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어둑한 저녁.
한 여인이 영주 관저 밖으로 나왔다. 영주 관저는 정면을 제외하고 3면이높은 담을 둘렀는데, 그녀는 그 중 뒤쪽의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후원에서도 제법 거리가 떨어진,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나 발걸음을 하는 곳이었다.
그런 으슥한 곳을, 이 가녀린 여인은 제 발로 찾아갔다.
담벼락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바람에 손을 어루만진 그녀는 혹 누군가 올까 살피는 것처럼 주변을 좌우로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지?"
"제길! 기척 좀 하고 다녀요."
"너에게 들킬 정도면 여길 들어오지도 못할 텐데?"
그녀의 등 뒤에 유령처럼 나타난 미겔은 인상을 찌푸린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웃음기가 감돈 것은 처음의 그 한 순간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호출은 내가 하는 거지 네가 하는 게 아니다. 정말 긴급한 일이 있을 때만 허락한다 하지 않았나?"
"네. 그랬죠."
"긴급한 일인가? 설마…발각된 건 아니겠지."
"……."
"이런."
미겔이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저도 모르게 혀를 찬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실수하지 않았어요."
"오해하고 있군."
미겔이 여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서로의 숨결이 피부에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어도, 나는 널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마. 실수한 것보다도 그런 변명이 더 열 받으니까."
"변명이 아니에요. 난 실수하지 않았어요."
"그래? 그럼 뭐지? 그 계집이 어떻게 눈치 챈 거지?"
"모르죠. 하지만 실수가 있어야 실패하는 건 아니에요. 대장도 알고 있잖아요."
"…맞아. 알고 있지."
미겔은 곧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실수는 내가 했군. 그래. 할 이야기가 뭐지? 그 계집의 전언이라도 가져왔나?"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죠."
"다른 것?"
"아이가 태어났어요. 사내 아이에요."
미겔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순찰병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시간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여인이 그를 부르기 전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가 대장을 만나길 원해요."
"어떻게?"
그 여자가 있는 곳은 영주 관저 내부의, 아는 사람만 아는 심처다. 지키는 병사들은 영주의 친위대에서도 엄선된 자들이며 시종들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에 미겔도 부하 한 명을 집어넣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밖으로 나올 생각이라던가?"
눈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그녀가 밖으로 나오는 것뿐인데, 미겔이 알기로 그녀가 영주 관저 밖으로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일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그랬다.
"아니요. 그녀는 대장더러 들어오라 했어요."
"날 죽이고 싶은 모양이군."
"그건 모르겠지만, 그녀는 방법이 있다고 했어요. 저를 통해서 시간을 알려준다고 했고, 그때 만나러 오면 될 거라고만 했습니다."
이건 숫제 목을 맡기라는 소리다. 영주는 그의 애첩을 철저할 정도로 비밀리에 품고 있었다. 그런 여자와 몰래 접촉한다는 것은, 영주의 주머니 속에 든 보화를 건드는 것보다도 훨씬 위험한 일이다.
"네 생각은 어때? 내가 그 계집을 만나야 한다고 보나?"
"저는…예. 만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요."
"어째서? 알고 있겠지만, 이게 만약 악의를 품은 초대라면 난 끝장이다."
"악의는 없어 보였어요. 그녀는…대장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라는 것?"
"영주에게는 자식이 없었죠. 이제 사내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는 이 영지의 주인 자리를 잇게 되겠죠."
"양자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영주부인이 그 아이의 어미가 될 것이고."
"하지만 그건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빼앗기는 거나 마찬가지죠."
"으음? 그 무슨 감상적인 소리를."
미겔은 싱거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꺼낸 여인은 웃지 않았다.
"대장. 그 여자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에요."
"당연히 평범하지 않겠지. 그러니 그 현실적인 영주나리를 자기 치마폭 아래에 단단히 옭아맨 거겠지."
"말을 바꾸죠.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에요."
"무슨 뜻으로 하는 이야기지?"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영지의 안주인이 되려고 해요."
바보 같은 소리.
그 말을 듣자마자 그 한 마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색하지 않은 것은, 그 말을 하는 수하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한다면 아무리 터무니없는 소리라 한들, 그 역시 진지하게 받아야 한다. 눈 앞의 여인은 그만큼 그가 신뢰하는 수하이기 때문이다.
"어찌 알지? 그 계집이 욕심을 드러냈나?"
"아뇨. 그냥 알았어요. 그녀가 범상치 않은 속내를 갖고 있다는 건 그녀와 말 한 마디만 나눠봐도 바로 알 수 있죠."
"그거 흥미롭군."
"그러니 대장이 직접 확인해보세요. 대장의 눈으로,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해보세요."
"생각해보지. 어차피 그 여자도, 바로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을 게 아닌가."
"예. 나흘 안으로 답을 달라더군요."
"나흘이면 충분해."
미겔은 곧 당도할 순찰병을 피해 몸을 감췄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은밀함을 넘어 기이하게까지 느껴지는 몸놀림이었다.
*
군터는 간만에 휘하의 부대를 사열했다.
가장 먼저 본 것은 철기 백이었다. 부대원 모두가 전장 경험이 있는, 그의 휘하 중 최정예라 할 수 있는 병력. 이들의 훈련은 물론이요, 무구부터 군마까지 그의 손길이 안 닿은 것이 없었다.
그 다음은 기병 삼백. 기병이기는 하지만 훈련 수준이나 무장의 질이 최정예 철기들에 비해 떨어지며, 무엇보다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실전에서 병력은 어쩔 수 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자연히 빈 자리에 신병을 채워 넣게 되고 그리 되면 병력의 질이 떨어진다. 그 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계속하지만, 그래도 훈련은 훈련에 지나지 않기에 한계가 있기 마련.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최정예 일백 철기를 지날 때는 흡족했던 마음이 그 다음 기병 삼백 기를 지날 때는 아쉬움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났건만, 이전의 전쟁에서 잃은 수하들이 여전히 아쉬웠다.
'말이 있어도 사람이 없군.'
보통은 반대인데, 잦은 전쟁과 전투가 이를 뒤바꿔놓았다. 당장 병영의 마구간에 주인을 잃은 군마가 수십 필에 달했다. 지나간 일을 붙드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한때 천 명에 달했던 휘하 병력이 절로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따르라."
"옛!"
"대장님을 따르라!"
군터는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코누다이안의 기사 작위를 가진 자로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군터 경'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수하들에게는 '장주님'으로. 그 외에 지금처럼 휘하 병사들을 이끌 때는 대장으로. 기사와 장주가 그의 신분이라면, 코누다이안에서 그의 직책은 기병대장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자신의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탁 트인 땅을 질주했다. 도시 밖으로 나와 단체 전술 훈련을 직접 관장하는 것이다.
그 정도 지위에 있는 이들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 고관의 위치에 이르면, 문관이든 무관이든 서면으로 일을 진행하고 감독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군터는 달랐다. 그는 늘 직접 움직이는 편을 선호했다. 특히 병사들과 직접 관련한 일의 경우는 더 그랬다. 간혹 정말 시간이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빠지는 경우가 있긴 해도, 어지간하면 직접 훈련을 관리하고 참여까지 하는 편이었다.
"쏴라!"
달리는 대열의 선두에서 쩌렁쩌렁하게 외치며 가장 먼저 활을 쐈다. 세찬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멀찍이 둔 표적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그를 시작으로 뒤이어 백 발의 화살이 표적과 그 주변에 날아들었다.
"선회!"
백 기의 기병이 한 몸인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를, 조금은 뻣뻣한 기동을 보이는 삼백 기병이 따랐다.
'뭉치지 못하는군.'
군터는 가장 먼저 방향을 틀어 움직이면서 뒤따르는 병사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는 앞선 백 기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삼백 기를 보고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 책망치는 마십시오."
"어쩔 수 없는 일 따위는 없다."
군터는 할렌의 말을 일축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할렌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저 뒤떨어지는 삼백 명은 신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숙련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병력이었다. 그런 병력을 온갖 사투를 이겨낸 정예들과 비할 수는 없는 노릇.
알고 있다. 다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저 삼백 명을 앞선 백 명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잃어야 할까. 혹은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정병을 알고, 그들을 부리는 맛을 안 그로서는 곳곳에서 부족함을 보이는 어설픈 병사들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눈이 높아졌다고 해야 할까.
"이랴!"
군터는 미리 준비한 훈련을 다 마치고도 몇 가지 훈련을 더 진행했다. 말이고 사람이고 입에서 단내를 풀풀 풍길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슬슬 맺히기 시작하는 이마의 땀방울을 훔쳤다.
반나절이 넘게 진행된 훈련을 마치고, 병사들과 함께 도시로 돌아온 군터는 자택으로 돌아가자마자 모페이브의 은밀한 보고를 들었다.
"감찰대장이 뵙기를 청합니다. 장주님께서 병사들과 함께 도시를 떠나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무슨 일이지?"
"꼭 뵈어야 한다는 말 외에 달리 전한 것은 없었습니다만."
"짐작 가는 것은?"
"없습니다."
간만에 시원하게 말을 달리며 풀어졌던 속이 다시 널브러진 실타래처럼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
군터는 감찰대가 은밀히 보유하고 있는 모처에서 미겔을 만났다. 이는 그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미겔이 이런 요구를 하는 경우는 이제껏 거의 없었다. 이는 이번에 미겔이 그를 만나고자 한 이유가 그만큼 중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영주님께서 숨겨두신 그 애첩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
여기서 군터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덤덤하게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내아이입니다."
여기서는 조금 반응이 있었다. 양 턱이 작게 움직이고, 눈매가 꿈틀거렸다.
"…이미 알고 있었고,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그렇다 해도 막상 현실이 되었을 때는 느낌이 다른 법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불운하게도…감시하던 눈을 들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들켰다고? 누구에게 말인가."
"영주님의 애첩. 라일라라는 이름이었던가요? 그녀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자랑하던 솜씨도 별 볼일 없었던 것인가. 일개 계집 하나 제대로 감시하지 못하나."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변명처럼 들릴 테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제가 심어둔 눈을 통해서, 그녀가 저를 만나기를 원하더군요."
"……."
"하여 만났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여자더군요. 무서운 여자이기도 했고요."
"겁박이라도 당했나?"
"그랬다면 차라리 이야기가 간단했겠지요. 그런데 불운하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까부터 나오는 불운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골치 아픈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제게,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지지?"
"그녀는 코누디스 가문의 안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군터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