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짐작은 했습니다. 헌데 전하. 그들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요? 미리 들은 바가 없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칸디시아렌 공작이 대표로 나서 영주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천천히 하도록 하세. 자. 우선은 자리하도록 하지."
예상에도 없던 부족장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탓에 영주들이 자리를 하는데도 혼선이 빚어졌다.
본래 왕을 두고 대전 회의를 진행할 때는 두 공작들이 각기 좌우의 가장 앞에 자리하고, 그 옆으로 나란히 영주들이 작위 순으로 자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부족장들이 한쪽을 점거하다시피 하고 있는 만큼, 여느 때처럼 자리를 잡기가 불가능했다.
"리에론 공작. 먼저 앉으시지요."
자칫 은근한 자존심 싸움으로도 번질 수 있었던 순간에, 칸디시아렌 공작이 먼저 나서서 리에론 공작에게 자리를 권했다. 리에론 공작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갔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다음 칸디시아렌 공작이 앉았다. 그 후로는 순조로웠다.
영주들이 다 자리에 앉자 주앙 칼 고르가 입을 열었다.
"명목은 승전 축하연이지만, 축하할 시기가 아님은 경들 모두가 잘 알고 있으리라 보오. 나라가 안팎으로 뒤숭숭한 것이 사실이오. 안의 문제는 여러 사람들의 노고로 어떻게든 정리했다고 하지만, 바깥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손을 쓸 수가 없지."
눈치 빠른 이들은 이제 슬슬 알아차리고 있었다. 몇몇, 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던 이들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이어지는 왕의 말을 들었다.
"이번 전쟁을 통해 아국의 국토가 단숨에 배로 늘어났소.좋아할 만한 일이나, 갑작스런 확장으로 여러모로 혼란이 동반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오. 당장 늘어난 영토를 통치할 영주들의 수조차 부족하지.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전하. 하여 이번 논공행상에서 그를 다룰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공을 세운 이들에게 새롭게 영주의 직위를 주어 늘어난 영토를 다스리게 할 줄 알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사전에 상의도 없이 초원의 부족장들을 이 자리에 데려온 왕에 대한 성토였다.
말 속에 숨긴 날을 알아들었을진대, 주앙 칼 고르는 전혀 표정이나 기색의 변화 없이 말을 받았다.
"지금 다루고 있지 않은가? 이미 짐작한 이들이 있을 것이네. 맞아. 나는 아국에 귀의한 부족장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영주로 삼아 빈 영토 일부를 다스리게 할 참이네."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처음부터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리에론 공작이 입을 열었다.
"전하. 어심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족장들에게 후대하시어 초원인들의 민심을 얻고자 하시는 뜻은 충분히 타당합니다."
"바로 그것이네."
"허나."
"……."
"마땅한 공도 세우지 않은 자들에게 그리 파격적인 상을 내리심이, 전하의 어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깥의 이들에게 혼란을 줄까 우려가 되옵니다."
왕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눈매가 좁혀지고, 다문 입술이 작게 꿈틀거렸다. 못마땅한 심정을 그대로 비치는 것이다.
'자리에 대한 양보 치고는 크군.'
상석을 양보한 것은 권위에 대한 양보임과 동시에 책임에 대한 전가다. 칸디시아렌 공작은 권했고, 리에론 공작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혼자서 미운 털을 받으라 한 것은 아니다.
칸디시아렌 공작이 곧바로 뒤이어 말을 보탰다.
"전하. 몇몇 부족장들이 이번 전쟁에서 종군하여 활약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포상으로 그들에게 작위를 하사하신다 한들 다른 말을 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변변한 공도 세우지 못한 이들이, 단지 초원인이라는 연유만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지금도 공을 세우기 위해 왕국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이 상심하지 않겠사옵니까."
달래는 말과 날 선 말이 공존한다. 처음부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넓은 대전 안에 한풍이 서서히 불기 시작했다.
"물론 공을 세운 이들에게는 충분한 포상을 내릴 것이다. 경의 말대로 공이 없거나, 모자란 자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큰 포상을 내리는 것이 여러 이들에게 불만을 안겨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보다 대승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니겠는가."
주앙 칼 고르가 자세를 바로 했다.
"아국이 비록 승전했다 하나, 피해가 적지 않다. 특히 카날레스에서 입은 피해는 뼈아프다 아니할 수 없지."
반발의 기색이 가득했던 영주들 중 몇몇이 수긍의 기색을 보였다. 모두 카날레스의 대전투에 참전했던 이들이었다.
"제국은 이미 한 번 아국을 패망시켰다. 우리는 그런 제국에 맞서 베이고르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여전히 아국의 주적은 제국이며, 제국 역시 언제든 기회가 생긴다면 아국을 다시 도모하려 할 것이다. 비록 지금 당장은 그들 내부의 문제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앞일은 모르는 것. 당장 제국의 7황자가 4개 주를 발 아래 두고 아국의 턱밑에 둥지를 틀었지 않은가?"
대전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비록 그들이 제국을 상대로 재건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을 가볍게 여기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명운을 걸고 임한 전쟁이라는 것이, 제국의 입장에서는 자그마한 국지전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다인, 리바스트라, 아록, 데이븐랏지. 이 네 개 주 하나하나가 아국 못지 않다. 그들을 모두 거느린 7황자의 세는 아국에 비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지."
제국의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
형제들의 칼날을 피해 북부에 자리를 잡은 그는 현재 다른 형제들을 경계하며 세를 가다듬는 중이지만, 언제 그 칼끝이 반대로 돌아갈지는 모르는 일이다. 베이고르가 제국을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는 것처럼, 제국 역시 베이고르를 그리 여기고 있을 테니.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7황자의 칼이 베이고르에 향할 일은, 적어도 7황자가 그의 형제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황위에 오르지 않는 다음에는 일어날 일이 없을 거라 보았다.
분명 이 자리에도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 이들이 몇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당연히 왕의 주장에 수긍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나올 왕의 제안을.
"초원인들을 규합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 아국에 미래는 없다."
그러나 기대했던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왕의 제안, 혹은 거래를 기다렸던 영주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실로 일방적인 선언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그냥 받아들여라 하는 말과 같다.
'막무가내로군.'
예상 외다. 막시밀리언은 이렇게까지 왕이 강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역시 '협상'에서의 위치를 보다 유리하게 가져가려는 시도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왕이 이렇게까지 영주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본래 지금의 왕, 주앙 칼 고르는 영주들이 필요에 의해 세운 왕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핏줄 하나 밖에 없는, 그야말로 꼭두각시 왕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몇 안 되는 충성스러운 귀족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의 지지기반은 미약했다.
그랬던 것이 2차 재건전쟁에서 구 바크렌의 세력 일부를 흡수하면서 신하 세력의 균형을 맞추고, 그 사이에서 조율자의 역할을 맡으며 기반을 다졌다. 그로 인해 처음에 비해서는 월등히 처지가 나아졌지만, 그렇다 해도 그가 영주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과하다.'
친정에 나선 전쟁의 승리가 그에게 과도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것일까. 그게 아니면 두 공작의 세력이 깎여나간 것이?
무엇이 되었든, 이런 식으로 영주들에게 세게 나와봐야 돌아오는 건 속에서 커지는 반감뿐이다. 이제껏 고분고분했던 왕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위축될 이들은 없다.
변수라고 한다면 저기 침묵을 지키고 있는 부족장들. 그러니까 새롭게 베이고르에 합류하게 될 초원인들일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그들의 세력이 고스란히 왕에게 기운다면 권력의 추는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게 될 터. 지금 왕이 과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역시 그를 위한 것이겠지.
다시 말해, 왕의 이 저돌적인 행보는 무턱대고 지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뒤에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고분고분하던 왕은 이제 없다. 이제부터는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로서 본격적으로 권력이 판돈으로 깔린 도박판에 발을 딛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왕의 말은 현실적이다. 초원인들을 규합하지 않고서는 제국(의 일부) 앞에서 기를 필 수가 없다. 규합한다고 해도 모자라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푸라기라도 손에 쥐는 것과 쥐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미 두 공작의 세력 역시 은근히 초원인들의 규합, 혹은 친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초원인들은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탐나는 먹이기 때문이다. 자칫 그들이 갈색초원으로 돌아가버리기라도 한다면 닭 쫓던 개 꼴이 되는 것인 만큼, 은밀한 행사라고 해도 제법 본격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두 공작을 비웃기라도 하듯, 왕은 이렇게 전혀 예상도 못한 때에 크게 질러버렸다. 이 이상 가는 융화책은 없을 것이다.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나라의 미래는 뒷전에 둔 채 사욕에만 충실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또한 앞으로 초원인들에게 반감을 사게 되겠지. 부족장들이 열심히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닐 테니까 말이다.
두 공작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지금 왕이 데려온 부족장들이 아닌, 그들이 받아들인 부족장들을 천거하여 영주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서부를 온통 초원인 출신 영주로만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니, 빈 자리에 최대한 자신들의 사람을 꽂아야 할 터.
'길어지겠군.'
우선은 못 다한 자존심 싸움부터 시작해, 본격적인 협상까지 끝마치려면 하늘에 걸린 해가 다 져도 모자를 것이다. 막시밀리언은 벌써부터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아 뒷목을 쓸었다.
*
"피로해 보이십니다."
군터의 말에 막시밀리언은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길었지 않은가."
대전에서의 길고 긴 회의를 끝내고, 막시밀리언은 그의 저택으로 향했다. 수도에 올 일은 없지만, 몇 년에 한 번이라도 올 때를 대비해 수도에 적당한 저택을 구입해 놓은 그였다. 병사들 역시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참 재미있단 말이지."
"무엇이 말입니까?"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결국 직접적인 이득이 걸린 자리에서 사람은 얼마든지 추해진다네. 신분의 고하에 관계 없이 말이야."
뜻 모를 소리를 하며 혼자 웃음짓는 막시밀리언. 군터는 힐끗 그를 보았다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어둑해진 거리에 말발굽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