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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02화 (302/1,064)

302화

쾅! 쾅!

날이 없는 검이라고 하지만, 실은 검보다는 몽둥이에 더 가까웠다. 검신 자체가 일반적인 검보다 더 굵어서 짧은 봉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힘껏 부딪치니 격렬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부딪친 검이 깨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제법.'

연달아 두 번 검을 부딪치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뒤로 몸을 뺐다.

군터는 조금 아려오는 손의 고통을 느끼며 그림왈드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약간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그의 힘이 인간을 한참 전에 뛰어넘었음을 감안하면, 그림왈드의 힘 역시 인간의 수준은 넘었다고 봐야 한다.

"이게 무슨 힘이오? 체격은 호리호리한데, 힘은 무슨 짐승 수준이군."

그림왈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쥔 손을 까딱거리며 털었다.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장난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군터는 그가 기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살면서 한 번도 힘으로 누군가에게 뒤져본 적이 없는데, 오늘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군. 역시 사람이 이름이 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가 보오."

"이야기나 나누려고 여기 온 건 아니지 않은가"

"흐흐. 그렇긴 하지. 계속해봅시다. 지금까지는 아주 좋소."

그림왈드가 몸을 날렸다. 네 발 짐승처럼 몸을 낮춰 달려든 그의 검이 하단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군터는 재빨리 몸을 물리며 검을 내리쳤고, 그림왈드는 즉시 몸을 허공으로 띄우며 검을 내려치는 팔을 노렸다. 놀라울 정도로 민첩한 동작 전환이었다.

퍼억!

군터의 발이 번개처럼 뻗어갔다. 그림왈드는 내려치던 검을 비스듬히 틀어 발길질을 막았고, 허공에 뜬 그의 몸이 가볍게 밀려나 착지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군터는 막 착지한 그림왈드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날 없는 검이 선이 되어 몰아쳤고, 그림왈드 역시 기세를 올리며 받아 쳤다.

쾅! 쾅쾅!

분명 간단히 손을 섞는 대련이라고 했건만, 둘의 기세는 상대의 머리통을 박살낼 듯했다. 철창 우리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살라스와 병사들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그림왈드가 군터에 맞서 밀리지 않는 실력을 내보이면서 초조함은 더 커졌다.

"걱정 되시는 모양이군."

그림왈드를 따라온 무관이 살라스에게 말을 걸었다. 표정이 딱딱해진 살라스와는 달리 그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너무 거칠지 않소. 지금은 균형이 맞고 있지만, 어느 한 순간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오."

"날이 없는 검이오. 맞아도 죽지 않아. 어디 한 군데 부러질 수는 있어도."

"그 무슨 안일한 소리를."

누가 상관과 수하 아니랄까 봐 조금 전 그림왈드가 했던 소리를 똑같이 하고 있다. 당연히 그런 소리는 조금도 위안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진지한 것 같았다.

"정말이오. 그림왈드 경의 몸은 정말 믿을 수 없이 단단하거든. 군터 경께서도 그러신지는 모르겠지만, 똑같이 괴물 같으신 걸로 봐서는 비슷할 것 같은데."

"……."

논리가 잘못 되도 한참은 잘못 됐다. 하지만 살라스는 그와 더 말을 섞지 않았다. 반박해봐야 얻을 것도 없고, 의미 없이 대화를 나누며 신경을 분산시키기보다 저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싶었다.

심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두 기사의 싸움은 무인으로서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가볍게 뻗는 공격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고, 강한 힘만큼이나 날카로운 판단을 담고 있었다.

실력을 견주기 위한 대련이라 하나 그 내용은 생사를 겨루는 것과 같았다.

카앙!

명치를 꿰뚫어버릴 기세로 뻗은 검을 군터가 검을 세워 막아내며 뒤로 주르륵 밀렸다.

힘에서는 그가 한 수 위다. 부딪치면 밀려나는 것은 열이면 열 그림왈드였다. 키는 비슷하지만 체구는 더 큰 그였기에 힘에서 호리호리한 군터에게 밀리는 것은 얼핏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힘에서 앞서고 충돌에서 이득을 본다는 것은 매우 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승리를 얻어낼 수는 없다. 그림왈드는 밀리면서도 간간이 이렇게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가시를 뻗어내는 짐승처럼.

'훌륭하다.'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정도면 그가 이제껏 상대해 본 이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 할 수 있다. 나머지 둘은 난적이었던 초원의 대전사와 아그니스 체스퍼다. 그림왈드는 그 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절대로 쉬이 볼 수 없는 강자였다.

'자신 있어 할만도 해.'

세상이 넓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설마하니 이만한 강자가 무명으로(어쨌든 그는 그림왈드라는 이름을 이번에 수도에 오기 전까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남아있었을 줄이야. 얼마 전에 막시밀리언이 한 말이 절로 떠올랐다.

무명이란 실력이 없어 무명이 아니라, 이름을 알릴 때를 못 만나 그런 것일 수 있다 했던가. 그 말이 딱 맞다.

그림왈드는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자다.

'뭐 그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처음에 호기가 가득하던 얼굴이 상당히 초췌해졌다. 한 합, 한 합을 겨룰수록 움직임도 무뎌져 간다. 기세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몸은 마음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쯤 하자고 말로 해도 들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그도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유치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저 도전적인 눈을 꺼뜨리고 싶었다.

콱!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연달아 세 번 검이 부딪치고 그림왈드의 몸이 뒤로 밀렸다. 군터는 그가 물러나기도 전에 그를 걷어찼다. 가슴 한복판을 차인 그가 이를 악 물며 버텼지만, 군터는 곧바로 허공에 몸을 띄웠다. 회전하는 몸에 힘을 더한 검이 그림왈드의 머리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쾅!

"크윽!"

그림왈드의 무릎이 꺾였다. 군터는 다시 한 번 내려치는 듯하다가 검의 방향을 꺾어 그의 팔뚝을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몸이 땅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는군.'

검을 쥔 손을 때렸다. 어지간하면 손에서 놓칠 법도 한데, 그림왈드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끝끝내 검을 놓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합시다."

"크으…흐흐. 그럽시다. 더 해봐야 추해지기만 하겠군."

그제야 그림왈드는 검을 놓고 벌렁 드러누웠다. 옅은 신음 섞인 숨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살면서 경처럼 강한 사람은 처음 봤소. 1대1로 붙어서 져본 것도 처음이야. 솔직히 난 내가 이길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 것 같았소."

군터도 검을 내려놓고 편히 앉았다. 엉망이 된 그림왈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도 꽤나 지친 상태였다. 어느 정도냐 하면, 고만고만한 전투를 한 번 치른 것 같은 노곤함이 밀려왔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도 그림왈드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실력에 비해 명성이 과장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실은 그 반대였군. 경을 말하는 세인들의 말은 경의 실력에 비해 오히려 부족한 것 같소."

"경 역시 훌륭한 솜씨였소."

"그런가? 어떻소? 그 흑포장군과 비교하면."

"……."

"모자랐나 보군. 하긴, 제국에서도 이름 있는 무인이었다는데 당연히 이름 값은 했겠지. 흐흐. 세상은 정말 넓군 그래."

"그보다, 이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림왈드는 그에게 한 가지를 약속했었다. 대가라면 대가였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으니 이제 그 대가를 받을 차례다.

"그래. 이야기를 해줘야지. 음, 사실 이건 이야기라기보다는 충고나 조언에 가깝지만 말이오."

그림왈드가 인상을 찡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싸우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대의 주인께서 요즘 묘한 행동을 하시는 것 같던데, 자중하시는 편이 좋을 거요. 리에론이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실은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있다는 것뿐이오."

"그게 무슨 소리지?"

되묻는 목소리가 딱딱했다.

"수하라면, 그것도 총애를 받는 측근이라면 주인이 옳은 길로 가게끔 노력해야 하지 않겠소? 경과 경의 주인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리에론은 크고 강하다오.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어언 백 년인 데다, 권력가로 군림한 지도 수십 년이 넘었지. 이 땅의 곳곳에 리에론의 눈과 귀가 있소. 무엇을 하든 결코 피할 수 없지. 리에론의 눈 밖에 날 짓을 벌이고도 멀쩡하다면 그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오."

그림왈드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는 표정 없이 군터를 보았고,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쳐내야 할 이유보다 남겨야 할 이유가 더 크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 그대의 주인께서는 한쪽으로 기운 추를 자꾸만 반대로 돌리려 하고 있소. 그런 행동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이란 걸 모르시는 모양이오. 아니면 알았지만 잊어버렸던지."

"좋은 것을 알려주겠다더니, 고작 이런 협박이었나."

열기로 가득했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림왈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의 입가에도 웃음기는 보이지 않았다.

"협박이라니. 그런 것이 아니오. 오히려 난…뭐랄까, 경의 주인 되시는 분을 꽤 우호적으로 보고 있는 쪽에 속하지."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요. 좋은 마음이 없었다면 이런 충고 같은 것을 할 필요도 없지. 안 그렇소? 난 고작 일개 기사에 불과하단 말이지."

"……."

"지금의 내 말을 그대의 주인께 전하든, 전하지 않든 그건 그대의 자유요. 알아서 하시오. 이쪽의 호의는 여기까지요. 더 해줄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소이다."

*

돌아가는 길. 군터는 머리가 복잡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수하들의 입 단속이었다. 다들 믿고 있는 녀석들이었으니 주의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야기가 새어나갈 일은 없다.

'충고라고 했지만, 실은 경고인가?'

일개 기사일 뿐이라고 했다. 그 말을 포함해서, 묘하게 자신이 하는 말이 아닌 것처럼 거리를 두려는 것이 느껴졌다. 헛짚은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가 해준 말은 그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단지 그의 입을 빌려 전달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파비우스 리에론인가.'

그림왈드는 리에론의 기사다. 그렇다면 그가 전하는 말 역시 그 주인의 것이 아니겠는가.

'리에론의 심기를 거스를 일을 했던가?'

모르겠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리에론의 여식인 영주부인을 막시밀리언이 홀대했다는 것 정도?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이렇게 직접적인 경고까지 날린다?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군터였지만 그런 그로서도 그건 좀 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왈드가 그랬듯, 나 역시 전하기만 하면 되겠지.'

복잡한 생각은 그의 몫이 아니다. 군터는 숙소에 도착한 즉시 막시밀리언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림왈드와 얽힌 일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에게서 들은 말을 전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막시밀리언의 표정은 묘했다. 굳은 것도 같고, 평온한 것도 같았다.

"재미있군. 그래. 하긴, 그 정도 저력은 있겠지. 몇 세대에 걸쳐 기반을 다진 가문이니까."

막시밀리언은 중얼거리며 수염을 쓸었다. 뭔가 깊이 생각할 것이 생겼을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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