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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08화 (308/1,064)

308화

영주의 부친이 죽었다. 그 사실이 위글로우 전체로 퍼져나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는 거의 모든 시민들이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막시밀리언은 대외적으로 아비를 잃은 아들의 모습을 보였다. 사제의 주도로 장례를 치른 후에 관저에 칩거했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그가 지극히 일반적인,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터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는 그 칩거하고 있는 막시밀리언에게 불려와 그의 술 상대를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란 사람은 말이네. 정말이지 아버지로서는 최악인 사람이었어. 여인의 남편도, 자식의 아비도 되어서는 안 됐을 사람이지."

자기 부모가 죽었는데 부모의 욕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즐거운 듯 웃는다. 패륜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막시밀리언은 거리낌이 없었다.

"젊은 시절에 내 아버지는 술을 아주 좋아했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고, 뭐든 한 번 빠지면 적당이라는 걸 몰랐어.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일이야. 어느 날 해가 떨어진 시간에 아버지가 날더러 어디를 가자고 하더군. 솔직히 말하면 그때 이미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 눈에 핏발이 서고 호흡이 거칠었거든. 하지만 아비가 가자고 하는데 어린 자식이 거부할 수가 있나? 따라갔지."

술이 한 잔 들어갔다. 막시밀리언의 입가에 걸린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

"어느 추레한 집으로 들어가더군. 들어가니까 불쾌한 냄새가 확 코를 찔렀어. 뭔가 하고 둘러보는데, 내 아버지와 비슷한 꼴을 한 남자들이 둘러 앉아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내 아버지는 그곳에 껴 앉았고, 나더러 옆에 앉으라 했어. 눈치챘나? 그래. 도박판이었던 게야. 내 아버지는 그곳에서 가진 돈을 다 잃었고, 돈이 없으니 판에도 못 끼고 씩씩거리다가 걸만한 다른 걸 찾은 거지."

"설마……."

"그래. 나였네."

막시밀리언이 크게 웃었다. 군터는 그 웃음에서 진한 노기를 느꼈다.

"사실 그때도 우리 집안에 돈이 없는 건 아니었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상인 집안이었거든. 내 조부께서는 제법 유능한 상인이셨고, 당연히 집안에 돈도 모자람 없게 있었지. 그런데 문제는, 조부께서 내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겨 집 한 채 말고는 아무것도 내주지 않으셨다는 거야. 실로 현명한 결정이었지. 만약 일찍 재산을 나눠주셨다면 그 한심한 양반이 도박판에다 죄다 쏟아 부었을 테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군터는 잠깐 고민했다. 제법 인자하게 늙었던 그 노인이 그런 인간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소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따셨나 보군요."

"응?"

"춘부장께서 따시지 못했다면, 영주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시지 못했을 것이 아닙니까."

"하하하하! 하여간 자네 배짱은 알아줘야 해.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

"소관이 무례를 범했다면……."

"아니, 아니야. 재미있었네. 음…그런데 틀렸어. 따긴 뭘 따나. 시원하게 잃었지. 나는 꼼짝없이 생판 처음 보는 놈팡이에게 팔려갈 처지가 됐네."

"허면 어찌."

"어찌는 뭘 어찌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은 순간, 냅다 도망을 쳤지. 뒤도 안 돌아보고 무작정 달렸어."

"노름꾼들이 그리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맞아. 도박에 빠진 놈들은 죄다 미치광이라, 절대 포기를 모르지. 난 조부 댁으로 갔네. 그리고 내가 본 모든 걸 말씀 드렸지. 그랬더니 그분께서는 크게 화를 내시면서 내 아버지를 죽여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셨네. 그렇게 살벌하게 길길이 뛰시는데, 이상하게 난 별로 무섭지가 않고 오히려 기쁘더군."

막시밀리언의 조부는 독한 사람이었다. 그는 돈으로 사람을 써서 그 도박판에 있던 자들을 모두 철저하게 손을 봤다. 하나같이 밑바닥 쓰레기 인생들이었다나. 하여간 막시밀리언은 그날 이후로 그들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대략적인 것은 나중에 알게 됐지. 그 놈들 중 한 명이 취향이 독특한 놈이었던 게야. 어린아이를, 그것도 사내아이를 좋아하는 놈이었다네. 그래서 나를 그 도박판에 판돈으로 쓸 수 있었던 게고. 뭐, 더럽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건 따로 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게는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시지. 그런데 우리는 원래 2형제가 아니었어. 3형제였지. 막내가 있었단 말이야. 첩의 자식인데, 생긴 게 아주 예쁘장했던 녀석이었네."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어려서 일찍 죽었거든.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변태 놈에게 판돈을 걸려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나보다는 동생이 더 적합했을 텐데 내 아버지는 날 데려갔단 말이지. 나는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어. 지금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단 말이야."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도 그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으리라.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때 내 아버지는 거의 죽다 살았지. 내가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졌거든. 죽다 살았다고 알고 있네. 그리고 조부께도 또 한 번 죽다 살았지. 호되게 데여 그런지, 아니면 나름대로 정신을 차린 것인지 그 뒤로는 그래도 사람구실 하면서 조부께 일을 배웠어. 상행도 나가고, 가족들도 조금씩 챙기기 시작하고."

하지만 이미 늦었던 거다. 그러니 막시밀리언이 이렇게 냉소적으로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겠지.

말한 것은 그 한 가지지만, 그 정도로 망가진 사람이었다면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아도 그런 비슷한 일이 한 두 번이었겠는가.

'아이의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더니.'

문득 보리스와 실비아가 생각났다. 군터 자신은 아비 없이 자랐기에, 그 설움이 있기에 그의 아이들에게 좋은 아비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비라는 것을 갖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기에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막시밀리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얄팍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 일을 겪으시고도 춘부장을 잘 모시셨군요. 소관 같았으면 그러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막시밀리언이 쓰게 웃었다.

"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 다 어머님 때문이네. 어머님께서는 그날 일을 알지 못하시거든. 조부께서 내게 비밀로 해야 한다 신신당부를 하셨지. 그런데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도 난 말하지 않았을 거야. 말하게 되면 어머님이 슬퍼하실 것을 알았으니까."

"어려서부터 총명하셨군요."

"아부는 그만 두게. 자네와 아부는 어울리지 않아. 하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술을 마셨다. 막시밀리언은 오늘 만큼은 자제라는 것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군터는 그가 완전히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묵묵히 그의 술상대가 되어주었다. 평소와 다르게 속을 다 풀어헤친 것 같은 그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같은 시각.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다 식어버린 차를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리에론 가문에서부터 그녀를 따라온 나이 많은 시녀가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봤지만, 그런 시선마저도 느끼지 못했는지 그녀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시선을 두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가씨.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신지요."

보다 못한 시녀가 말을 붙였다. 다른 시녀들이 마님이라 부르는 것과 달리, 그녀는 아가씨라고 칭했다. 그것은 그녀가 카트리나 코누디스를 리에론 가문에서부터,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돌봐온 유모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유모도 잘 알잖아요."

"영주님의 집안일을 아가씨께 알리지 않은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 일에 대해 영주님께서 크게 노하셔서 코르넬님을 나무라셨다고 들었습니다. 영주님께서 아가씨의 체면을 세워주셨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내 체면을 세워줬다고요?"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힘 없이 웃었다. 그에 유모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아닌가요?"

"그 사람은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에요. 동시에 똑똑한 사람이죠. 만약 그가 나를 위해 화를 낼 것이었다면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했을 거에요. 그러지 않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역정을 낸 건, 내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깎아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럴까요? 그가 그렇게 대놓고 소리를 친 덕에,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도 내가 이번에 철저히 소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시아버님이 위독한 것도 모르는 며느리가 누구인지 온 도시의 사람들이 다 알게 됐을 겁니다. 난 그 사람이 이렇게 될 것을 몰랐다고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하지만 영주님이 어째서 그런 일을."

"유모. 내가 언제까지 여기서 더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가씨. 그런 말씀 마세요. 누가 뭐라고 해도 아가씨께서는 코누디스 가문의 안주인이십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주인이 세상에 어디에 있답니까. 난 이제 내가 이곳에서 어떤 사람인지 확신할 수가 없네요."

하루하루 버틴다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을 뿐이다.

처음 가문을 떠나 이곳으로 올 때는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말라가는 삶을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책했다. 왜 아이를 갖지 못하는지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몇 번이나 추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책보다도 원망이 더 커졌다. 왜 자신이 이곳에서 이렇게 고독해야 하는지, 왜 남편이라는 사람은 자신을 외면하는지.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독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속이 더부룩했다. 다 식어버린 차를 마셔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가씨. 오늘도 군터 경 자택에 가실 건가요?"

"…아니. 군터 경도 그 사람과 같이 돌아왔잖아요. 부부끼리 시간을 보내야지. 내가 눈치 없이 끼어들면 안 되지 않겠어요. "

그녀의 집, 방보다도 군터 부인의 자그마한 접객실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아마 직접 그 집을 찾기 시작할 무렵부터가 아니었을까. 그녀의 속을 채운 답답함은 이미 그때부터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걱정스레 바라보는 유모의 눈길을 피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게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들이 보였다. 뻥 뚫린 하늘에서 날갯짓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시원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부럽구나.'

태어나 누릴 수 있었던 만큼, 태어나 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웠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차라리 태어나 누리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누리는 것을 포기하더라도 짊어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하루하루 죽어가는 지금은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의미 없는 가정은 미련을 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새들의 흔적이 다 사라진 하늘에서 눈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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