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살마드였던 때도 그랬고, 베이고르의 수도가 된 이후의 베나시드 역시 사람으로 붐볐다. 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군터가 겪은 바로는 그가 올 때마다 성문 바깥까지 인파가 늘어서 있었다.
도시 밖에서 길게 늘어선 이들 중에는 꽤 색다른 행색을 한 이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초원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더니 사실이었군."
타칸 연합은 패망했으나 초원인들은 건재했다. 패망 이전에 제국으로 귀의한 부족들 중 상당수가 베나시드에 머물렀었고, 이번에 타칸 연합이 사라지면서 갈 곳을 잃은 이들 중 일부가 또 베나시드로 몰려들었다. 모두 베이고르 왕 주앙 칼 고르가 초원인들에 대한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덕이었다.
"들어가지."
줄이 길게 이어져 있지만 그들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코누디스 가문의 깃발을 본 수문병들이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곧 무수한 이들의 눈길을 받으며 긴 줄을 지나쳐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
베나시드로 들어선 막시밀리언은 먼저 왕궁으로 가 왕에게 도착했음을 알렸다.
직접 왕을 보고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왕은 바빴으므로, 영주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알현을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왕에 대한 예의만 차리고, 막시밀리언은 곧바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궁을 나와 가정 처음에 한 일은 먼저 와 있던 리에론 공작에게 얼굴을 비추는 것이었다.
그의 저택은 베나시드의 외성문 바깥처럼 온갖 사람으로 붐볐으나, 역시 막시밀리언은 도착하자마자 안내인의 안내를 받으며 바로 리에론 공작을 만날 수 있었다.
막시밀리언이 리에론 공작과 독대를 나누는 동안 군터는 밖에서 대기했다. 이번에 호위로 따라붙은 것은 그 혼자였다. 나머지 병사들은 살라스의 지휘 하에 숙소에 가 있었다.
"혹시 그대가 군터 경이시오?"
"그렇습니다만."
"아아! 역시. 척 보기에 범상치 않은 분이라 생각했소."
문 밖에서 바로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몇몇 이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모두가 무관들이었는데, 그들은 군터에게 큰 관심을 드러냈다.
"아그니스 체스퍼를 베었다고 들었소. 대단한 싸움이었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그들이 드러내는 감정은 대부분 호기심, 내지는 호의였지만 군터로서는 귀찮은 관심에 지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던 이들이 다가와 친한 척을 하는 것이 달가울 이가 있겠는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군터는 그에 해당되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칠 수는 없는 것이, 그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밝히는 신분이 최소 기사였다. 더군다나 리에론 가문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괜히 안 좋은 소문이 돌면 피곤하기도 하고, 더 안 좋은 경우에는 윗선에까지 이야기가 흘러가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군터는 그들에게 대충 대꾸하면서 막시밀리언이 들어간 저택을 눈짓으로 살폈다.
다소 시큰둥한 반응을 눈치 챘는지, 달라붙던 이들의 목소리가 조금은 시들해졌다.
그때였다.
"언제 한 번 가볍게 겨뤄봅시다. 아그니스 체스퍼라면 한때 이 땅을 주름잡았던 호장(虎將)인데, 그를 벤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궁금하구려."
호승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와 말투.
군터는 그런 말을 하는 자를 보았다.
그와 거의 비슷해 보이는 장대한 체구에 얼굴에는 기다란 흉터 하나를 새긴 사내였다. 단단해 보이는 인상에 은연중 흘러나오는 기세는 방금 한 말과는 달리 잘 가라앉아 있었다. 말만 앞세우는 이도 아니고, 마음만 앞서는 이도 아니라는 뜻이다. 군터는 한 눈에 그가 완숙한 무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냥 적당히 둘러대고 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사내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그럽시다. 언제 한 번 기회가 된다면."
"리에론의 기사, 그림왈드요. 그 기회가 꼭 오기를 기대하고 있겠소."
뒤늦게 자신을 소개한 그는 이전에 몰려든 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애완견들 사이에 섞인 늑대 한 마리 같다고 할까. 아무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흥미로운 자를 만났다.
그림왈드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런 모습마저도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얼마 후 막시밀리언이 나왔고, 군터는 그와 함께 리에론의 저택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 막시밀리언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예?"
"뭔가 달라진 것 같아서 말이지. 묘하게 들떠있는 것 같군."
아직도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었던가. 군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재미있는 자를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자?"
"리에론의 기사, 그림왈드라고 하더군요."
"그림왈드? 리에론의 기사라. 잘 모르겠군. 리에론 가문에는 기사가 워낙 많으니까."
남작가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임명할 수 있는 기사는 3명이 끝이다. 그에 반해 공작가의 경우 스무 명까지 임명할 수 있으니,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물론 리에론 가문 씩이나 되는 곳에서 아무에게나 기사 작위를 주지는 않았을 테니 범상치 않은 자임은 분명하겠지만 말이다.
"저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명(無名)이라고 하기에는 특출해 보이는 자였습니다."
"무명이라고 해서 능력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 단지 기회를 못 만났을 뿐이야. 능력으로 이름을 떨치는 자들이라고 해도 그들이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누가 그들의 이름을 알아주었겠는가."
"옳은 말씀이십니다."
어쩌면 명성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자들을 무의식적으로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군터는 반성하면서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았다.
그 아래, 노을 빛에 물들어가는 왕도의 모습이 제법 근사했다.
*
왕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군터는 그 연회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영주들마다 호위 한 명씩의 대동이 허락된 덕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정말 연회의 참석자가 된 것처럼 마음대로 쏘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호위로, 막시밀리언에게 붙어 움직였다. 다만 막시밀리언이 워낙 여기저기 움직이다 보니 그를 따라 연회장 곳곳을 누빌 수 있었다.
다른 곳에 정신을 팔지 않고 호위 임무에만 충실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연회장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통해 느낀 것은,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라고 해도 위글로우에서 열리는 연회와 별 다를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규모라든지 여러 면에서 이쪽이 월등하긴 하지만, 본질적인 내용 면에서 봤을 때는 똑같았다.
연회는 연회고, 사람은 사람.
위세를 보이려는 자가 있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는 자가 있다. 권력과 허영의 웃음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사람을 앞에 두고서도 이리저리 교묘한 언행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왕의 연회인데, 왕은 보이지 않는군.'
위글로우의 연회와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연회가 특별한 이유는 왕의 연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의 연회에는 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왕은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모든 영주들께서는 내궁의 대전으로 모여주십시오!"
일반 시종들과는 달리 경무장을 한 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저마다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던 영주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호위 분들은 여기까지입니다."
군터를 비롯한 호위들은 내궁의 입구에서 머물렀다.
끼이익-
위사(衛士)들이 문을 밀었다. 위로 길게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 영주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거대한 내궁의 문이 닫혔다.
쿵!
*
막시밀리언은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이 긴 계단은 쓸데없는 듯하지만 실은 상당히 교묘한 권력의 속성이 담겨 있다.
고래로부터 권력을 지닌 자들은 큰 것, 높은 것 등에 집착해왔다. 영주든 왕이든, 심지어 본 적은 없지만 제국의 황제마저 그랬으리라. 그것이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시각적으로 형상화시킨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왕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본다. 왕을 만나기 위해 영주들은 직접 다리를 움직여 긴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는 왕이 그의 수하들에게 강제하는 수고로움이다. 자신과 수하들의 차이를 이런 높이로서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치하지만 효과적이다.
"고약하군. 전에는 이런 계단이 없지 않았나?"
"새로 지었답니다."
투덜거리는 영주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착각했나 싶었는데 역시나 착각이 아니었다. 먼젓번에 왕을 알현 할 때 이런 계단을 지난 기억은 없었다.
'단단히도 취한 모양이군.'
타칸 연합에게 거둔 승리는 단순한 승전이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하게 존재했던 베이고르라는 왕국이 온전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부터 주장했던 왕국의 재건이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 번 망해 사라졌던 나라를 다시금 완전하게 일으켜 세웠다. 이는 주앙 칼 고르라고 하는 왕이 베이고르의 새로운 왕조를 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위대한 시작의 선을 그은 것이다.
그러한 자부심이 있을 터였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이 고약한 계단은 그 자부심의 발로일 것이고.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지금 왕은 욕심을 내고 있지만, 그 시기는 적절하다. 다만 문제는 어디까지 욕심을 내느냐다. 만약 왕의 욕심이 과하다면, 수긍하지 못할 이들이 속속 고개를 들게 되겠지.
"어서들 오십시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계단의 끝에서 한 사내가 웃으며 영주들을 맞았다.
왕의 입, 란도흐 바라누엔 백작이었다.
"바라누엔 백작. 오랜만에 보는구려."
"그렇군요 공작 각하. 그간 격조했습니다."
"피차 나랏일로 바빴지. 자, 드십시다."
칸디시아렌 공작이 그를 따르는 영주들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리에론 공작 역시.
란도흐 백작은 얼마 되지 않는 왕당파 영주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그 뒤를 따랐다.
대전에는 이미 먼저 온 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대전의 끝, 몇 개의 단 위 화려한 왕좌에 비스듬히 몸을 묻고 있는 주앙 칼 고르였다. 그리고 그 앞 좌측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사내들.
'귀의했던 부족장들인가.'
막시밀리언은 리에론 공작 무리의 중간에 끼어 움직이면서 그들을 훑어 보았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정체를 짐작했다.
옷차림은 베이고르의 귀족들과 다르지 않았고, 생김새 역시 비슷했으나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군터를 비롯해 초원인 수하들을 다수 둔 그였기에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서들 오게. 인사들 하지. 이쪽은 먼젓번 아국에 귀의한 초원의 부족장들일세."
모르는 얼굴들에 살짝 당황한 영주들에게, 주앙 칼 고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