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멀찍이 위글로우의 외성벽이 보일 즈음, 군터는 그 특출난 안력으로 서문 앞에 나와 있는 일단의 병력을 볼 수 있었다. 미트라스가 보였고, 병사들이 보였으며, 관리들도 보였다. 그 주변을 지나는 백성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을 빙 둘러 피해가고 있었다.
"마중을 나와 있습니다."
"얼마 정도지?"
"이백은 되는 것 같군요."
"거창하게도 하는군. 이백 명이나 할 일 없이 밖으로 나와 있으면 도시는 어찌 되나."
막시밀리언을 마중 나온 인원이었다. 그런데 정작 마중을 받는 당사자는 저 번잡스러움이 못마땅한 듯했다. 군터는 굳이 미트라스와 다른 이들을 변호해주지 않았다.
"영주님!"
"영주님. 춘부장께서……."
"들어 알고 있다. 아직은 무사하시다고?"
"의사가 하루하루를 장담하기 힘들다 했는데, 벌써 그 말을 한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춘부장께서 잘 버티고 계십니다만……."
"알았다. 그만 들어가지. 성문 앞에서 이렇게 길을 막고 있으면 백성들이 불편해 하고, 불안해 하지 않겠나."
"옛!"
이백 가량의 인원에 백 명이 더해져 삼백이나 된 군병들이 도시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드문드문 나와 있던 백성들이 선두의 막시밀리언을 보고는 황급히 몸을 숙였다.
"곧바로 춘부장 댁에 가십니까."
"그래. 그래야지."
"모시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네. 코르넬과 친위대 병사들만 나를 따르게. 나머지는 물러들 가고."
막시밀리언이 뒤를 돌아보았다.
"군터. 그간 고생 많았네. 빨리 돌아가 쉬게. 가족들 얼굴이 보고 싶을 것 아닌가."
"예."
막시밀리언은 곧바로 제이린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고, 군터는 남은 이들과 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살라스를 포함해 몇 부하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 가지도 않아 군터는 반가운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벨리사와 두 아이가 가솔들과 함께 그를 맞으러 나온 것이다.
"뒤늦게 들어서 늦었어요.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빨리 오셨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
본래 열흘, 아니 보름은 더 있어야 돌아올 예정이었다. 벨리사에게도 그리 이야기를 했었기에 그녀는 기뻐하면서도 궁금해했다.
"영주님의 춘부장께서 위독하시다더군. 소식을 듣고 왕도에서부터 바쁘게 말을 달렸소."
"정말요? 영주부인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겠지."
"아니에요. 당장 오늘도 저와 같이 계셨는걸요. 영주님께서 도착하셨다는 소식도 저와 함께 들으셨고요."
"…그런가? 그건 좀 이상하군."
영주부인은 신분상 영지에서 두 번째 위치에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영주의 부친에 관련한 일은 그녀의 가족사인데도 그녀가 알지 못했을까? 모를 일이다.
'내가 생각할 일이 아니지.'
순간 복잡한 생각의 꼬리가 슬쩍 머릿속을 스쳤으나 잡지 않았다.
군터는 벨리사에게 물었다.
"오늘도 같이 있었다고? 여전히 영주부인과 가까이 지내는 것 같군. 근래에는 전보다도 더 만나는 횟수가 늘어난 것 같은데."
"영주부인께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어요. 사람들을 상대하는 방법이라든지, 말 그대로 여러 가지요. 영주부인은 귀족 가문 출신이시라 그런지 정말 아는 게 많고 똑똑하시거든요. 저한테도 잘 해주시고."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지막은 반대 아닌가?"
"네?"
"영주부인이 당신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당신이 영주부인에게 잘해주는 게 더 큰 것 아니냔 말이오. 난 여인들의 이야기는 관심 없지만, 이 도시에서 행세 좀 한다는 이들이 영주부인을 피해 다니는 건 알고 있소."
"……."
벨리사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군터는 괜한 말을 했나 싶어 혀를 찼다.
"알고 있어요. 사람들이 영주부인을 멀리하려 한다는 걸. 영주님의 아이를 갖지 못해서겠죠. 하지만 그건 영주부인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여인의 잘못인가 하면 사람마다 답이 갈리겠지만, 군터는 이 은밀한 일의 뒷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주부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벨리사가 어두운 얼굴로 하는 말에 뭐라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녀는 잘못이 없지.'
영주는 리에론의 피가 흐르는 자식을 가질 생각이 없다. 그러니 잘못이라면 그녀가 리에론의 여식이라는 것이 잘못이리라.
"당신은 제가 영주부인과 어울리는 게 싫은가요?"
"싫고 좋고가 어디 있겠소. 당신이 영주부인과 어울리고 싶다면 그리 하면 되오. 난 신경 쓸 것 없어."
내심 깊숙이 들어가면 아마 싫다는 답이 나오긴 할 것이다. 일전에 미겔이 충고했던 대로, 어쨌거나 영주의 마음이 영주부인을 밀어내고 있다면 그녀와는 엮이지 않는 것이 좋으니까.
하지만 그건 정치적인 계산일 뿐이고, 당장 눈앞의 아내가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막말로 영주부인이 무슨 죽을 죄를 진 죄인도 아니고, 여인들끼리 어울리는 것을 뭐라 할 것인가.
군터는 그의 아내에게 그렇게 좀스러운,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막시밀리언은 제이린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 가문의 집사가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그래. 아버지께서는?"
"새벽 무렵부터…의식이 없으십니다."
"가족들은 그쪽에 가 있겠군."
"예. 모두들 어젯밤부터 한 숨도 주무시지 못하고 계십니다."
"쯧.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다 피곤하군."
집사가 당황하여 표정을 흐렸다. 막시밀리언은 그에게 말 고삐를 넘기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막시밀리언이 온 방향 반대쪽에서 카트리나 코누디스가 시녀와 호위병들을 이끌고 제이린 가문 저택으로 왔다.
"절묘하군. 그런데 꽤나 늦었구려. 얼굴에 그늘이 없는 것을 보니 잠도 꽤 잘 잔 모양이고."
뒤로 물러난 집사의 얼굴이 또 한 번 당황에 물들었다.
"소식을 오늘에서야 들었습니다."
"오늘에서야 들었다고? 그럴 리가. 코르넬!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막시밀리언의 추궁에 코르넬이 대뜸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왕도에 가 계신 영주님께 알리고, 여러 문제들을 다루느라 너무 바빠 부인께 알린다는 것을 그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명색이 내 안사람이, 내 집안일 하나 알지 못해? 자네에게나, 다른 자들에게나 정말 실망이군."
막시밀리언의 언성이 높아지면서 여러 사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부친이 위독한 상황에서도 막시밀리언은 계속해서 수하들을 질책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돌아선 그는 저택 안쪽으로 향했다. 일전에 위세 깨나 부리던 상인의 저택이었던 이곳은 막시밀리언이 직접 그의 가족들을 위해 선물한 것이었다. 부패에 연관 됐던 이전 주인의 목을 날리고서 말이다.
"내 아들 왔구나."
"어머니."
밤을 샜다더니, 힘이 잔뜩 빠진 노모와 조심스럽게 인사를 나눈 막시밀리언은 침상에 죽은 듯 누워 있는 부친을 보았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호흡이 거칠었다. 얼굴은 그늘이 진 양 거뭇했다. 오늘내일 한다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 없더라도 모습에서부터 드러났다.
"언제부터 이러셨습니까?"
"전부터 가끔씩 숨 쉬기가 힘들다고 하셨었다. 그런데 열흘 전쯤에 한 번 쓰러지고 나서는 일어나지를 못하더니, 지금은 이렇게……."
노모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담겨 있다. 막시밀리언은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죄 많은 사내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서도 왜 이 남자의 비극에 그녀는 슬퍼하는 것일까.
그러나 물어볼 수는 없다. 물어보면 그녀가 더 슬퍼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막시밀리언은 노모의 슬픔에 동조하는 척했다.
표정을 굳히고, 목소리를 낮추고, 까칠해진 부친의 손을 잡았다. 그에 노모의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었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막시밀리언은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그는 손에 쥐고 있는 것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부터는 제가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옆방에 가셔서 조금 쉬십시오. 간밤에 한 숨도 주무시지 못했다면서요."
"아니다. 나는 괜찮아. 여기에 있겠다."
"이번 일로 어머니께서 편찮으시기라도 하면 저는 아버지께 화가 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잠시라도 쉬세요. 아버지께서 의식을 찾으시면 곧장 불러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단호한 말로 모친을 옆방으로 보내고, 막시밀리언은 잡았던 손을 놓았다.
잠시 후 시종이 물에 젖은 천을 가져왔다. 병상에 누운 자를 위한 것이지만, 막시밀리언은 그것으로 자신의 손과 얼굴을 닦았다.
"영주님."
코르넬이 염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막시밀리언은 젖은 천을 대충 옆에 던지며 말했다.
"다 물리게.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게 하지 마. 의사도 필요 없다."
"영주님. 하지만……."
"의사가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진즉 했겠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통을 늘리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라는 것이고. 의미 없으니 아예 돌려보내버리게."
"저는 다만 세인들이 가벼이 입을 놀릴까 두렵습니다."
"무엇을 걱정하나. 제 목 아까운 줄 모르는 얼간이들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코르넬이 지시에 따라 방은 물론, 주변의 인원을 전부 물렸다. 이제 방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
막시밀리언은 의식 없는 부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늘고 거친 숨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흘렀다. 오랜 세월 타오른 생명의 불꽃이 이제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에게도 이런 시간이 오기는 오는군요."
독백은 아니었다. 듣지 못하고, 답하지 못하는 자에게 건네는 말일 뿐.
"한 번이라도, 당신이 우리에게 했던 일을 후회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며 고통에 잠겨 있는 혈육에 대한 안쓰러움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 대화를 나누길 고대했건만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워서다.
"지금, 충분히 고통스럽기를 바랍니다. 사실 그 전부터 당신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죠. 어머니에게 감사하세요.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신들의 앞에서 심판이라도 받는다면 당신의 그 썩어빠진 마음도 조금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의자를 당겨 침대 가까이 앉았다. 얼굴을 귀로 가까이 가져갔다.
"아쉽구나. 정말 아쉬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당신의 의식을 찾게 해줄 수 있는 의사가 있다면 금화 한 주머니를 줘서라도 데려오고 싶군."
목소리가 낮아졌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토록 모질게 밟아댔었다. 순진했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게 아무리 원해도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연기 같은 것이란 걸 안 뒤론 그러지 않았다.
"어떤 미물이라도 밟으면 꿈틀대는 법인데, 그걸 몰랐었나? 꼭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그리 애지중지하던 보물은 내가 치워버렸다고."
이빨이 없어서 물지 못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이빨이 있었다. 그렇게 작고 약했던 시절에도.
"당신이 피를 토하며 분노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신들은 내게 그런 호사까지는 허락하지 않으시려는 모양이군."
우연일까. 아니면 담담하게 흘리는 말을 의식 없는 중에도 들은 것일까. 주름진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막시밀리언은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더니 귀에 더 가까이 입을 가져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충분히 고통스럽길 바랍니다. 가기 전까지는 그래도 최대한 속죄하셔야 하지 않겠소."
그날 늦은 오후.
제이린 가문의 가주이자 영주의 부친인 제이린이 세상을 떠났다.
막시밀리언은 흐느끼는 모친을 조용히 안아주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