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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99화 (299/1,064)

299화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회의는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그 동안 영주들은 대전 밖에서 몇 번씩이나 서로 뭉쳐서 의견을 나눴다. 막시밀리언 역시 매일 리에론 공작의 저택으로 불려갔다.

사실 가닥은 이미 잡혔다. 제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초원인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단지 그들에게 영주 자리까지 줘야 하는지, 그리고 준다면 얼마나 줘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들 생각이 다를 뿐이었다.

왕의 생각은 간단하다. 그를 따르는 부족장들에게 최대한 많은 자리를 주려 할 것이다. 아니면 최대한 많은 자리를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하려 하거나. 뭐가 됐건 왕이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서부의 영지를 초원인들에게 쥐어주려 함은 분명했다.

"저 쪽과는 아직입니까?"

"아직이네."

한 영주의 물음에 리에론 공작이 답했다.

저 쪽이라 함은 칸디시아렌 공작 쪽을 의미했다.

"결국 적당히 나눠야 한다면, 필히 조율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조율을 꼭 저 쪽과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지요."

"그 말은……."

"어차피 서로 주고 받아야 한다면, 보다 갈급한 쪽과 하는 것이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저 쪽과 척을 지겠다는 뜻인가."

칸디시아렌 공작과 리에론 공작은 각기 한 세력을 이끄는 거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베이고르의 권력을 나누는 두 기둥이며, 그들의 힘은 비등하다고 인식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때로는 정적으로, 때로는 협력자로 베이고르의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서로가 가진 힘이 비등하기에 부딪치면 다칠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각을 세울 일이 생긴다 한들 가장 경계해야 할 한 가지를 두 사람이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왕권의 강화다.

신하인 그들이 힘을 가지는 것과, 왕이 힘을 가지는 것은 그 의미와 무게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왕은 나라의 주인이다.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그 명목에 정말로 힘이 더해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그들은 그 극단적인 결과물을 이미 보았고, 알고 있었다.

바로 제국의 황제다.

명분과 힘을 동시에 쥔 절대군주가 탄생하면, 그 뒤로는 뭔가를 할 수가 없다. 물론 황제는 특별한 존재였고,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 보지만 어쨌든 그런 위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그들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현왕 주앙 칼 고르는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똑똑한 자였기에 두 공작은 절대로 왕이 힘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공감했다.

"그건 안 된다."

이전이라면 리에론 공작은 이렇게 단호하게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왕은 힘을 가졌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힘이다. 거기에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힘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칼이 칼집에 들어갔는지, 등에 가려 맸는지, 혹은 소매에 숨겼는지, 혹시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전하는 요정들을 부립니다. 그 힘이 어떠했는지는 카날레스의 그 자리에 계셨던 각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전하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이전이라면 이렇게 과감한 행동은 보일 수 없었을 겁니다.

가진 힘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러실 수 있는 겁니다. 여차하면 요정왕과 그의 병사들을 부를 생각이실지도 모릅니다."

"으음!"

"요정……. 하! 거참."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렀다.

"……."

리에론 공작은 침묵했다. 그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눈을 감았다.

"요정들이 그리 대단합니까?"

한 영주가 물었다. 카날레스의 혈전을 이야기로만 들은 자였다.

"말로 아무리 설명해봐야 직접 보지 않은 이상 그날의 전투를 짐작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야말로…신화 속의 한 장면이 그럴까 싶을 정도였소."

대략적인 전투의 전개는 직접 보지 않은 자들도 들어 알고 있었다.

타르가이 베르겐이 휘하 바르바피들과 함께 돌격해왔고, 전열을 무너뜨렸으며 왕의 깃발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 상황에서 왕은 물러나는 대신 부딪치는 쪽을 택했고, 베이고르군은 결사의 각오로 타르가이 베르겐을 막아 섰다.

"그때도 그리 생각했고, 지금 와서도 하는 말이지만…그때 요정들이 가세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뚫리고 말았을 거요.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의 대열도, 술사들의 술법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으니."

요정들이 앞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기어이 타르가이 베르겐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요정들도, 베이고르의 병사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무수한 피가 흘렀다. 용맹한 병사들은 주검이 되어 땅에 쓰러졌고, 요정들 역시 그들만의 방식으로 최후를 맞았다.

그것을 보며 패배를 직감했고,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요정왕과 그의 병사들이 카날레스의 안개산에 들어간 것은 확인했습니다만, 언제 다시 내려올지 모릅니다. 왕가와 그들의 비밀스런 맹약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가 없으니."

"언제든 협력할 수 있다…고 가정해야겠지."

리에론 공작은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말투가 담담하다 하여 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닐 터.

'기로에 서 있군.'

막시밀리언은 생각했다.

사실 이 문제는 카날레스에서 요정들의 힘을 본 직후부터 계속해서 그를 괴롭혀왔을 것이다. 아예 방지를 했으면 모를까, 일단 왕이 힘을 쥔 이상 그는 더 이상 무대 바깥의 중재자가 아니다. 직접 선수가 되기를 자처하며 무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는가.

때문에 지금 그는, 리에론 공작은 기로에 서 있다.

왕의 손을 들 것이냐, 아니면 칸디시아렌 공작과 손을 잡고 왕을 견제할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다른 제3의 길을 모색해 볼 것이냐.

'하지만 의아하군. 요정들의 힘이 그리도 대단하다면 보다 더 강하게 밀어도 됐을 터인데, 그러지는 않는단 말이지.'

왕은 무턱대고 지르긴 했지만, 그 다음에는 의외로 영주들과 협상을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대신 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힘을 얻었다고 해서 영주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막시밀리언은 그런 왕의 행동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

'무작정 지른 것에 비해서는 다소 소극적이다.'

왕은 유약한 자가 아니다. 그랬다면 권신들 틈에서 지금껏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며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고, 타칸 연합과의 대전에서 직접 군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힘이 충분했다면 더 대담하게 나서지 않았겠는가.'

바꿔 생각하면, 왕이 등 뒤에 진 힘이라는 것은 두 공작들을 강제할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모른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지.'

왕은 상인처럼 굴었다. 그는 한 손에는 칼을 쥐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바닥을 드러낸 채 두 공작에게 뻗어왔다.

잡을 것인가, 밀어낼 것인가.

아니, 지금으로서는 사실 후자의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골치 아프겠군.'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리에론 공작의 내심이 대충 짐작이 갔다. 오늘따라 그의 얼굴에 진 주름이 깊어 보이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

그 전에도 그랬지만, 왕도에 도착한 이후로는 단조로운 하루의 연속이었다.

잠 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하루 종일 막시밀리언을 수행한다고 보면 됐다. 그가 리에론 저택이나 다른 곳을 갈 때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이 군터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지만 몸은 지치지 않고 힘이 넘쳤다. 그래서 오히려 더 힘들었다. 몸이라도 힘들었다면 다른 생각이라도 안 나련만, 지루하게 시간만 죽이려니 꽤나 고역이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 모처럼 한가해진 날에 군터는 수하들 몇 명과 함께 거리로 나왔다.

물론 그냥 놀러 나온 것은 아니었다. 엄연히 업무의 일환이었다.

"7황자가 리바스트라에 온 이후로 남쪽의 물류가 많이 막혔습니다. 리바스트라와 본다인 쪽의 관리가 철저해진 탓에 타라냐드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졌는데, 그 쪽도 길이 워낙 험해서 말이지요."

암상은 어디에나 있다. 정식으로 나라에 세금을 내고, 국가에서 정한 방식으로, 정해진 품목만 거래하는 일반적인 상인들이 있는 곳에는 암상 역시 있다고 보면 된다.

이는 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돈이 있는 곳에는 돈 벌 욕심을 가진 상인들이 있고, 상인들이 있는 곳에는 그들보다도 더한 욕심을 가진 암상들이 있다.

수도인 베나시드에도 마찬가지. 왕이 머무르고, 부리부리하게 눈을 뜬 관리들이 넘쳐나는 이곳에도 욕망의 그늘은 드리워 있다.

"영주님께서 이르시길, 조만간 남쪽 길이 풀릴 거라 하시더군."

"정말입니까?"

"지금 영주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건가?"

군터가 슬쩍 눈을 치떴다. 그것만으로도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던 사내는 바로 안색이 창백해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이 어찌 감히…….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것은 소인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안입니다. 지금처럼 계속 길이 봉쇄되어 있으면 다른 쪽으로도 활로를 찾아봐야 하니까 말입니다."

"많이들 흔들리고 있나 보군."

"솔직히…그렇습니다. 벌써부터 줄을 바꿔 타려는 이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옮겨간 자들도 조금이지만 있고 말입니다. 물론, 이 또한 잘 알고 계시겠지만……."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연신 군터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을 보내겠다고 연락이 왔을 때,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사람이 올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 자를 보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거 한 방 먹었군.'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적당히 밀고 당기면서 거래를 하고,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얻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코누디스 남작은 이야기 대신 통보를 해왔다. 회담의 자리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보냈으니 이것이 통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압박이다. 피차 알 만큼 아는 사이에 장난은 필요 없다는, 그러니 적당히 하라는 무언의 압박.

'어차피 나야 따라갈 수밖에 없지.'

그의 기반은 동부에 있다. 그리고 동부의 암상은 대부분 코누디스 남작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간접적인 영향력까지 헤아린다면 그 범위는 베이고르 전국을 아우른다. 작위는 남작에 불과하지만, 그늘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행사는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은밀하다.

상인의 자식이라 그런지, 귀족들 특유의 어설픈 체면 차리기나 미적거림이 일체 없다. 그것을 보았기에 그는 일찍이 코누디스 남작에게 건 것이고.

'이제 와서 빼기는 늦었으니.'

알고 있었다. 다만 얕은 수작이라도 부려서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려고 했을 뿐.

그러나 코누디스 남작은 그런 사소한 애교까지도 허용치 않았다.

"소인과 소인의 무리는 영주님만 믿고 기다리고 있겠노라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지."

이야기가 끝나고, 군터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자리를 떠나려던 그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잠깐 멈춰 섰다.

"수도를 잘 알고 있나?"

"적당히. 남들 아는 것보다 조금은 더 알고 있지요."

"잘 됐군. 솜씨 좋은 대장간이 있다면 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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