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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96화 (296/1,064)

296화

베나시드로 떠나야 하는 막시밀리언은 인원을 꾸리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일체 배제하고 오직 호위병력만을 대동한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왕명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인원은 최대 백으로 제한이라."

짐꾼을 포함하여 이래저래 인원을 섞는다고 치면 호위 병력은 더 줄어든다. 각지에서 토벌군이 활약하여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잔재가 남아있는 요즘 같은 시국에 호위가 부족하다면 아무래도 불안해지기 마련. 자연히 다른 인원을 적게 꾸리는 한이 있어도 호위병력을 늘릴 수밖에 없다.

불편한 것이 불안한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이 나라에 영주가 수십인데, 그들이 백 명씩 끌고 온다 하면 그것만으로도 수천이다. 신경 쓸 수밖에 없지."

"자신을 섬기는 신하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렇게 안 좋게 볼 수만도 없지. 만에 하나라도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야. 높이 올라간다는 건 그런 것일세. 산을 타는 것과 같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더 발 디딜 곳이 줄어들거든. 종국에는 한 발자국만 헛디뎌도 떨어져 내리는 아슬아슬한 정상에 서게 되겠지. 왕이란 그런 것일 게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이라 하면 이 나라에서 가장 높고 강한 자일 터인데, 그런 그가 그리 겁이 많다는 것인가.

'결국 왕이라는 것도 결국은 많이 가졌을 뿐인, 그저 사람 하나란 거겠지.'

아무튼 귀찮은 왕명이 내려온 까닭에 군터가 덩달아 바빠졌다. 이번에 막시밀리언의 호위대장으로 그가 움직이게 된 것이다. 정예로 꾸리다 보니, 지휘관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모두 군터와 그의 휘하로 채워졌다.

"내 목숨을 자네에게 맡기는군. 처음도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늘 자네를 믿고 있지. 자네가 내 옆에 있는데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나. 제국의 흑포장군마저 참살한 왕국 최고의 용사가 아닌가."

낯 간지러운 말이다. 하지만 싫지는 않다. 그의 목소리, 표정, 말투 등 모든 것에서 마음에도 없는 입 발린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도 제법 낯짝이 두꺼워졌군.'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하물며 인정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불쾌하지 않은 일이니 더욱 쉽다.

"그러고 보니 왕도는 오랜만이군. 정말 오랜만이야. 작위를 수여 받을 때 한 번 갔던 이후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때도 군터는 막시밀리언을 수행했었다. 그러니 그 역시 그때 가본 것이 마지막이다. 베나시드가 아니라 살마드 였을 때는 몇 번 더 가 본 적이 있었지만, '베나시드'에 가 본 것은 한 번인 셈이다.

"많이 바뀌었을 것이야."

"그럴까요. 몇 년 만에 특별히 무언가가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니야. 다를 것이야. 눈으로 보이는 것은 같을지라도, 느껴지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야. 가 보면 알게 될 것이네."

막시밀리언이 씩 웃었다.

*

정확히 백 명을 맞췄다. 병사들로만 백 명이고, 그 외에 간단한 의술을 할 줄 아는 병사와 짐꾼 십 수 명이 더 있었다. 이들은 왕도에 다다를 즈음 따로 찢어져 움직일 예정이었다.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막시밀리언을 수행하는 인원은 정확히 백 명이었다.

머리가 어떻게 돼서 겁을 상실했거나, 규모가 큰 도적 무리와의 조우를 조금은 우려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위글로우를 떠나 며칠이 지나도록 도적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요란하게 움직이더니 그래도 일을 하긴 한 모양이군."

"운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이미 소식을 듣고 어디론가 숨어들었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군터는 이번에 할렌이 아닌 살라스를 대동했다. 그간 살라스에게 너무 짐을 지게 한 것 같아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간만의 외유가 즐거운 것인지 살라스의 표정은 밝았다. 이따금씩 아무 것도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자처해서 정찰대 임무를 맡는 것을 보면 새장을 나온 새가 따로 없었다.

살라스에게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살라스가 없었더라면 바깥으로 움직일 때마다 항상 불안했으리라. 믿고 맡길 수 있는 수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군터는 살라스를 보며 항상 느꼈다.

"이제 이틀 정도면 도착하겠군."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그럴 것입니다."

막시밀리언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였다. 팔을 위로 쭉 뻗고, 좌우로 가볍게 몸도 비틀었다.

"이거 참. 그새 살이 붙은 모양이야. 조금 부지런히 움직였다고 여기저기 결리는군."

"부지런히 움직인 것은 사실입니다. 조금 천천히 움직여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일정에 여유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부지런히 이동했다. 꼭 필요한 시간 외에는 줄곧 말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워. 마음은 아직 30대에서 머무는데, 나이를 먹은 몸은 그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지. 전혀 달라. 참 쉽게 지치고, 쉽게 망가져."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막시밀리언은 푹 쉬었다. 적어도 그가 무예 수련을 한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연회가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 그는 요 근래에 검을 완전히 놓아버린 사람처럼 지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마따나 몸이 망가진 것이 겉으로 보기에도 보였다. 근육이 빠지고 몸이 흐물흐물해진 느낌이랄까.

"하하하!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민망하지 않은가."

"송구합니다."

"사실 내 몸뚱이가 칼 들기 좋은 몸뚱이는 아니야. 내 언제 말한 적이 있었던가? 난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다네. 잔병치레가 많았고, 무술을 익히면서도 몸이 따라주지 않아 좌절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네. 그래서 내가 처음에 무관이 되겠다고 했을 때는 가족들이 다 나를 말렸었어."

"몰랐습니다."

짐작하지 못했다. 막시밀리언의 실력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느 무관들 만큼은 했었으니까.

"내 나름의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였지. 정말 노력했다네. 내가 출세하는 길은 오직 칼끝에 달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

과거의 어느 한 때를 떠올리는지, 살짝 올라간 막시밀리언의 시선이 흐려졌다.

"그 시절이 아쉬우십니까?"

"아쉬움? 아니. 그럴 리가."

흐려졌던 눈이 빛을 찾았다. 그리고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돌이켜 봐도 아쉬움은 조금도 없네. 아쉬움이니 후회니 하는 건, 모든 걸 다 하지 않은 자들이나 가지는 감정일 뿐이야."

"영주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다 했으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어.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거기서 더 뭘 할 수는 없을 정도로."

대단한 자신감이다. 정말로 치열하게 시간을 보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 군터는 내심 감탄했다.

"자네에게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귀족이 되고 영주가 되고 나서 조금은 허망했다네."

"허망하다 하심은."

"말단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일개 상인의 자식에 불과했던 자가 한 나라에 수십 밖에 되지 않는 영주가 되었어. 그렇다면 이는 분명히 출세가 아니겠는가.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지."

출세도 보통 출세겠는가. 그의 말처럼 말단이라 할 수 있는 남작이기는 하지만, 현재 이 왕국의 누구도 그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가 따르고 있는 리에론 공작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막시밀리언은 리에론 공작의 수하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존중을 받아 마땅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영주란 그런 존재다. 적어도 그가 다스리는 영지 안에서는 그야말로 왕이나 다름 없다.

"처음에는 기뻤지. 그 동안의 내 생이 보답을 받는 느낌이었거든.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 보이더군. 매일 보던 아침의 하늘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식상한 모든 것들이 다 절경처럼 느껴졌다네."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말에 일부 공감했다. 그 역시 한 때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출세를 갈망했던 것은 막시밀리언이나 그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바라보는 높이.

더 높은 곳을 봤던 막시밀리언인 만큼, 그것을 이뤘을 때의 허전함은 더 컸을 것이다.

"마치 다 타버린 장작이 된 느낌이었지. 겪어보지 않은 자는 모를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아아. 그랬지."

막시밀리언은 바로 납득했다. 위만 바라보며 달린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극복했는가?"

"다른 것에 눈을 돌렸습니다. 다행히 멀리 볼 필요도 없더군요."

"가족인가?"

"예."

막시밀리언이 씩 웃었다.

"좋군. 자네의 가정이 화목하다는 것은 귀가 있는 자들이라면 다 알고 있지."

"부끄럽습니다. 영주님께서는 어떠십니까."

"나 말인가? 장작에 다시 불을 붙였지."

"다 타버렸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붙이려 하니 어렵지 않게 붙더군. 완전히 타지는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불이라는 놈이 장작 없이도 탈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 후로도 말 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이야기를 나눴다기보다는 막시밀리언의 말동무 역할을 했다는 게 더 맞으리라.

어쨌든 때로는 흥미 있고, 때로는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고 왕도는 가까워져 갔다.

그렇게 왕도로의 도착을 하루 정도 남겨놓았을 때였다.

막시밀리언이 길을 틀었다.

"왕도가 코앞입니다. 어째서?"

"아직 여유가 있지 않은가.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고 가지."

"구경? 무엇을 말입니까?"

"타르가이 베르겐의 무덤 말이네. 자네도 들었지 않은가."

"아아."

"궁금하지 않은가? 여기서 멀지 않아. 넉넉잡아 나흘 정도면 돌아올 수 있을 것이야."

들은 적이 있었다. 타칸 연합의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이 죽은 자리에 생겨났다는 거대한 산. 처음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여겼지만, 카날레스의 마지막 전투에 참전했던 이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산이라니. 인간 하나가 죽었다고 그 자리에 산이 생겨나?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니 가서 확인해 보세.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무덤이 있는지. 어차피 할 것도 없지 않은가?"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일찍 가봐야 무엇을 하겠나. 어차피 서로 눈치싸움이나 열심히 하겠지. 진짜는 연회가 시작되면서부터야."

그렇게 그들은 말머리를 돌렸다.

소문의 산, 혹은 무덤은 자날레스에 있고 그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중간에 마을에 들러 길잡이까지 고용하여 움직였는데도 하루 하고 반나절이 지나자 소문의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정말이었군."

평야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 하나.

주변을 둘러싼 짙은 안개는 하늘의 구름처럼 보였고, 그것을 꿰뚫은 산은 안 그래도 높은데 더 높아 보였다.

"정말인가? 저 산이 본래 없던 것이라고?"

"예. 정말입니다. 정말 한 순간에 생겨난 것입니다."

잔뜩 주눅이 든 촌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

"전투가 있은 후, 이 주변은 싸그리 불탔습니다. 널린 시신이 너무 많아 수습을 할 수가 없었다더군요. 그래서 이 평야 전체에 불을 놓아 전부 태워버렸습니다. 이틀 동안이나 연기가 그치지 않았지요."

"그래. 그 이야기도 들었지. 모두 타서 그을려버린 땅에서 풀들이 자라났다던가."

"정말입니다. 마치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이 평야는 본래의, 아니 본래보다 더 푸르르게 변했지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 산까지……."

막시밀리언이 길잡이로 데려온 촌부와 말을 섞는 동안, 군터는 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개에 감싸인 저 산을 보고 있노라면 뭔지 모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흐음. 한 번 가까이 가볼까."

"아, 안 됩니다."

"응?"

촌부가 막시밀리언을 제지했다. 방금 전까지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 듯한 행동이었다.

"국왕 전하의 병사들이 산 바깥을 지키고 있습니다. 산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왕명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사실인가? 거짓이라면 목을 베겠다."

"저, 정말입니다!"

"확인해 보라."

"옛!"

병사 한 명이 재빨리 말을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사실입니다. 왕실의 친위병들이 산 주변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막시밀리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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