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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06화 (306/1,064)

306화

때로는 달리는 말 위에서, 때로는 잠깐 땅에 내려와 취하는 동안 막시밀리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영지로 돌아가면 말이네. 대대적으로 병력을 확충할 생각이야."

"영지에 사내들이 부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정들을 병사로 끌어 쓴다면 농사는……."

"오. 자네도 이제 제법 관리다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역시 세월이라는 놈이 마냥 스쳐 지나가지는 않는 법이지."

사실 세월이니 뭐니 거창하게 이야기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장원 하나를 가진 입장에서 이런 저런 것들을 꾸리다 보니 생각의 폭이 조금 넓어졌을 뿐.

그러나 어찌 됐든, 군터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일찍이 있었던 제국과의 두 차례 전쟁. 그리고 이번에 타칸 연합과 치른 전쟁. 거기에 그 뒤로 이어진 소란들로 왕국의 인구, 특히 사내들의 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당장 코누다이안만 해도 젊은 사내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다. 그런 상황에 병사를 늘린다? 노인과 여인, 혹은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들을 끌어다 쓸 게 아니라면 꽤나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염려하는 바는 알고 있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영지민들을 끌어다 쓰지는 않을 테니. 아, 물론 쓰기야 하겠지만 걱정할 만큼 많이 쓰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야."

"대대적 확충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허면……."

"바오룸이 그의 일족들을 이끌고 영지에 합류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인근의 부족들도 가능하다면 설득해서 데려오기로 했지. 그들을 병사로 쓸 것이다. 어차피 초원의 전사들 역시 익숙하지도 않은 농기구를 잡는 것보다는 하던 대로 칼을 쥐는 것이 더 편하지 않겠나."

"괜찮겠습니까?"

하나하나 나눠서 받는 것도 아니고, 이미 무리를 짓던 자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일이다. 신뢰의 문제 이전에, 잘못하면 그 자체로 꽤나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어차피 갈 곳 없는 자들이야. 내가 다 망한 부족의 예비 족장을 후대했으니, 그들 역시 느끼는 바가 있겠지. 어느 정도의 지위를 보장해주겠다고까지 했으니 어지간하면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숙이겠지."

초원 부족을 받아들이겠다라…통제할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다. 제국과 베이고르가 다르듯, 타 영지의 군대와 코누다이안의 군대 역시 다르다.

막시밀리언은 제국군이었던 시절부터 초원인들을 차별 없이 대했고, 그런 만큼 그의 병사들 중에는 초원인들이 꽤 있었다. 당장 휘하의 기사들 중 한 명이자, 영지를 제외하고 군부의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군터조차 초원인 출신이었고 그의 이름 만큼이나 그의 출신 역시 꽤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 만큼, 초원 부족의 전사들이 군대에 합류한다고 해도 차별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고분고분하게 군대의 규율 속에 녹아 든다는 전제 하에.

"한 가지…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지."

"처음 바오룸을 받아들이셨던 것이, 혹 이것을 위해서였습니까?"

"그런 생각이 없었다고는 말 못하지. 하지만 실은 그보다, 기반을 다지기 위함이 더 컸어."

"기반이라 하심은."

"군터. 결과적으로 서부로 떠나는 것이 반드레온이 되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될 수도 있었어. 그렇지 않은가?"

"그 말씀은."

"결심이 서기 전까지는 나도 제법 고민을 했었네.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모르겠더군. 기껏 다진 기반을 놓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어려운 만큼 얻는 것도 클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지."

"그때부터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세상에 주인 없는 땅이 어디 있겠나. 있어도 금방금방 채워지기 마련이지. 그건 마치 비가 안 오면 땅이 갈라지고, 비를 맞으면 아무는 것과 같은 이치야. 그렇지 않은가?"

막시밀리언이 씩 웃었고, 군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어떻습니까? 곱지 않습니까?"

중년 여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네요. 너무 곱습니다. 이것으로 옷을 해 입으면 밖을 돌아다닐 때도 잠자리에 누운 것마냥 편할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색의 비단을 가느다란 손끝이 쓸었다.

"이번에 제가 어렵게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손에 넣고 보니 부인이 생각나더군요. "

"감사한 말씀입니다. 제가 부인께 해드린 것이 뭐가 있다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일전에 제 남편의 어려움에 도움을 주셨던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단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부인께는 대단치 않은 일이셨을지 모르나, 저희 내외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제 남편은 어찌해야 부인과 군터 경께 보은할 수 있을지 하루에도 몇 번씩 궁리하곤 합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보은을 바라고 도움을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지요. 알지요. 허나 부인의 마음과는 별개로, 저희 내외는 염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디 앞으로 군터 경과 부인께서 저희 내외를 필요로 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불러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야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만일, 언제라도 그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부인과 부군께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꼭 그리해 주십시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는다는 것은 대체로 귀찮거나, 곤혹스러운 일일 텐데도 여인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비단을 한아름 들고 왔다가 빈 손이 된 시녀와 함께 돌아가며, 그녀는 몇 번이고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했다. 벨리사는 그런 그녀를 최대한 따뜻하게 배웅하고서야 그녀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말 힘들군요."

"쉽지 않지요.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 본래 그런 것입니다."

방 안쪽. 조금 전까지 벨리사가 앉았던 의자 뒤편의 가림막 너머에서 카트리나 코누디스가 걸어 나왔다.

"저들로서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지요. 출세의 끈을 잡았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보은을 언급한 것이 그저 핑계였음을 압니다."

"핑계만은 아닐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부인과의 연을, 부군과의 연을 놓치지 않고 더 두껍게 하고픈 욕심이 더 컸을 뿐."

"알면 알수록 무섭습니다. 웃는 말도, 찡그린 말도, 모두가 거짓으로만 보입니다."

벨리사가 힘 풀린 목소리로 말하자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 저었다.

"모두 진실이고, 진심입니다. 다만 그 위에 작은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지요."

"그 가면이라는 것이 바로 거짓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누구도 그것을 거짓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부인이 말하는 거짓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진실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애초에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군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꾸밈이군요. 제게는 어렵습니다."

벨리사는 스승에게 투정하는 제자처럼 풀이 죽었다.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그런 벨리사를 위로했다.

"사람이 내는 말로는 그 사람의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말은 거짓입니까? 그렇게는 말하지 않지요. 그저 다 담지 못했다 정도로 말하면 족할 것입니다."

그녀는 좋은 선생이었고, 벨리사는 좋은 제자였다. 이해가 빠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벨리사는 그녀의 조언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줄 알았다.

똑똑하다기 보다는, 순종적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만 해도, 그녀는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고개를 들고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이 자신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기분이 좋았다.

"모든 말과 행동에 의도가 있으니, 그 사실 자체만 알고 있다면 겉으로 어떤 가면을 쓰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짓과 진실의 분간 역시 필요치 않지요. 추측은 근거에서 나오고, 근거는 분명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인은 많은 이들과 만나고, 많은 것들을 보고 들으세요. 그런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부인께서는 가면을 들추는 혜안을 갖게 되실 겁니다."

"저는 그리 대단한 것은 원치 않습니다. 다만 나쁜 마음을 가진 자들을 분간할 수 있기만 하면 족합니다."

"부인. 그 누구도 완벽히 그런 이들을 가려내지는 못합니다. 적어도 제가 본 사람들 중에는 그런 것이 가능한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두 여인의 이런 은밀한 활동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발단은 벨리사가 사람을 대하는 것의 어려움을 카트리나 코누디스와 만난 자리에서 토로하면서였다.

처음에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벨리사에게 이런저런 조언만 해주었다. 그러나 곧 지금처럼 가림막 뒤에 앉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들키면 망신도 그냥 망신이 아닌 일이지만, 그녀는 이 소소한 일탈 행위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한 번 이렇게 뒤에서 듣고 나면 이야기를 할 주제거리도 생기는 셈이니, 두 여인은 곧잘 이런 자리를 갖곤 했다.

"몇 사람 곤궁한 것을 도와주었더니 소문이 퍼지는 모양입니다. 점점 저를 찾는 이들이 많아지는군요."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은 휑한 것보다는 어쨌든 붐비는 것이 좋은 것이지요. 이 또한 공부고 경험이 될 것입니다. 부인을 찾는 이들을 하나하나 잘 살펴 보세요. 누가 해로운 자인지, 이로운 자인지. 가면 뒤에 무슨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 보는 만큼 생각하게 될 것이고, 생각하는 만큼 알게 될 것입니다."

"부인께 배우는 것은 항상 새롭습니다."

"그럴듯하게 말을 달리 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사실은 이미 부인도 다 알고 있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저는 제대로 아는 게 아니군요."

"단 한가지라도, 무언가를 제대로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두 사람은 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문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마님."

"숨이 가쁘구나. 무슨 일이냐?"

"영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주인님 역시요."

벨리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카트리나 코누디스 역시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냐?"

"지금 도시로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마중을 나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곧 나가겠다."

벌떡 일어섰던 벨리사가 카트리나 리에론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듣지 못하였습니다. 허튼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하지만 도성의 일이 그리 금방 끝나지 않을진대 어떻게 이렇게 일찍……."

"저는 바로 나가볼 참입니다. 부인께서도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요.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카트리나 코누디스는 몸을 일으키며 쓰게 웃었다. 웃는 순간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숨겼기에 벨리사는 그 처연한 얼굴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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