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영주가 영지를 반납하고 다른 영지를 하사 받아 옮겨 간다는 것은, 베이고르뿐 아니라 타국의 전례를 살펴 보아도 일반적이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신생 베이고르는 보통이 아닌, 일반적이지 않은 국가. 재건했다고는 하나 실상 새로 건국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고, 영주들은 땅의 주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닌 만큼 아직은 이런 식의 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명분과 실익만 있다면 말이다.
영주가 되어 영지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이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본래 베이고르의 영주들은 제국의 그늘을 피해 도망치던 도망자였거나, 제국의 관리였다가 베이고르 쪽으로 넘어온 자들이 대다수였다. 말하자면, 지도자로서 임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영주가 되어 영지와 영지민을 다스린다는 것은 관리로서 사람을 다스리는 것과는 크게 다른 일이다. 규모도 다르지만, 짊어지는 책임의 질이 다르다. 영주라 함은, 말 그대로 영지에 사는 백성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까. 물론 명목상 그 소유권이라는 것이 왕에게서 내려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다 못해 집 밖에 개를 기르려고 해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때로는 씻기기까지 해야 한다. 개 한 마리의 주인이 된다는 것만 해도 그런 번거로움이 따르는 데, 하물며 수백 수천의 사람들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말도 못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이, 통치가 무엇인지 겪어보지도 못한 이들이 얼마나 시행착오를 겪을 것인가.
그나마 이런 이들은 나은 편이다.
책무는 나 몰라라 한 채, 그저 권력의 달콤함만을 탐하며 이미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들을 제 멋대로 쥐어짜 원성을 산 이들은 영지에서 돌아다닐 때도 무장한 병력을 적어도 수십은 이끌고 다녀야 했다.
어쨌거나, 어떤 사유에서든 영지의 통치에 어려움을 겪거나, 크고 작은 실패를 겪은 이들. 영지민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한 이들. 그런 이들은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을 하는 것에 대해 크게 부정적이지 않았다. 왕은 그것을 알았기에 그들에게 적절한 대가를 제시하며 제안을 했고, 그들은 거부하지 않았다.
서부로 옮겨가게 되는 이들은 이렇게 어찌 되었든 본인의 과오로 인한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몇 있었다. 반드레온 모렌스 남작, 이제는 자작이 된 그가 그 중 하나였다.
"미안하구나."
리에론 공작은 그의 저택에서 모렌스 자작과 술자리를 가졌다. 주변에 다른 이들은 모두 물린 채, 그들 단 둘만이 참석한 자리였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그들은 처음 몇 잔을 마실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나온, 리에론 공작의 말은 담담한 어조로 전하는 사과였다.
"제가 택한 것입니다. 어찌 사과를 하십니까."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타고 오를 줄은 몰랐다. 프롱기우스가 놈을 잘 본 모양이지."
"본래 종잡을 수 없는 자가 아닙니까."
이번에 승작한 프롱기우스 후작은 괴짜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자다. 칸디시아렌 공작의 일파, 통칭 귀족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홀로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내. 사교 활동은 물론이요, 이권이 걸린 회합에도 혼자 빠지는 경우가 잦다는 소문을 멀리 떨어진 그들조차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그럴 거면 도대체 왜 칸디시아렌 공작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장에서 활약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상인의 자식치고는 제법 군재가 있는 모양이지요."
"어쨌거나 백부장에서부터 맨몸으로 기어 올라온 놈이다. 재주는 있어. 그러니 밑에 두고 있는 것이고."
"문제는 재주가 있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욕심도 있는 녀석이라는 거지요."
"마음에 들지 않느냐?"
"글쎄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거슬립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리 느꼈지요. 교활한 놈입니다. 마치 독을 품은 뱀처럼."
"제 아무리 위험한 독사라 해도, 머리를 눌러 쥐고 있으면 고분고분한 법이다."
"공교롭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공교롭지.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뿐입니까?"
"무엇을 생각하느냐?"
"왕과 놈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럴 새는 없었다. 또한, 결과적으로 공교롭게 되기는 했으나 이것은 필연이었다. 너, 아니면 그 놈. 둘 중에 하나는 서부로 가야 했으니."
공을 세우면 포상이 따르는 법이다. 이번 타칸 연합과의 전쟁은 국운이 걸린 총력전이었고, 그런 만큼 얻은 것도 많고 공을 세운 이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이들에게 세운 공에 따른 포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영지가 없는 귀족에게는 영지를 주면 된다. 그렇다면 이미 영지가 있는 자들에게는 무엇으로 포상을 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작위를 올려주면 된다. 그런데 작위가 올라가면 마땅히 그가 다스리는 영지도 작위에 걸맞은 수준으로 커져야 한다. 그게 문제였다.
막시밀리언은 공을 세웠다. 프롱기우스 후작이 세운 전공이 제1 공이라면, 그가 세운 공은 제2 공쯤 된다. 프롱기우스 후작의 추천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런데, 반드레온 역시 공을 세웠다. 그는 국왕의 군대에서 종군했으며, 매 전투에서 전열에 서서 용맹을 떨쳤다. 마지막 카날레스에서의 혈전에서도 역시.
그 결과 두 사람 모두 승작의 대상이 됐다. 영지 역시 넓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둘은 모두 리에론 공작의 영향력 아래 있는 영주들이다.
두 사람이 승작을 하고, 영지가 넓어지고, 권세가 더 강해진다면 왕국 동부(타칸 연합을 흡수하기 전 기준)는 완전히 리에론 공작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왕은 그것을 우려했고, 리에론 공작 역시 그 우려를 이해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속을 터놓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어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 했고, 답을 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결론이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서부로 옮겨가고, 대신 옮겨가는 자에게 충분한 지원과 혜택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부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 두 사람이 본 합의의 결과였다.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반드레온이 먼저 자신이 가겠노라 자처했었다. 이전에 볼드 영지를 병합하면서 피를 너무 많이 본 탓에 민심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이 입으로 든 이유였지만, 리에론 공작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너는 항상 희생만 하는구나."
"어찌 희생이라 하십니까. 제 자신을 위해 내린 결정입니다."
리에론 공작은 자신의 잔을 채우고 그것을 반드레온 쪽으로 밀었다. 반드레온이 그것을 한 입에 들이키자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원망스럽지 않으냐? 가문이…내가…그리고 아버님이."
"제가 어찌 감히."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우리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더냐."
"……."
"나라면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 인정은 안 해주면서, 위험하게 부려먹기는 또 얼마나 부려먹었더냐."
"그 역시 자처한 일이었습니다."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지. 네 몸에 흐르는 피만으로도 족하거늘, 무엇을 더 증명했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버님께서는 널 본인의 치부라고 여기셨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널 필요로 하셨다. 우습지 않으냐? 원망스럽지 않더냐?"
반드레온은 말을 아꼈다. 다만 희미하게 웃으며 리에론 공작의 잔을 한 손으로 쥐고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그랬지요. 목을 걸고, 가면을 쓰고, 홀로 일을 하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갈등을 제법 했었습니다. 원망도 많이 했었지요. 어쨌거나 그때는 저 역시 젊었었으니까 말입니다. 가슴에 품은 뜻은 큰데, 쥐새끼처럼 암약하며 거짓을 팔고 다녀야 했었으니 말입니다."
"이해한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제 몸에 흐르는 피만으로도 족하다 하셨지만, 결국 그것은 반쪽입니다. 저는 나머지 반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지금 형님과 마주보며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 생각해준다니 다행이구나."
"이번 일로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제껏 그래왔듯, 저는 가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것입니다. 아! 다만 이제는 모렌스 가문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음은 이해해 주십시오. 하하!"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또한 이해한다. 가족과 가신들을 챙기거라. 리에론의 옆에는 늘 모렌스가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얼굴이 붉어지고 몸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길 때까지 함께 했다.
결국 리에론 공작이 먼저 인사불성이 되어 탁자에 몸을 기대고 나서야 반드레온은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는 문 옆에 선 한 사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오늘도 자네인가. 다른 자들은 다 어디 가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 각자 재주를 살릴 뿐입니다."
"겸손하군 그림왈드 경."
그림왈드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사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자네에게 어울리는 곳은 문 앞이 아니라 저 너른 땅이야. 전장에 나가고 싶지 않은가?"
"공작님을 따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유일한 일입니다."
"충직하군. 기사의 표본과도 같아. 이런 자네에게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별명이 붙었는지 모르겠군."
"예전 일이지요."
"예전이라 하니 생각나는군. 자네가 그 일을 치르고 왔을 때 말이야. 그때 뒷수습을 내가 맡아서 했었지. 워낙 얽힌 인사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어서 애 좀 먹었었다네."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그래도 그림왈드는 처음 듣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니야. 내게 감사할 일이 아니지. 형님께 감사하게. 난 형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것을 행했을 뿐이니."
항상 지금처럼 형님을 잘 모시라며 몇 마디 말을 더하고, 반드레온은 터덜터덜 멀어져 갔다.
"……"
그림왈드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희미해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쯧."
그가 혀를 찬 이유는 한심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조금 전의 모습만 보면 한량이 따로 없지만, 그는 저 사내의 진면목을 안다. 겉으로 비치는 모습이 어떻든, 결코 얕볼 수 없는 사내다.
권력자라는 점을 제외해도, 측량하기 어려울 만큼 일신의 무예가 대단하다는 점을 제외해도, 한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질 자체가 어딘지 모르게 위협적이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말로 누구에게 설명하라면 못하겠지만…….
'껄끄럽단 말이지.'
마음 한구석의 간질거림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방 안의 공작 각하께서는 필시 인사불성이실 테니 시녀를 불러와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