의 부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떠올려보면, 그리고 그가 취한 이후의 행보들을 떠올려보면 이제 와 리에론을 들먹이는 것도 새삼 우스운 일일 것이다.

"아무래도 경께서는 그리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

"혹시 부인 때문에 마음에 걸리십니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부인 분의 마음 때문에 일이 비틀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었지요."

"그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미겔의 표정이 굳고, 목소리가 낮아졌다.

"경. 한 가지 확실히 해둬야 하겠습니다. 저와 경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자 손을 잡은 겁니다. 일방적으로 한 쪽이 주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거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확실히 해달라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여자와 손을 잡는 것이 여러모로 득이 될 공산이 크다고 보는데, 경께서는 연유도 말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저을 궁리만 하고 계시는 듯하니 제가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느슨하게 늘어뜨리는 듯하지만 목소리에는 가시가 섰다.

확실히 해달라는 말이 군터의 머릿속에 몇 번이고 울렸다. 인상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꽤 단호해 보이는 표정의 미겔을 보면, 아무래도 어중간하게는 넘어가지 않을 듯했다.

군터는 할 말을 속으로 골랐다. 대충 생각이 정리되고, 그는 천천히 입을 燦駭?

"그 계집과 나는 면식이 있다. 수 년 전…아직 이 땅이 제국의 것이었을 때에 나는 그 계집의 무리를 살육했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처음 하는 이야기니까."

"가볍지 않은 내용 같은데, 그간 경께서는 제게 한 마디도 없으셨군요."

"그런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주고 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 자네 역시 내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겠지."

"으음. 좋습니다. 계속 해주십시오. 굉장히 흥미롭군요."

"…나는 그 계집만을 살려 영주님께 바쳤다. 그 뒤로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 채 잊고 있었다가, 일전에 자네가 영주님께서 숨겨둔 애첩이 있다 알렸을 때에야 뒤늦게 그 계집을 떠올렸지."

"그렇다면 경께서 그녀와 손을 잡기를 꺼려하시는 까닭은."

"그 계집은 내게 앙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필시 그렇겠지."

이미 망해버린 부족의 무녀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나마 남은 무리를 죄다 죽여버리고 그 자신마저 노예로 만들어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려고 해도 그녀가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으리라 군터는 생각했다.

이미 마음속에 칼을 세우고 있을 사람과 어찌 손을 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군요. 확실히 껄끄러워하실 만합니다. 하지만 지난 일이 아닙니까. 세월이 지나기도 했고, 그녀는 협력자가 필요하지요. 영주님의 총애를 얻었고, 후계자가 될 수 있는 남아를 낳았다고는 해도 그녀에게는 지지기반이 없습니다. 실제로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으슥한 곳에 유폐되어 있다시피 한 실정이지요. 지금 같은 상황에 경께서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미신다면, 빛 바랜 사감은 접어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터는 영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어째서 이 민감한 사안에 깊숙이 발을 들여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못했다.

"손을 잡는 것도 내키지 않지만, 나는 떨어져서 관망하는 편이 좋다고 보는데. 어째서 자네는 자꾸 이 판에 몸을 담구려 하나."

"얻을 것이 크기 때문이지요."

"얻지 못한다 해서 잃는 것은 아니지."

그 말을 들은 미겔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경께서는 욕심이 없으십니까?"

"글쎄. 하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는군."

"으음. 좋습니다. 제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 꺼내지 않겠습니다."

"나설 참인가?"

"경과는 달리, 저는 욕심이 있어서 말이지요."

*

바오룸이 보낸 초원 부족민들이 코누다이안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잘게 나뉜 인원이 의심을 사지 않도록 코누다이안 곳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영지에서 보낸 관리들이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동시에, 군터가 기다리던 신병들도 조금씩 그의 휘하에 들어왔다.

군터는 휘하 초원인 출신 장교들로 하여금 신병들의 적응을 돕는 한편, 군율에 대해서 확실히 주지시키게 했다.

"병사들을 뭉치게 하는 데는 훈련이 제격이지."

"맡겨주십시오. 다른 생각은 감히 할 수도 없도록 굴리겠습니다."

"무작정 혹독하게만 군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장주님. 제가 그래도 장주님과 함께 보낸 시간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할렌이 장난스레 웃었다.

"안심하시고 바람이나 잘 쐬다 오십시오. 영지 경계까지 나가시니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푸시지 않겠습니까."

"순행일 뿐이다."

군터는 병력을 이끌고 영지 경계를 둘러보라는 명을 받았다. 초원 부족들의 이주작업에 타 영지들이 관심을 두지 못하도록 눈길을 끎과 동시에 접경 지역을 단속하기 위함이었다.

이리 표현하니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병사들을 이끌고 영지 경계를 쭉 돌고 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할렌의 말마따나 바람이나 쐬다 오면 되는, 간단한 임무인 것이다.

이런 임무에 굳이 그가 나서게 된 것은, 그의 이름값 때문이었다. 흑포장군을 벤 그의 명성은 전국에 퍼졌으며, 특히 코누다이안과 주변 영지들에서는 세상살이에 관심 좀 있다 싶은 이라면 누구나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제껏 그는 유명세라는 것이 그냥 기분만 좋고 마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런 데에서 유용하게 쓰이게 되니 의외였다.

"그나저나 장주님. 들으셨습니까?"

"뭘 말인가."

살라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미트라스 경이 요 근래에 흩어진 초원 부족민들을 만나고 있답니다."

"음? 그 자가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지?"

"회유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영주님께서 이주해 온 초원 전사들을 거의 모두 장주님의 휘하에 배속했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겠지요."

그 말에 군터는 혀를 찼다.

"어처구니 없군. 초원 전사들은 모두 기병이라 내 휘하로 둔 것인데, 그걸 가지고 신경을 쓰네 마네 할 게 있느냐."

"그렇기는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요즘 군부에서 장주님의 신망이 크게 오르면서 미트라스 경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심기가 편치는 않겠지요."

"네 말이 맞다면, 정말 유치하구나."

"비웃으실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사들이 병사가 되어 장주님의 휘하에 든다 한들, 그들의 가족이 미트라스 경에게 속한다면 그들의 충성을 어찌 믿겠습니까."

"병사들이 내게 충성할 이유가 무엇이냐."

"예?"

살라스가 당황하여 말을 멈췄다.

군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들이 내 병사가 되어 내게 충성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들은 모두 코누다이안의 병사가 될 것이며, 영주님에게 충성하면 그뿐이다. 그들이 내게 해야 할 건, 명령에 복종하는 것뿐이지. 내게 향하는 충성심 따위는 구걸하지 않는다."

"으음."

"내가 미트라스를 비웃는 건, 그가 하는 짓이 내 눈에는 하등 쓸모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초원부족민들의 환심을 사서 어디에 쓰겠느냐. 그들의 충성을 얻어 어디에 쓸 수 있겠느냐. 어차피 그 역시 영주님을 섬기는 일개 신하에 불과하지 않느냐."

미트라스는 거물이다. 코누다이안에서 그의 영향력은 영주 바로 다음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군부의 거두이며 세 명뿐인 기사 중 한 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가문은 옛적부터 위글로우에 뿌리를 내린 호족 가문이며, 일찍이 위글로우를 지배하던 3대 가문이 일소된 이후 그 잔재를 주워 모으다시피 하여 원래도 작지 않았던 가세를 더욱 확장했다. 그리 되니 기존에 위글로우와 인근 지역에 자잘하게 흩어져 있던 고만고만한 호족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쳐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다.

말하자면 지금의 미트라스는 위글로우를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의 대표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시밀리언도 미트라스를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종종 그가 올리는, 다소 깨끗하지 못한 사안에 대해서도 어지간하면 그대로 통과시켜 주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위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미트라스는 어디까지나 코누다이안의 관리이며, 영주의 신하다. 그가 가진 영향력이라는 것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영주 밑의 두 번째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막시밀리언은 미트라스의 이런 행위를 결코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를 늘리는 것도 못마땅해 할 터인데 이렇게 대놓고,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병사들을…….

'병사 수십…아니, 수백을 얻더라도 영주의 미움을 산다면 그건 바보 같은 짓일 뿐.'

미트라스는 어리석은 자가 아닌데, 어찌 이런 당연한 사실을 간과했을까. 설마 그 동안 영주에게서 대우를 받다 보니,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까먹어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 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도, 내가 없는 동안 신병들의 훈련을 잘 진행할 생각만 해라. 충성은 없어도 그만이지만, 복종은 반드시 필요하다. 복종하지 못하는 병사는 사냥 못하는 사냥개만도 못한 법이니까."

"옛! 맡겨주십시오."

이튿날. 군터는 휘하 정예기병 백과 보병 이백을 이끌고 영지 외곽 순행을 나섰다. 높게 치켜 올린 코누디스의 깃발이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하게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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