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반드레온 모렌스 남작이 서부로 떠난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군터는 바로 막시밀리언을 떠올렸다. 안 그런 척 하면서도 늘 옆에 맞닿아 있는 모렌스 남작을 은연중 의식하던 그였다. 게다가, 리에론을 등지고 왕과 손을 잡을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이번 일에 그가 관련되어 있음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되면 리에론 공작은 한 방 먹은 셈이 되는 것인데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막시밀리언을 포함해 휘하 귀족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여 다독이는 모양새까지 보였다.
그것을 보고, 군터는 리에론 공작이 막시밀리언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물밑으로 왕과 선을 대면서도 막시밀리언은 아직까지 겉으로는 리에론 공작과의 관계를 이전처럼 유지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알아차리게 되겠지. 하지만 그 시기는 최대한 늦출수록 좋다. 적어도 반드레온이 서부로 떠난 후까지는 말이지."
막시밀리언은 그리 말했다. 군터는 그제야 그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반드레온이 그의 세력을 데리고 서부로 떠나고 나면 동부의 세력구도는 헝클어진다. 당장 리에론 공작의 계파에 속하는 영주들이 인근에 없을뿐더러, 막시밀리언을 견제할 수 있는 영주 또한 없다.
있다면 남쪽 폴사도의 커닐레이 백작 정도인데, 막시밀리언이 반드레온이 떠난 브록스 영지 일부를 병합하고 주변에 세를 떨친다면 그와 마주해도 꿇리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커닐레이 백작의 영지인 폴사도는 코누다이안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까 말이다.
이전에도 그는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적은 있어도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없었다.
"동부를 얻고자 하십니까."
"그래. 나는 모두가 눈을 돌렸던 그 땅에서 일궈낼 것이다."
초기 베이고르가 다시 일어섰을 때, 고위 귀족들은 왕도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제국과 맞닿아 있는 국경을 피한 것이다.
고위 귀족들이 그리 나오니 자연히 국경 쪽은 막시밀리언과 같은 하급 귀족이나, 어느 정도 작위가 되더라도 중앙 정계에 영향력이 크지 않은 이들이 도맡다시피 하게 되었다. 국경 수호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 위해 그리 행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심함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제국과의 경직된 분위기를 빌미로 세를 키우겠다."
전쟁은 없다. 하지만 전쟁의 위협은 있다. 아무리 베이고르와 제국이…정확히는 7황자가 유한 분위기를 조성하려 한들, 웃는 낯을 한 등 뒤에는 칼을 숨기고 있을 테니.
막시밀리언은 그 긴장감을 십분 이용할 생각을 드러냈다.
반드레온은 명목상 같은 진영에 속한 우군이었으나, 실제로는 족쇄와 같았다. 반드레온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고, 그가 바로 옆 영지에서 머문다는 것 자체가 막시밀리언에게는 부담이었다.
그와 리에론 가문의 접점을 알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막시밀리언은 때때로 반드레온이 리에론 가문의 눈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은밀히 바라보는 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활동적이고 사나웠으니까.
'동부를 손에 쥐고 대영주가 된다.'
막시밀리언이 품고 있는 야심은 그것인 듯했다. 일개 영주를 넘어서 자신만의 세력을 가진 대영주가 되는 것. 아마도 종국에는 현재의 리에론 공작, 칸디시아렌 공작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까지 오르려 하지 않을까.
일전에 막시밀리언은 꺼진 불을 다시 지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이제와 보건대, 불은 꺼졌던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곳까지 옮겨 붙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더 크게 타오르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되도록 빨리 영지로 돌아갈 생각일세."
"리에론 공작 때문입니까."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야. 대전 회의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지. 그 뒤로는 연회가 이어지겠고. 늘어지려면 얼마든지 늘어질 수 있는 일정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아. 하루하루가 아까울 지경이야. 때문에 이곳에서 계속 뭉개고 있기가 아무래도 영 불편하단 말이지. 물론 자네 말처럼 리에론 공작 문제도 있고."
"리에론 공작은 아직 영주님을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일전의 경고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왕과의 접촉을 알아차려서가 아니라, 칸디시아렌 공작의 일파인 프롱기우스 백작(지금은 후작이 되었지만)과의 지속적인 교분을 문제 삼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게 아니라 전자였다면 지금 모렌스 남작이 서부로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잠잠할 리도 없다.
"그래.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일 뿐이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그런데 나는 내 꼬리가 밟히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반드레온이 서부로 떠나는 순간, 곧바로 일을 시작해서 역시 곧바로 마무리를 지어야지."
"과하게 서두르다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그르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음? 하하하."
막시밀리언은 유쾌한 듯 웃었다.
"내게 충고를 하는 것인가?"
"불경을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요즘 영주님께서는 때때로 너무 조급해 보이십니다."
리에론 공작을 이야기 하기는 했지만, 군터는 막시밀리언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서두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두려워 할 사내였다면 애당초 이런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니.
그렇기에 두려움은 아니나, 다른 무언가가 그를 달리게 하고 있는 듯했다. 그게 무엇인지 군터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위험하고 중요한 일을 함에 있어 신속함보다는 신중함을 가지는 편이 더 좋다는 것은 알았다.
"흠. 맞아. 내가 요 근래에 조금 서두른 감이 없지 않지. 좋은 충고였네."
"그리 여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속이 좁은 자라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표정을 일그러뜨릴 것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 아닌 실수를 순순히 인정했다.
"군터. 자네도 알겠지만, 이런 일은 한 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네. 나는 이미 발을 내디뎠고, 이제는 멈출 수가 없지. 계획한 것을 다 이루기 전까지, 아니면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리기 전까지는 빠르게 움직여야 해."
"이곳에서는 아니지요."
"맞아. 이곳에서는 아니지. 그래서 빨리 영지로 돌아가고 싶구만. 뭔가…적당한 구실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막시밀리언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말을 운명의 신이 듣기라도 한 것인지, 다음날 정오 무렵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코누다이안에서 온, 척 보기에도 몇 날 며칠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전령이 전한 소식이었다.
"보고드립니다! 영주님. 어르신께서…위독하십니다."
막 대전회의에 참석하려 옷차림을 점검하고 있던 차였다. 막시밀리언은 추레한 몰골의 전령이 전하는 말을 듣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일어났던 의자에 도로 앉아, 길게 기르지 않은 턱 수염을 쓸었다.
"…그렇군."
어르신. 즉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들에게서 나올 법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슬픔도, 당황도, 다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이 없는 것처럼 완벽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군터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 숙이고 있던 전령의 어깨가 순간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막시밀리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데 당황했으리라.
아무런 감정도 없는, 마치 땅을 기어가던 개미가 밟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메마른 목소리.
"평생에 도움 한 번 안 되던 분께서,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은 도움을 주시는군."
그가 벌떡 일어났다.
"대전으로 가시렵니까?"
"회의가 열리기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 빨리 가서 이야기를 한다면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야."
막시밀리언은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 움직이려던 군터는 문을 나서기 전, 엉거주춤 하고 있는 전령에게 말했다.
"영주님에 관해 이상한 이야기가 돈다면 네 입에서 나온 이야기인 줄 알겠다."
"…저는 들을 줄도 모르며, 말할 줄은 더더욱 모릅니다."
"훌륭하군. 말한 그대로이기를 바란다. 너 자신을 위해서."
"예, 옛."
다소 과할 정도로 영주에게 충직한 코르넬이었다면 조금 더 과격하게 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군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했다. 기세까지 끌어올려 적당히 겁을 줬고, 안색이 하얗게 질린 전령은 제 목숨을 걸고 떠벌려댈 만큼 간이 커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리라.
*
왕의 알현은 쉽게 이루어졌다. 왕은 전날의 피로가 다 떨어지지 않은 얼굴로 막시밀리언을 맞이했다.
"흐음 그런가. 안타까운 일이군. 상심이 크겠어. 쾌차하시길 바라네."
주앙 칼 고르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왕의 위로에 막시밀리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부친께서 연로하신지라 평소에도 잔병이 많으셨고, 소신이 영지를 떠나오기 전에도 몸이 좋지 않으셨지요. 전령이 건네온 소식에 의하면…이번에는 전처럼 쉬이 일어서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응당 자식으로서 그 자리를 지켜야겠군. 그러길 원하는가?"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그러고 싶사옵니다."
"그래. 그래야지. 자식이 부모의 곁을 지키러 가겠다는데 내 어찌 허락하지 않겠나."
어차피 대전 회의에서 다룰 굵직한 안들은 다 지나갔다. 남은 것은 자잘한 조율 정도뿐. 그마저도 이번에 승작했지만 자작에 불과하며, 영지도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막시밀리언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코누디스 자작."
"예 전하."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내 자네에게 맡긴 일이 얼마나 큰 일인가. 해서 내 자네에게 거는 기대 역시 커."
"소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잘 해줄 것이라 믿어도 되겠는가?"
"이 땅에서 베이고르의 깃발을 건 한, 그들의 위에 오직 한 분이 계심을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다소 삐딱하게 옥좌에 기대 앉아 있던 주앙 칼 고르가 흡족하게 웃었다.
"바로 그것이야. 모든 영주들이 자네와 같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왕국에 다툼이 없고, 혼란함이 없고, 정연함과 강성함만이 있었겠지."
"머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그리 될 것입니다."
"하하하. 그래. 그렇겠지. 좋아. 가게. 가서 편찮으신 춘부장의 곁을 지켜드리게."
"성은에 감사드리옵니다."
왕의 허락을 얻은 막시밀리언은 리에론 공작에게 들러 짧게 이야기를 한 뒤, 마찬가지로 위로의 말 몇 마디를 듣고 왕도를 떠났다. 명분이 명분이었기에 다급히 말을 모는 그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왕도를 벗어나 먼지구름을 피어 올리며 말을 달리는 막시밀리언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