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리에론 가의 눈밖에 났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막시밀리언은 그리 심각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심각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곧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래. 그 그림왈드라는 자가 입심 만큼 실력이 대단하던가?"
"예?"
"붙어봤다 하지 않았나. 어떻던가?"
"아…예. 상당했습니다."
"리에론 공작의 호위를 맡고 있다고 했나. 그렇다면 확실히 실력자이긴 하겠지. 음…그나저나, 혹시 그때 거뒀다던 그 자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현 리에론 공작이 한때 상당한 망나니였다네. 아, 자네도 알지 않나? 그때, 우리가 제국군이었던 당시 그의 요구로 노예 사냥을 벌이지 않았던가."
"…그랬지요."
아직까지도 파비우스 리에론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없는 이유다. 그의 첫인상은 최악에 가까웠다. 권력가의 자식으로, 수치스러운 짓을 일삼는 자라는 것이 당시 파비우스 리에론에 대한 그의 인식이었다.
"그는 젊었을 적부터 한량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렸다더군. 창관에도 몇 번인가 들락거렸다고 하고, 암흑가 쪽의 인사들과도 안면을 트고 지냈다 들었어. 불법 투기장 같은 곳을 들리는 것이 취미 중 하나였다고 하니 말 다한 셈이지."
"그렇다면."
"얼핏 들은 이야기였는데, 그가 투기장의 싸움꾼 하나를 수하로 들였다는 것이었지. 체면의 문제도 있고 하니 드러내놓고 이야기가 돌지는 않았지만, 그 싸움꾼이 그쪽 방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자였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그때의 그 싸움꾼이 그림왈드일 가능성이 있겠군요."
"그럴지도 몰라. 아무튼, 그런데 그 후가 더 재미있다네."
"……?"
"2차 재건전쟁의 막이 오르고 한창 시끄러울 때, 리에론 공작과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샤즈 테오모렌이 합심하여 당시 이곳에서 난을 일으켰지. 덕분에 도시 전체가 완전히 뒤집어졌었다고 하네. 극심한 혼란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와중에, 그 투기장의 주인과 그의 수하들이 모조리 참살을 당했지.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하겠나?"
"재물을 노린 자들에게 당한 것입니까."
"아니. 칼 한 자루 들고 쳐들어온 미친 놈에게 당했어.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더군. 모든 일이 끝난 그 현장이 어찌나 끔찍했던지, 정권이 뒤바뀌는 격변이 있던 와중에도 사람들의 입을 타고 소문이 날 정도였네."
"설마…그림왈드가 저지른 일입니까?"
"바로 맞췄어. 아마 투기장에서 싸움꾼으로 있던 당시에 원한을 가진 모양이지. 독한 자가 아닌가? 하하."
독하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원한이 깊게 자리잡았다면 기회가 왔을 때 무슨 짓이든 못하겠는가. 군터는 그림왈드에게 그런 과거가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어쩌다가 이야기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왔는지를 고민했다.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머릿속 한구석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네. 그림왈드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거든."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고 계시다니. 놀랐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과거에도 나는 이곳에 최대한 많은 눈과 귀를 두었었지. 그리고 귀를 열고 있으면 이런 저런 소리들이 들려오기 마련이야. 그리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무신경해지고 지치게 돼. 하지만 그런 만큼, 간혹 들리는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가게 된다네. 한때 살마드의 도살자라고까지 불렸던 자의 이야기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꽤나 흥미로운 것이지."
'살마드의 도살자라.'
제법 살벌한 이름이다. 하지만 거친 면이 있어 보이기는 해도,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예의는 지켰던 그림왈드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별로 와 닿지는 않는 별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리에론 쪽의 경고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흐음. 별 것 아니네. 심각하게 여길 필요 없어. 자네도 알겠지만, 변변한 수단이 없을 때 택할 수 있는 가장 흔한 방법이 입을 놀리는 것이야. 리에론은 내게 그 어떠한 위해도 가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지."
"소관은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리에론이 막시밀리언에게 경고를 날렸으며, 지금 막시밀리언은 리에론을 적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가.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일에 먼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알고 싶었다.
"그래. 사실 조금 더 일찍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늦어버린 감이 있지. 리에론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임을 보일 거라고도 생각을 못했었고. 이건 내 계산 실수야. 리에론을 조금은 얕봤던 게지."
"……."
"군터. 자네도 짐작했겠지만, 나는 이제 리에론과 거리를 두려 하네."
그래. 짐작했다. 하지만 짐작했던 것을 직접 말로 듣게 되었을 때는 또 다른 신선한 감상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다. 그만큼 의외였기 때문이다.
"괜찮겠습니까?"
염려가 됐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곤란한 일들이 생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에론과 갈라서는 것은 상당한 후환을 동반하는 일이다.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었지. 그래서 손을 잡고, 그들의 그늘로 들어갔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움직일 뿐."
"파비우스 리에론은 그리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상관 없네. 그의 생각은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난 이미 결정을 내렸고, 움직였다는 거지. 돌이킬 생각도 없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어. 리에론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오늘 내게 경고를 했었던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야. 차라리 칼을 들이밀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
"앞으로는 상황이 조금 급박해질지도 몰라. 신경 쓰도록 하게."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내가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를 사람이던가?"
"걱정하지 않습니다. 영주님께서 다 생각하고 결정하신 것이겠지요."
막시밀리언은 웃으며 군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리에론에게서 얻어낼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기에 그리 한 것이야. 말을 바꿔 탔다고 생각하면 돼."
"…허면, 이번에 타신 말은 어떤 것입니까?"
막시밀리언의 입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왕."
*
지지부진한 협상, 혹은 언쟁은 조금씩 합의점을 찾아갔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양쪽 모두 가장 반발이 적은 사안들에 대한 것이었다. 새롭게 베이고르의 영토가 된, 구 타칸 연합의 국토를 영지 단위로 쪼개는 일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초원의 부족장들을 영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두 공작들 모두 어느 정도 수긍을 했다. 문제는 얼마나 받아들이느냐다.
"그는 부족민 2만을 이끌고 있다. 마땅히 후작위 정도는 주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일 뿐이지요. 이제 그들은 전하의 백성들이지. 부족장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부족장이라는 직책조차도 이제는 소용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의 은근한 말을 칸디시아렌 공작이 교묘하게 받아 쳤다.
"흐음."
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반박하자니 스스로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이대로 물러나자니 저 쪽의 뜻대로 말리게 된다.
부족장들에게 고위 작위를 내주기에는 솔직히 명분이 부족하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의 작위를 내려주지 않는다면 충분한 영지를 안겨줄 수가 없다. 작위와 영지의 수준은 정비례하니까 말이다.
명분이 부족하다. 그것을 왕도 알았다. 그래서 억지로 명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각하. 셍겐 족장은 곧 부마(駙馬)가 될 겁니다. 어려운 전장에서 전하를 도운 공도 있고, 전하의 부마가 되어 두 민족간의 화합에 힘쓸 그를 위해서라도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후대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잠자코 왕과 공작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이윈즈 백작."
칸디시아렌 공작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부마면 곧 왕실의 일원이라 볼 수도 있지요. 전하께서는 국가의 화합과 부흥을 위해 거국적인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께서도 전하의 뜻을 십분 헤아리고 따라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주를 내어놓은 것이 나라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위한 것인가. 칸디시아렌 공작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슬쩍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리에론 공작이 말을 이어가는 하이윈즈 백작을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쳐다보고 있었다.
"허면 전하. 영지의 배분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뒤로 자잘한 사안들이 지나갔고, 그런 것들에 대해 논의하는 자들은 대개 백작 이하의 귀족들이었다. 굵직한 사안들의 차례가 되었을 때만 후작 이상의 귀족들이 입을 열었다.
바로 지금 같은 때 말이다.
"서부에만 치중하지는 않을 걸세. 말했듯, 혹시 모를 일을 염려치 않을 수 없고, 또한 최대한 빠르게 민족 간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섞이는 것이 좋을 테니까."
"이주하는 영주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승작입니까?"
"아울러 일정 기간 동안 세금을 낮춰줄 걸세. 낯선 땅에 가 새롭게 영지를 일궈야 하는 고충을 덜기 위함이네."
"면세가 아닌 인하입니까."
"대신 영지에서 그들의 자산을 일정량 가져갈 수 있게 하겠네."
현재, 서부는 텅 비었다. 그 넓은 땅에 주인은 없다. 영지의 분할이 대강 끝났으니 이제 그 주인들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들은 새로이 왕국의 영주가 된 부족장 출신들과, 영지가 없던 기존의 왕국 귀족들. 그리고 영지를 반납하고 이주해 갈 동부의 영주들이 된다.
"그럼 이곳은 파르네토 후작의 영지가 되겠군."
이름이 호명되며 서부의 영지들이 하나씩 주인을 찾아갔다. 지도 위에 자그마한 나무 모형들이 한 개씩 올라갔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은……."
리에론 공작은 다음 순서를 예상했다. 그리고 바로 엊그제, 왕과 단 둘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옳은 결정인지 모르겠군.'
당사자의 의견도 있었다지만, 그는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못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백성들도 떠나간 서부로 가는 것은 고생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가 보려 했던 대상 역시 때마침 그를 바라보려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우려가 담긴 시선을 받은 사내는 가볍게 웃었다.
"모렌스 남작을 자작으로 승작 시키며, 함모레르를 영지로 하사한다. 이제는 모렌스 자작령이 되겠군."
왕의 말이 이어졌다. 동시에, 리에론 공작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프롱기우스 후작과 함께 세운 전과에 대한 포상으로, 주인이 떠난 브록스 영지 일부를 코누디스 자작에게 하사한다."
왕에게 숙인 고개를 들어올리던 막시밀리언과 리에론 공작의 시선이 마주쳤다.
"……."
막시밀리언은 자신을 바라보는 리에론 공작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간략하지만 정중한 인사였다. 그에 리에론 공작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