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수석 대장장이는 만나지 못했고, 그의 무구들 역시 구경도 하지 못했지만 대장간에 마련되어 있던 무구들 중에도 쓸만한 것이 많았다. 하여 군터는 살라스를 포함한 수하들의 무구를 맞춰주었다. 그들의 것 역시 위글로우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것이었지만 역시 수도의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덕분에 간만에 목돈을 썼다. 그래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는 수하들에게 베푸는 것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무인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라 하면, 역시 분신이나 다름없는 군마나 병기가 아니겠는가.
"영지에 남아 있는 녀석들이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군."
여기까지 따라온 녀석들은 직접 보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었지만 영지에 남아있는 녀석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이 쓰는 병기를 기억하고 있던 군터가 짐작으로 골랐다. 때문에 혹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손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괜찮을 겁니다. 유난스러운 녀석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특별하게 가려 쓰는 녀석도 없고, 검은 쓰면서 손에 익혀가는 것이 맛이지요."
가장 무난한 병기는 검이다. 마상에서 창을 쓰더라도 허리춤에 검 한 자루씩은 패용한다. 그래서 군터는 검을 골랐다. 모두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품들이었다.
"수하들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시군."
그림왈드가 말했다. 군터가 검들을 고르는 동안 그는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이제껏 나를 따라 숱한 고생을 한 녀석들이오. 아낄 수밖에."
"좋은 무인이면서 동시에 좋은 상관이신 것 같소. 수하들이 목숨 바쳐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
대장간에서의 볼 일이 끝나고, 군터는 그림왈드를 따라 이동했다.
군터는 그의, 어떻게 보면 황당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넌지시 흘린 '알려줄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순수하게 한 번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호승심이라는 것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며, 군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치 없는 자에게 태울 마음은 없지만, 가치 있는 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리고 명확히, 그림왈드는 가치 있는 자였다.
*
그림왈드는 군터 일행을 안내했다. 그런데 그가 향하는 곳은 왕궁을 중심으로 한 주요 시가지에서 벗어난 곳인 듯했다. 수도가 크기는 하지만, 한동안 이동을 했는데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요."
"조금 멀리 가는 것을 이해해 주시오. 하지만 좋은 곳이 있소."
"좋은 곳?"
"기대해도 좋소. 음. 아마 경도 좋아하실 거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갔다. 이동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상황이 되자 살라스가 넌지시 숙소 쪽에 병사를 보내겠다고 했지만 군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림왈드가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릴 무모한 자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겁쟁이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다.
살라스가 귓속말로, 그마저도 거의 웅얼거리는 수준으로 속삭여 말했지만 그럼에도 그림왈드는 그것을 들었는지 말 위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난 경이나, 경의 주인 되는 분에게도 악감정이 없으니. 난 정말 순수하게, 경의 무공에 관심이 있을 뿐이오. 오히려 호의라면 호의겠지."
"걱정하지 않소. 수하가 날 생각하는 마음에 과하게 마음을 쓴 것이니 불쾌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불쾌하지 않소. 충분히 이해하오. 그나저나 부럽소이다. 좋은 수하를 두셨군."
살라스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지만 그림왈드는 호탕하게 웃었다.
도착한 곳은 중심지에서 꽤 벗어난, 그렇다고 완전 외곽은 아닌 곳이었다. 상업구역과 거주구역이 명확히 나눠지지 않고, 드문드문 빛 바랜 간판들이 보이는.
그림왈드는 그 중 한 곳으로 일행을 인도했다. 그가 가까이 가서 목소리를 높이자 문이 열리고 건장한 사내가 나왔다.
"아이고 나리. 오셨습니까."
"그래. 말들을 맡기겠다. 나 뿐만 아니라 귀한 손님을 모셨으니까 조금의 소홀함도 없이 잘 관리해라. 말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생겼다가는 네놈의 목이 무사치 못할 것이야."
사내는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유연하게 허리를 굽히면서 비위를 맞췄다. 그림왈드는 그런 저자세의 태도를 당연하다는 듯 여기며 고압적으로 말했다.
"어이구 여부가 있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무대 한 번 쓰자. 괜찮겠지?"
"예. 물론입니다. 혹…저 분과?"
사내의 시선이 뒤편의 군터에게 돌아갔다.
"알 것도 없고, 관심 둘 필요도 없다. 준비만 해라."
"아이고. 제가 큰 실수를. 그러겠습니다요. 어이! 나와서 좀 거들어! 말들을 옮긴다!"
사내가 뒤쪽에 대고 고함을 지르자 마찬가지로 인상이 썩 평화롭지 않은 자들이 대여섯 나왔다. 그들은 그림왈드와 군터 일행의 말들을 건네 받고 어디론가 향했다. 군터가 따르던 병사들 중 한 명을 붙이려는데 그림왈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염려하는 바는 알겠지만, 그러실 필요는 없소이다. 이상한 짓거리를 저지르지는 않을 거요. 여기 놈들은 원체 소심해서 말이지."
"여긴 뭐 하는 곳이오?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군."
"말은 그리 해도, 대충 눈치는 채신 것 같은데?"
"그럼 질문을 달리 하지. 왜 이런 곳으로 온 거요?"
"조용하거든. 이곳은 밤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이 없소. 보는 눈도 없으니 안심하고 손을 섞어볼 수가 있지. 경의 체면을 생각해준 거요."
"마음은 고맙지만, 쓸 데 없는 걱정을 하는군."
"하하핫! 그런가? 뭐, 그럼 내 걱정을 한 걸로 합시다."
허름한 외관과 마찬가지로 오래 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추한 내부가 보였다. 안내역인 듯 앞서가는 사내는 그들을 건물 안 쪽의 구석 방으로 안내했다.
"청소 좀 하지 그러나."
방 안에 가득한 먼지에 그림왈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사내가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하하. 뭐랄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는 거지요."
"귀찮다는 말을 돌려 하는군. 누가 여길 덮친다고 대비를 해? 여러모로 듬뿍 찔러 넣고 있을 게 아니냐."
"하하하."
그가 누더기 같은 장판을 걷어내자 다른 바닥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움푹 파인 바닥이 드러났다.손잡이까지 달린, 누가 봐도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사내가 손잡이를 잡고 당기자 그 아래 숨겨진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아래쪽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어 전혀 어둡지 않았다.
"자, 자. 들어가십시오. 여기는 지저분해도, 안은 깨끗합니다."
일행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림왈드가 앞장섰다. 그는 이곳이 익숙한 듯 걸음을 옮기는 데 어색함이 없었다.
뒤를 따르던 군터가 물었다.
"이곳엔 꽤 오셨었나 보군."
"가끔씩 속이 답답할 때마다 들르곤 한다오."
"들르곤 한다? 가끔씩?"
"아. 나는 수도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소. 경과 마찬가지로 영주님의 호위를 맡고 있거든. 경과는 달리, 혼자서 맡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인즉 리에론 공작은 본인의 영지보다는 수도에 머무르는 날이 많다는 뜻이다. 하긴 고위귀족, 그것도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라면 영지보다는 수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 것일 수도 있다.
"나리. 오셨습니까."
계단을 내려가자 큼지막한 공간이 나왔다. 검문소처럼 생긴 곳이었는데, 허리춤에 칼을 찬 자들 대여섯이 테이블을 두고 의자에 앉아 지키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인이 위에서 만난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자세로 그림왈드에게 굽실거렸다.
"그래. 무대 좀 쓰겠다."
"얼마든지요. 그나저나 오늘은 일찍 오셨군요."
"평소와는 달라. 귀하신 분을 모시고 왔으니 알아서 준비해라."
"아아. 그러겠습니다. 애들은 싹 다 물리도록 하지요."
"그러는 게 좋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뒤쪽의 살벌한 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순간적으로 중년인의 눈이 군터와 그의 수하들에 향했다. 보고서 곧바로 눈을 돌린 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의하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허리 높이까지 오는 철창을 밀었다. 철창 너머엔 세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통로가 있었다.
계단을 내려올 때와 같이, 안내인 없이 그림왈드가 앞장 서서 통로를 지났다.
"상당히 본격적이군."
제법 긴 통로를 지나는 중에 군터가 말했다.
"더 놀라게 해드릴까? 입출구는 우리가 지나온 곳 하나가 아니라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열 곳은 넘을 거요."
"…그건 좀 놀라운데. 부유한 상인이 운영하기라도 하는 거요?"
"이전에 이것을 만든 이는 귀족이었소. 고약한 취미가 있던 사람이었다던가? 말년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대거 돈을 쏟아 부어서 이 시설을 만들었지. 그랬던 것을 그의 사후, 그의 아들이…아! 당연하지만 그 역시 귀족이었소. 아무튼, 그가 물려받아 조금은 건전한 용도로 바꾸었지. 손님들을 모으고, 돈벌이를 벌여서…꽤 짭짤하게 벌었다고 하더군."
"……."
"그러다가, 베이고르가 이 땅의 주인이 되면서 그의 가문이 몰락했지. 그 자신의 목도 잘려나갔고, 그의 사업체들은 갈가리 찢겨 새로운 주인들의 손에 넘어갔소. 결과적으로 지금은… 조금 전 보신 대로, 돈 좀 굴리는 왈패 놈들이 이곳을 장악했지."
"제국군이었던 시절에 살마드에 몇 번 드나든 적이 있소. 하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군."
"그럴 수도 있겠지. 나름대로 철저히 회원제로 운영하는 곳이거든. 나름의 전통이오. 그래서 아는 사람만 알지. 돈 좀 있는 자들, 혹은 선수로 뛰는 자들. 보아하니 과거의 경께서는 둘 다 해당이 안 되셨던 모양이오."
"그대는 다르다는 말인가?"
"아아. 나는 후자였지."
"…이곳에서 일을 했단 말인가?"
"오. 겉보기와는 달리 마음이 너그러우시군. 굳이 그리 순화하실 필요는 없소. 하하하."
통로 끝에 닿았고, 그림왈드는 철문을 열었다. 철문 너머, 커다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창으로 된 거대한 우리. 그를 중심으로 하여 원형으로 펼쳐진 높낮이 다른 객석들. 위글로우에 있는 투기장 못지 않은 규모였다. 뒤따르던 수하들 중 누군가가 헉! 소리를 냈다.
이해했다. 군터 자신도 내색은 안 했으나 제법 놀란 상태였으므로.
"한때 나는 이곳에서 살았지. 아! 저쪽에 걸린 무기들 중에 원하는 것으로 골라 집으시오. 날을 죽여놓은 것들이니 자상을 걱정할 필요 없소. 뼈가 부러지거나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야 뭐……."
그림왈드는 철창 우리 옆에 놓인 진열대에서 기다란 검 하나를 골라 들었다. 그리고 먼저 우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장주님. 소관은 굳이 이렇게 저 자에게 따라주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뭐 어떠냐.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가는 것도 우습지."
군터는 적당한 검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림왈드는 그새 상의를 벗고 있었다. 흉터로 가득한 근육질의 몸이 드러났다. 크게 찔리고, 베인 흔적들이 우리 안 천장이며 벽에 달린 횃불의 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때, 나는 이곳을 지옥이라고 생각했소.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이기고 이겨도 빛이 보이지 않았거든.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나니 이곳만큼 즐거운 곳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소."
"요지는?"
군터는 상의를 벗지는 않았다. 갑옷만 벗어 살라스에게 건네고 편한 차림이 되어 그림왈드의 앞에 섰다.
"말했듯, 날을 죽여놓은 것이라 자상이 생길 일은 없을 거요. 하지만 잘못 맞으면 죽을 수는 있소. 어쨌거나 쇠로 만든 무기니까. 그러니……."
그가 씩 웃었다.
"최선을 다하시오. 실망시키지 말아주었으면 좋겠군."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지."
불덩이 같은 뜨거운 시선과 미지근하게 식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곧이어, 날 없는 두 개의 검이 맞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