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할 일은 끝났다. 말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것이었으니, 군터는 막시밀리언이 일부러 쉬라고 내준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행인들이 적어 보이는군요."
"초원인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아직 어수선한 것도 있겠고, 전국의 고위 귀족들이 대거 모여들지 않았나."
수하의 의문에는 살라스가 대신 답했다.
"왕도는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권력자가 있고 백성이 있다. 어디든 크게 다르겠나."
거리에는 베이고르 백성으로 보이는 이들 만큼이나 초원인들이 많이 보였다. 나름대로 국법을 준수하는 듯 말을 타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 특유의 행색과 분위기는 평범함으로 녹여낼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잘 섞여 지내는군요. 말도 안 통할 텐데 말입니다."
"섞인 것이 아니다. 봐라. 전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통제하고 있지 않나."
살라스의 말마따나 초원인들은 하나같이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전장에 싸우러 나온 군인처럼 말이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더욱 이질적으로 보이는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런 이질감이, 수도의 백성들이 그들을 의식하며 몸을 사리는 큰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저쪽인 것 같군."
"보이십니까?"
"아니."
군터는 오른쪽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그냥 알 것 같군. 진한 쇠 냄새가 느껴진다."
수하는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이해했다. 그러니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들은 대로, 느껴지는 대로 길을 갔다.
*
몇 개의 건물을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서른 개, 아니 그 배는 넘은 것 같았다.
그쯤 가니 묵직한 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군터의 귀에는 크게 들렸고, 수하들의 귀에는 어렴풋이 들렸다. 다들 표정이 좋아졌다. 수도의 대장간은 어떨까 하는 즐거운 기대감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번듯하군요."
"위글로우의 대장간들보다 훨씬 큽니다. 역시 수도라는 건가?"
어지간한 건물 너덧 개를 합친 것 같은 크기였다. 그것도 정면에서 보이는 정도만 그렇고, 안쪽은 보이는 것보다 더 깊어 보였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의 귀를 간지럽게 하는 망치 소리가 건물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건물에는 문이 다섯 개나 있었다. 가장 바깥쪽의 문 두 개는 닫혀 있었고, 중앙의 문들은 다 열려 있었다.
그 중 가운데 문에서 대장장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반쯤 뛰어나왔다. 안색이 굳은 그를 슬쩍 내려다 본 군터는 대장간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
"솜씨가 좋다고 들었다. 구경 좀 할 수 있겠나."
"무, 물론입죠.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그…말은."
"따로 묶어둘 곳이 있나?"
"예. 마사(馬舍)는 건물 우측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지키고 있어라."
수하 한 명이 또 다른 종업원과 함께 말들을 끌고 가고, 군터는 처음 마중 나온 종업원과 함께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무구류의 판매는 관에서 발급한 허가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만……."
"좋은 물건이 있으면 살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바로 사는 건 아니다. 말했듯, 솜씨가 좋다기에 구경이나 하러 왔다."
"바깥 영지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바깥 영지? 수도에서는 타지를 그리 부르는 모양이었다.
군터는 무언으로 답을 대신하고 종업원을 따라 걸으며 대장간 내부를 둘러보았다.
바깥 쪽에 나와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잡다한 것들이었다. 문고리 같은 것도 있었고, 장식 같아 보이는 것도 있었으며, 저건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싶은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화려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척 보기에도 돈 꽤나 쓰는 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기사님이십니까?"
"그렇다."
종업원은 눈치가 빨랐다. 그는 예의 그 화려한 물건들은 그냥 지나쳤다.
"무구류를 보려 하시지요?"
"그래. 안쪽에 있나?"
"예. 아무래도 찾으시는 분들만 찾으시는 물건이다 보니, 가게 바깥쪽에 내놓기는 조금 어려워서 말이지요."
종업원의 발걸음은 대장간 안쪽, 그러니까 정확히 망치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기이한 감각으로만 느껴지던 열기가 피부로 닿기 시작했다.
"시끄러우실 겁니다. 무구류들은 작업장 가까운 곳에 진열이 되어 있어서 말이지요."
"괜찮다."
열기와 소리가 큼직한 문 하나를 두고 가까워졌을 때, 종업원은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선객들이 와 계십니다. 기사님과 같은 바깥영지의 기사님들이시지요."
문이 열렸다. 동시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망치가 쇠를 두드리는, 아니 깨부수는 것 같은 무지막지한 소리.
쾅! 쾅!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때렸다. 문이 다 열리자마자 군터는 보이는 풍경에 탄성을 내뱉었다.
진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와중에 차가운 예기가 섞였다. 모두 벽에 걸린 무구들이 자아내는 것들이었다. 외날인 칼, 양날인 검, 창, 도끼, 쇠몽둥이, 갑옷, 방패, 투구 등등. 그야말로 모든 종류의 무구들이 넓은 벽에 걸려 있었다. 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해, 무구들로 만들어진 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물건들은 대충 만든 것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척 보기에도 최소 상품(上品)은 되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대단하군."
군터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베이고르에서 명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분들 중 적어도 반 수 정도는 이곳에 계실 겁니다."
종업원이 자부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왕가에 납품을 하고 있다더니.'
그에게 이곳을 소개시켜준 상인은 이곳이 왕가로부터 지원을 받는 곳이며, 이곳에서 생산된 무구들 일부는 왕실로 납품이 되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왕실 대장간인 셈이다.
이 대장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수석 대장장이는 왕실에서 수여한 기사 작위까지 가지고 있다던가. 기사라고는 해도 왕이 직접 임명한 만큼, 귀족들도 이곳에서 멋대로 행세하지는 못한다.
베나시드가 살마드였던 시절에, 살마드에는 대장간들이 많았다. 자그마한 곳들이 각자 장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음? 이게 누구신가."
감탄하여 벽에 걸린 무구들을 쭉 훑어보는데, 안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터 경 아니시오."
선객은 그가 아는 자였다. 바로 얼마 전 리에론 공작가의 저택에서 보았던 사내. 리에론 공작가의 기사 그림왈드였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예상도 못했소."
"같은 생각이오. 이곳에는 어쩐 일로?"
그림왈드는 무슨 싱거운 소리를 하냐는 듯 웃었다.
"대장간에 무구를 보러 오지 무슨 일로 왔겠소? 왕도에 올 일이 생길 때마다 들른다오. 어딜 가도 이곳의 무구들만큼 질 좋은 것은 찾기가 힘들거든."
"그럴 필요가 있소? 주문을 하면 될 일이 아니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경우를 제외하면, 물건을 사려 할 때는 보통 미리 주문을 넣는다. 특히나 무구류 같은 경우는 더 그렇다. 검이나 여타 무기들은 어떻게든 손에 맞는 것을 골라 쓸 수 있다지만 쇠로 만들어진 갑옷 같은 경우는 몸의 크기가 맞지 않으면 사용할 수가 없기에 무조건 주문 제작이다.
말하자면, 그림왈드처럼 수도에 올 때마다 들를 필요는 없다는 거다. 올 때마다 전에 사간 무구가 손상이 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모르시는 모양이군. 이곳에서 주문제작을 넣기란 하늘에 별 따기외다."
"음?"
"아, 정확히는 수석 대장장이에게 물건을 맡기는 것이 힘들지. 워낙 줄이 길고, 줄을 선 분들의 면면이 화려하거든. 나 같은 일개 기사 나부랭이의 차례가 언제 돌아올지는 나도 모르고, 만드는 당사자도 모를 거요."
"그 정도인가?"
일단 한 번 보고 괜찮다 싶으면 갑옷 하나 정도는 맞추려 했던 군터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그러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 밑에 다른 대장장이들은 괜찮소. 실력이야 수석에 비할 바 아니지만, 그래도 어딜 가나 솜씨 좋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되지."
"그렇군. 난 이곳이 처음이오. 이번에 이야기를 들어서 한 번 들렀지."
"말했듯 수석 대장장이의 물건을 얻기란 쉽지 않소. 하지만 뭐, 다른 것들도 괜찮은 것들이 있으니 한 번 둘러보면 나쁘지 않을 거요."
군터는 고개를 끄덕여 답을 대신하고 계속해서 무구들을 둘러보았다.
'하품은커녕, 중품도 없군.'
모두 상품이다. 이것들이 수석 대장장이가 아닌 이곳의 다른 대장장이들이 만든 물건이라면, 그리고 그런 물건들이 이렇게 많이 쌓일 정도라면 수도의 솜씨 좋은 대장장이는 죄다 이곳에 모여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단하군. 말로만 들었었는데 말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때 바깥쪽에서 다른 이들이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으응? 군터 경이십니까."
군터는 순간 자신이 이렇게까지 유명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 이 넓은 수도 안에서 아는 사람을 연달아 두 번이나 만나다니.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음. 그쪽은……."
"하하. 잊으셨나 보군요. 하긴, 그때는 짧게 인사만 나눴었지요. 브록스의 기사 유트입니다."
"미안하오. 그때는 정신이 없었소."
얼굴은 낯이 익었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일전에 모렌스 남작이 위글로우에 왔을 때 연회장에서 한 번 스치듯이 통성명을 한 적이 있었다. 무인답게 딱 벌어진 단단한 몸과는 달리 부드러운 인상이 기억에 남긴 했지만 그 외에 특별한 점은 없었던 자였다.
"아, 옆에 계신 분은……?"
"리에론의 기사, 그림왈드요."
"오오. 이거 귀한 분들을 둘씩이나 뵙게 되는군요."
살짝 호들갑을 떠는 유트에 비해 그림왈드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말투나 목소리는 퉁명스럽다는 느낌이었지만 군터는 어쩐지 그가 벽을 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구를 보러 오셨나 봅니다."
"음. 솜씨가 좋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군요. 과연 근위대의 무장을 책임질 만합니다."
유트는 말이 조금 많은 사내였다. 군터는 대충 대꾸하고 계속 구경 좀 해야겠다며 자리를 옮겼다. 대장간 내부는 넓었기에 얼마든지 마주치지 않고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몇 개의 통로를 지나 어느 정도 안쪽까지 들어갔을 때는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종업원이 제지한 것이다.
"안쪽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장인 분들께서 작업을 하시는 곳이라……."
종업원은 겁을 먹은 얼굴을 하고서도 할 말을 다했다.
깡! 깡!
묵직한 망치 소리가 문 바로 너머에서 들려왔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군터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
유트와 그의 일행(아마도 종자인듯한)은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림왈드만이 팔뚝만한 손도끼 하나를 들고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제야 오시는군. 기다리고 있었지."
"나를 말이오?"
"그럼 경 말고 누굴 기다리겠소."
"어째서?"
"바로 얼마 전에 이야기했었잖소. 설마 그새 잊어버리신 건 아니겠지."
그림왈드는 보고 있던 손도끼를 다시 벽에 걸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호승심으로 불타는 도전적인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간단하게 솜씨 한 번 봅시다."
"……."
"맨입으로 부탁하지는 않겠소. 끝난 후에, 좋은 것을 알려드리지."
그림왈드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