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장원은 꽤나 커졌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것이 불과 1년도 되지 않았음을 떠올려보면 배 이상 커진 규모는 제법 놀라운 것이었다.
"장주님."
"별 일은 없나?"
직접 들러서 듣는 것이나 위글로우에서 서신으로 보는 것이나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단지 머리로만 알던 것을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과, 장원의 주민들에게 얼굴을 보인다는 것이 의미 있을 뿐.
"마장이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군."
"예. 종마와 빈마(牝馬)를 충분하게 갖췄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시간뿐입니다."
그를 옆에서 수행하는 집사(장원 저택의)는 꽤나 유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것 같아 군터는 주인으로서 흡족했다.
이전의 집사 역시 젊고 유능했었지만, 임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려 골골대더니 끝내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 경험이 있어 새로운 집사는 똑똑하면서도 건강해 뵈는 자로 뽑았다. 다행히 그 선택은 현재까지는 성공적인 것 같았다.
"그래. 다른 쪽에서 문제는 없나?"
"특별히 말씀드릴 만한 것은 없습니다."
"전에 말했던 의사는 곧 구해올 수 있을 것 같다."
"아! 그렇습니까."
도시에서 먼 시골 마을은 말할 것도 없고,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나 장원에서조차 의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능력이 있는 고급인력들이 굳이 궁벽한 곳까지 내려와 살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먼젓번에 유능한 것 같았던 집사를 병으로 잃고서, 군터는 자신의 장원에 의사를 데려다 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병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가벼운 전염병이라도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운이 나쁘다면 많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장원의 주민들은 그의 재산이니,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간 돈을 쓰는 것은 아깝지 않았다.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괜찮다. 다만 그의 마음과는 달리, 위글로우에 있는 의사들은 좀처럼 위글로우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겁에 질리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거절을 표했다.
거기서 윽박질렀다면 강제로 데려올 수 있었겠지만, 군터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없는 자를 강제로 데려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기도 했고, 그런 도적 같은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일의 진행이 영 지지부진 하던 차였는데, 다행히 며칠 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의사가 나타났다. 많은 돈을 안겨줘야 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어차피 군터는 돈이 아쉽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새롭게 이주해 온 이들은 어떤가? 기존 주민들과 잘 어우러지는지 궁금하군."
"생각보다 더 잘 섞이고 있습니다. 다들 서글서글해서 어울리는 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가족이 장원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옮겨온 이들도 그렇지만, 기존 주민들도 새로운 이들과 일부러 거리를 둘 이유가 없습니다."
새로운 주민들의 남편이, 자식이 모두 군인이다. 그것은 기존의 주민들에게 있어 상당한 압박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텃세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이유다.
"마장의 일을 최우선으로 하되, 뜻이 있는 자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도록 하겠다."
"군사 훈련을 말입니까?"
"그래. 내 병사들이 장원을 지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그들은 수가 적다. 내가 거느린 병사들은 엄밀히 말해 코누다이안의 관군. 지금 정도는 괜찮지만, 이 이상 사사로이 병력을 쓰는 것은 좋지 않다."
장원에도 사내들은 많다. 그들이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다면 요즘처럼 주변의 분위기가 뒤숭숭해도 불안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이미 지금 머물고 있는 경비대장에게 일러두었다. 그와 상의하여 진행하도록."
"예. 그리 하겠습니다"
"내가 없는 이곳에서는 자네가 내 대리인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도 잘 해주었지만, 앞으로도 고생해주게. 급하거나 내게 물어야 하는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전령을 보내도록. 이곳의 병사들에게는 내 미리 말을 해둘 테니."
"옛!"
제이스의 목소리에 기쁨이 담겼다. 지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이다.
기존에 군터는 장원을 관리함에 있어 행정적인 업무와 군사적인 업무를 완전히 분리해 두었다. 믿을 수 있는 수하 병사들로 하여금 장원과 장원을 관리하는 집사를 감시하게 한 것이다. 이는 집사인 제이스에게 드는 채찍과 같았다. 나태하지 못하고,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그러나 지금, 군터는 제이스를 인정하면서 그의 권위를 올려주었다. 언제든 전령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는 말은 병사들에 대한 통제 권한을 일부 허용한다는 뜻이다 다름없다. 이제 장원 내에서 그의 말은 전보다 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들르겠네."
"장주님께서 들러주시면 주민들도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젊은 집사는 사람이 진실된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윗사람을 대하는 법도 잘 아는 것 같았다. 이런 아부성 짙은 거짓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니 말이다.
"글쎄."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정도면 된다. 군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많이 얼굴을 비쳐서 거리를 좁힐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또 너무 멀어져서 불안함을 느끼게 할 필요도 없다. 적당히 먼 거리에서 위엄을 유지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더 좋은 방법도 있겠지만, 군인이 아닌 수하에 대한 군터의 용인술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장원 바깥까지 나가 적당히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군터는 장원 중심부에 자리한 그의 저택으로 가 미리 가 있던 아들 보리스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낮에 장원 주민들에게 얼굴을 보이며 위글로우로 돌아갔다.
*
막시밀리언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서 라일라가 차를 따랐다.
뜨끈한 차를 마시면서도 막시밀리언의 굳은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던 그의 얼굴에 실소가 번진 것은 빈 잔에 세 번째 찻물이 찰 즈음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
"제가 알아야 하는 일이라면 말씀하셨겠지요."
"좋구나. 내가 이래서 너를 아끼는 모양이다. 넌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처음에는 반반한 외모와 독특한 분위기에 끌렸다. 솔직히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안았고, 마음에 들어 곁에 두었다.
모든 것은 질리게 되어 있다. 만물이 시간이 흐르며 빛을 잃어가듯이 사람의 마음 역시 그렇다. 이는 절세의 가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무리 온 정신을 빼앗길 만큼 깊숙이 빠졌던 여인이라도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다 보면 그 관심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라일라는 예외였다. 그녀에 대한 막시밀리언의 관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더욱 깊어져만 갔다. 마치 바닥이 닿지 않는 수렁에 발을 디딘 것처럼.
막시밀리언은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빠진 것은 수렁도 아니고, 그의 집 한 켠에 머무는 연약한 여인 하나에 불과했으니. 오히려 그녀로 인해 막시밀리언은 치열하고 살벌한 바깥 세상에서의 사투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때때로 그는, 라일라를 신이 자신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때때로, 그러니까 가끔 한 번씩 하는 시답잖은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는 언제나 헛웃음이 따랐다.
"내가 고민이 있다. 두 가지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데, 둘 모두 각기 장단이 있어 어느 것 하나를 택하기가 어렵구나."
"아쉬움 때문입니까."
"그렇지. 하나를 택하자니 하나가 아쉬워. 마음이 흐려져서인지 무엇이 최선인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신께서 점지해주시는 길이 아닌 한, 인간이 택하는 길에 확신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착각일 뿐."
"하하. 그렇다면 너의 신에게 한 번 물어다오. 무엇이 더 나을지 말이다."
"묻는 것은 인간의 뜻이나, 답하는 것은 신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다시금 실소를 흘린 막시밀리언이 차를 홀짝이며 입을 떼었다.
"하나는 가진 것을 지키고 불리는 길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가진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가지러 가는 길이지. 전자는 무난하고, 후자는 모험이다. 얻는다면 크게 얻을 것이고, 잃는다면 역시 크게 잃게 될 거이야."
"알겠습니다."
라일라가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후 무언가를 들고 온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져온 것을 내려놓았다. 작은 함 두 개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배가 불룩한 주머니 하나였다.
물건들을 가져오고도 준비는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빛이 들어오는 창을 시커먼 천으로 가렸다.
방 안이 어두컴컴해지자 막시밀리언이 인상을 찡그렸다.
"꼭 그래야 하나?"
"어둠은 축복입니다. 밝음 속에서 우리는 현혹되어 길을 잃지만, 어둠 속에서는 자그마한 한 점의 빛을 볼 수 있지요."
막시밀리언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하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 않지만 이것이 그녀의 방식이다. 그녀는 어두운 곳을 병적으로 좋아한다. 적어도 막시밀리언이 수 년간 본 결과로는 그랬다.
후욱!
불씨가 피어 오르고, 자그마한 막대가 두 개의 초에 불을 옮겼다.
흐릿한 연기가 어두컴컴한 방 안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라일라는 두 손을 두 개의 초에 가져갔다.
불은 그녀의 손을 해치지 않았다. 대신 불에서 생겨난 연기가 진하게 뭉쳐 그녀의 양 손을 휘감고 더듬었다.
어느 순간 라일라가 손을 거둬들였다. 손을 감싼 연기는 흩어지지 않았다. 타오르는 초에서부터 가늘고 흐릿하게 이어진 선은 그녀의 손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았다. 펼쳤다. 그리고 숙인 얼굴로 가져가니, 손에 머물던 연기가 그녀의 코로 흘러 들어갔다.
"하아아."
한숨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하며, 달뜬 교성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무엇으로 정의하건 간에, 옅은 연기에 휩싸인 그녀의 모습은 매우 고혹적이면서 신비로워 보였다.
"안주하십시오."
"그게 신의 답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막시밀리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였다. 라일라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연기에 감싸여 있었다.
막시밀리언이 그녀의 곁을 지날 즈음, 그녀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한 손을 눈 높이로 들어올렸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연기가 기울어진 잔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들어올린 손으로 몰려 움직였다. 라일라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짙은 연기를 보며 말했다.
"모험이라 하셨지요. 하지만 실은 도피가 아니었습니까?"
"뭐라?"
걸음이 멈췄다. 막시밀리언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큰 일은 떠나가지 않고도 이룰 수 있습니다. 영주님께서는 그 과정에서의 투쟁을 피하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가늘고 부드러운 손이 접혔다. 동시에 짙은 연기가 사라졌다.
"신께서는 싸우라 하십니다. 피하지 말라 하십니다. 승리할 것이며, 얻을 거라 하십니다. 그리고."
은은한 안광이 라일라의 두 눈에 떠올랐다. 막시밀리언은 잠시 홀린 듯한 얼굴로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것은 도망쳐 얻는 것보다 더 값질 거라고도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