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부친을 보냈음에도 막시밀리언은 주구장창 슬픔에 잠기지는 않았다. 며칠의 칩거를 끝낸 그는 그 동안 미뤘던 일을 몰아서 처리하겠다는 듯이 정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오룸이 그의 일족과, 함께 할 부족들을 데리고 돌아올 것이다. 그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야. 군터."
"옛."
"이 일은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맡겨주십시오."
"모렌스 자작이 떠나고 나면 곧바로 브록스 영지 일부가 코누다이안으로 병합될 것이다."
위벨이 말을 받았다.
"이미 인계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모렌스 자작의 명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상당히 순조롭습니다."
"좋군."
"모렌스 자작께 적당한 예물과 감사 인사를 전하심이 어떨지요."
"물론 그리해야지. 예물은 자네가 알아서 꾸리게."
"예."
코누다이안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곧 이루어질 영지의 확장, 그리고 막시밀리언이 추진한 초원 부족의 합류 및 병력의 확충이다. 그를 위해 관리들은 하루를 잘게 쪼개어 쓰며 일에 매진했다.
그런 와중에, 군터는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초원 부족들에서 병사가 될 이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는데 아직 바오룸이 그들을 이끌고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가 할 일은 가벼운 준비 정도가 전부였다.
"잘 녹아들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타칸 연합과 아국의 방식은 상당히 다르지 않습니까."
"상관은 명령하고 부하는 복종한다. 크게 보면 별로 다르지 않다."
"언어가 가장 큰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건 별 수 없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다."
베이고르는 제국어를 사용한다. 제국에 맞서 일어선 나라가 베이고르임을 떠올리면 조금은 웃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옛 베이고르의 언어를 날 때부터 사용하던 자들은 이미 다 죽어 땅에 묻혔고, 현재 베이고르의 후신을 자처하고 베이고르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어로 말을 배워왔다. 학문을 배우는 것처럼 배운 게 아닌 이상, 옛 베이고르어를 사용할 줄 아는 자들은 드물다.
반면 초원인들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들의 고유한 언어는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온 전통과 같다. 그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언어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일일 것이다.
"편제는 어찌해야 좋겠느냐."
"십인대 단위로 쪼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기존 병사들을 삼분지 이 정도 두고, 삼분지 일에 그들을 넣는 겁니다."
"초원인 출신 십인장이 있어야겠고?"
"그래야겠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코누다이안에는 초원인 출신 병사들이 꽤 많다는 점이다. 일찍이 제국군 시절이었던 때부터 막시밀리언은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이들을 수하로 들였고, 그의 휘하에서 군터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초원 출신 병사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왔다.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숙련된 사냥꾼이자 전사인 그들을 막시밀리언은 기꺼이 받아들였었다.
그때 받아들인 병사들은 몇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지위가 올라갔고, 그 밑으로 다시 병사들이 충원됐다. 그리하여 지금 군터의 휘하에는 초원인 출신 장교들이 다수 있었다. 그들은 새로이 합류할 병력들에게 코누다이안의 군율을 가르칠 좋은 교관이 될 것이다.
*
막시밀리언은 조금 조급함을 드러냈다. 직접 은밀히 위장한 병력을 보내 바오룸과 초원 부족들을 데려올 생각까지 했으나, 위벨이 그것을 막았다.
"빠르게 데려와야 한다. 아직 제대로 파악이 이루어지기 전에."
타칸 연합은 행정적인 측면에서는 국가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수준의, 주먹구구식 방식으로 운영 되었다. 그들은 국가의 인구가 얼마인지, 부족들은 얼마나 되는지, 그 부족들이 각기 부족 구성원 수가 얼마나 되는지 등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을 쓰러뜨리고 정복한 베이고르로서도 서부 지역의 정확한 인구 집계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초원 부족이라는 곳들이 특성상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은 데다, 한 곳에 정착한 부족이라고 해도 그들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니 베이고르로서는 모든 것을 그들이 처음부터 다 해야만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왕국에서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기에, 먼 곳에 있는 초원 부족들을 빼내올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는 영지민들의 무단 영지 이탈이었고, 막시밀리언은 그 불법 행위를 사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책임을 물을 나라가, 그리고 새로이 영지의 주인이 된 영주들이 이를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잘 될 것입니다. 바오룸도 어리석은 자는 아닙니다. 그것을 알고 계시기에 그에게 이 일을 일임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 그래. 맞는 말이야. 내가…조금 달았었나 보군."
처음 만났을 때의 바오룸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혈기만 앞세우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코누다이안에 와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고, 배웠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성숙해졌다. 가끔씩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막시밀리언은 이 어린 초원인에게 한 무리를 이끌 만한 능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렇게 직접 본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을 거의 온전히 바오룸에게 맡길 수 있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는 데서는 믿는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까지 그 믿음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특히나 이번 일은 정말 잘못 풀릴 경우, 서부의 해당 영지 영주는 물론이거니와 중앙 조정에게까지 책을 잡힐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왕과 그가 물밑으로 한 거래로 인해 관계가 트인 상태라고는 해도 그것과 이런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귀족 사회에서의 평판이 하락하는 것도 문제고 말이다.
"그나저나 영주님.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음?"
"근래에 뭔가, 평소보다 더 동요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때였다면 보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처하셨을 법한 일에도……."
" 근심거리라고 한다면 가친께서 돌아가신 일 외에 더 있겠는가."
"아아. 제가 그만."
"아니야. 타당한 지적이었어. 내 입버릇처럼 괜찮다 하고 다녔으니 자네도 그리 생각했겠지. 나도 정말로 괜찮다고만 생각했었고. 하지만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네. 내 스스로는 괜찮다 생각했었어도, 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조금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을 수도 있지."
"소신이 미처 영주님의……."
"아니야."
위벨이 고개를 숙이려 하자 막시밀리언이 손을 들어 막았다.
"자네는 이제 나와 함께 한지도 꽤 되었건만 아직도 그리 조심스러운가. 아직 나를 모르나? 내가 타당한 지적을 한 수하를 벌하는 못난 놈이었나?"
"아닙니다. 그 무슨 말씀을."
"그렇다면 그리 조심스러울 것 없지 않나."
막시밀리언은 그 뒤로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의논한 뒤 위벨을 돌려보냈다.
홀로 남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방 안을 서성였다. 그러다 진열장에 걸린 술 한 병을 꺼내 잔에 따랐다.
'가친의 죽음이라. 핑계도 참 궁색하군.'
술을 한 모금 홀짝이며, 그는 조금 전의 자신을 비웃었다.
마치 잘못한 것을 들킨 어린아이마냥, 되도 않는 변명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위벨을 비롯하여 아직 그 누구에게도 알린 바가 없었다. 그의 관저 심처에 있는 여인이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그것을 알고 있는 이는 그곳에서 일을 보는 시비 몇과 코르넬이 전부다.
언제까지 숨길 생각은 없다. 하지만 확실해지면 알릴 생각이었다. 라일라는 사내아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말을 대개 믿어온 그로서도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사내라 확신하는 그녀의 말은 무작정 믿기가 조금 힘들었다. 아니, 믿기가 힘들다기 보다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맞으리라.
아이가 계집인지 사내인지에 따라 그가 취해야 할 행동이 무척이나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내겠지. 그녀의 말이 이제껏 틀린 적이 없었으니.'
애써 생각은 그리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그의 마음 속에 자리한 걱정은 이제 곧 세상에 나올 그의 아이에 대한 것이지, 위벨에게 둘러댄 것처럼 가친이 세상을 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영주님."
"무슨 일이냐."
"감찰대장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해라."
반쯤 빈 잔을 한 입에 털고 자리에 앉았다. 닥쳐올 일은 닥쳐올 일이고, 지금은 이미 닥친 일들을 해결할 때였다.
잡념이 사라지고 냉철한 이성이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미겔을 막시밀리언은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
바오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제외하고 네 개 부족에게서 함께 하겠다는 확답을 얻어냈으며, 전령을 보내는 동시에 출발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다섯 개 부족인가."
"전사의 수가 오백이 넘는다 합니다. 그들 모두가 군에 합류하겠지요?"
"별 다른 일이 없다면 그리 되겠지."
"생각했던 것보다 많군요."
"영주께서는 더 원하셨던 모양이다만."
군터는 바오룸의 전령을 맞은 자리에서 막시밀리언이 살짝 아쉬움을 드러냈던 것을 떠올렸다.
"더 많아졌다면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 정도가 적당합니다. 아니, 사실 이 정도도 조금 많습니다."
그러나 살라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는 당장 영지병력을, 그리고 군터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의 수를 고려하면 이 정도만 되어도 온전히 흡수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 보고 있었다.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다 도착할 것 같다."
"첫 번째 무리가 도착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지요. 스무 날 정도 되겠습니까?"
"아마도."
주변 영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바오룸은 무리를 여럿으로 찢었다. 다섯 개 부족이 수십 무리로 나뉘어 코누다이안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들 중 가장 먼저 도착하는 이들은 스무 날 정도면 도착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사들은 병영에 숨긴다 해도, 다른 부족민들은 숨기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까지는 우리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아, 옛."
"그보다……."
"예?"
군터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 말을 할지 말지, 이미 운을 띄우고서도 망설였다. 그러나 곧 그는 마저 말을 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다른 일은 없었느냐."
"이미 다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만……."
"그 외에."
"달리 없었습니다. 어떤 것이 궁금하신지요."
"벨리사가 영주부인과 어울리고 있다고 했지. 영주부인의 일은 어떠냐."
"그것이라면……."
"무자 계집이 영주님의 아이를 가졌다 했다. 특별히 다른 일은 없었느냐."
"으음…없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자중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
군터는 일전에 살라스에게 그 라일라라는 계집과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그녀가 자신이 영주에게 바친 진상품이었다는 것까지도.
"네 생각은 어떠냐."
"그 여인이 영주님의 아이를 가졌든 어쨌든…겉으로 드러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영주부인은 리에론 가의 사람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살라스의 말이 맞다.
헌데 왜일까. 이 뭔지 모를, 영 가시지 않는 찝찝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