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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94화 (294/1,064)

294화

"다음은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 현황에 관해서입니다."

달콤한 것은 언제나 빠르게 지나간다. 이틀에 걸친 연회는 그런 것이 있었나 할 정도로 순식간에 끝이 났고, 잠시 옆으로 비켜갔던 일상이 다시 돌아왔다.

"현재까지 대두되고 있는 세력은 총 일곱. 저마다 든든한 지지기반을 가진 황자들입니다. 현재까지의 상황만 놓고 보면 제국의 주인은 이들 중에서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베이고르는 물론이고, 제국에 인접한 나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 튀기는 내전이었다. 황위를 놓고 형제들끼리 벌이는 상잔은 어떤 이들에게는 즐거움을, 어떤 이들에게는 불안함을 안겨주었다.

베이고르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속했다.

"아국에 가장 가까이 자리잡은 황자는 7황자입니다. 현재 외조부의 조력을 얻으며 마구잡이로 세력을 불리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이미 일개 황자의 세력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다. 4개 주가 그를 따르며, 거느린 정병만 10만이 넘어간다고 한다. 그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일개 황자의 세력이 어지간한 한 개 국가 이상이다.

베이고르로서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당장 7황자가 군대를 몰고 쳐들어온다면 막아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니.

"너무 떨 필요 없다. 등을 돌리는 순간 칼에 찔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

막시밀리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아무리 사람을 해치지 않게끔 잘 훈련되었다고 해도 맹수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면 떨게 되는 것이 사람이지 않은가.

"제법 순조롭게 추스르고 있는 모양이다. 조만간 아국에서든 그쪽에서든 친선의 사자가 움직이지 않겠는가. 가까이 있어 불안한 것은 이쪽만도, 저쪽만도 아니니까."

"저 또한 같은 생각이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인해 아국의 사정이 곤궁하니 저쪽에서 과한 요구를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번 회의에는 위벨까지 참여했다.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인 만큼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온 것이다.

"공물이라도 요구하리라 보나?"

"아국의 열악한 사정. 거기에 제국 특유의 오만함이 더해진다면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선물을 안겨주면 안겨주겠지."

"내전의 장기화를 고려해서 말입니까?"

"그래. 싸움이 길게 이어진다면 진정으로 등을 돌려도 찌르지 않을 우방을 원할 것이야. 비록 우리가 제국의 땅 위에 깃발을 세운 나라이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재건이라는 명분이 있으니 마냥 이를 갈 일도 아니지. 상황 때문에, 힘 때문에 숙인 고개는 언제든 더 세게 치켜 올라갈 수 있는 법이니까."

"7황자의 성품이 상당히 호전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좋게 말해 호전적이지, 나쁘게 말하면 망나니다. 그가 비위가 상했다는 이유로 시종 십 수 명을 그 자리에서 직접 참살한 일화는 유명했다.

"맞아. 그 자신은 머저리지. 하지만 그의 외조부는 노회한 여우다. 제국의 조정에서도 입김을 내던 자가 손자 하나 주무르지 못하겠는가."

"그런 그조차도 일찍부터 손자의 독선적인 성격 탓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지 않은가. 이전의 그는 그저 아무런 꿈도 없이 황자로서의 호화스러운 삶만을 영위하는 한가한 인생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가 천 년 동안 살 줄 알았으니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만의 잘못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도 갑작스럽게 황제가 죽었지. 황자로 태어나 황자로 죽을 자들이 갑작스레 처지가 변했어. 정말로 황위를 노려볼 수가 있게 된 거야."

상황이 바뀌면 처신의 방식도 바뀌는 법.

"당장 딛고 선 땅이 외조부의 것이고, 그를 따르는 이들마저 다수가 외조부의 사람들이거늘 그가 감히 비위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으음."

"성질대로 움직이는 마구잡이였다면 진즉 황도에서 목이 떨어졌겠지. 어쨌든 최후까지 살아남은 일곱 중 하나일세. 내 그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들리는 말처럼 모자란 자는 아닐 것이야."

"송구스럽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바쁜 와중에 국외로까지 눈을 두기가 쉽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이제 급한 불은 껐다 했으니 국내외의 정세에도 귀를 기울이도록 하게."

"예."

근래에 들어 위벨은 모사의 역할 보다는 관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름의 성과를 얻었으나 이제는 다른 곳에서의 역할이 필요해졌기에, 막시밀리언은 위벨에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곧 왕도에서 부름이 있을 것이다."

"언질이 있었습니까?"

"급한 불은 다 끄지 않았나. 늦출수록 모양새가 우스워지지."

승전 이후에 각지에서 소란이 일었던 터라 응당 치러야 할 절차들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베나시드에 있는 왕은 하루라도 빨리 영주들을 불러모으고 싶어 몸이 달아 있으리라.

그런 막시밀리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회의가 있고 닷새 뒤에 도착한 왕의 사신은 한 달 뒤에 전국의 영주들을 왕도로 소집하겠다는 왕명을 전달했다.

*

딱! 딱!

목검 두 개가 힘 있게 마주쳤다.

하나는 몰아붙이고 하나는 몰아치는 공격을 받아냈다.

공격은 없었다. 다만 이따금씩 몰아치는 공세 사이로 슬쩍 들어가 절묘하게 맥을 끊었다.

"틈이 벌어졌다. 몰아치고 있다 해서 승기를 잡은 것이 아니고, 승기를 잡았다 해서 정말로 승리한 것은 아니다. 공격을 하면서도 수비를 생각해라."

"헉. 헉. 반대로 수비를 하면서도 공격을 생각해야겠지요?"

"똑똑하구나."

군터는 흐뭇하게 웃었다. 수련 중에는 웃음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그가 흐릿하게나마 웃음 짓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방금 보리스의 대답은 그의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해라."

그의 아들은 일찍 철이 들었다. 앳된 겉모습과는 달리 말하는 것이며 행동거지는 반쯤 어른 같았다. 그런 모습이 대견하게 느껴지다가도, 자신이 아이를 저렇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어 조금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제가 공자님의 나이 때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책과 종이에 파묻혀 살았겠지."

"아. 말씀을 들으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군터는 모페이브에게서 수건을 받아 들면서 잠깐 그의 얼굴을 보았다.

전에는 없었던 잔주름이 얼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흰 머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역시 나이를 먹은 것이다.

"음?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 자네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꽤 시간이 지났구나 싶어서 말이네."

"하하. 갑작스러운 말씀이군요. 음. 그러고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제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찾고 계셨던 겁니까?"

"찾을 필요도 없었지. 바로 보이더군."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장주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신 것이 없군요."

"그런가?"

모페이브는 허락을 구한 후 조심스럽게 군터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정말입니다. 오히려 처음 뵈었을 때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아부는 됐네."

"아부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었지. 이제야 추가 좀 맞으려나 보군."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하시겠습니까?"

"아니. 오늘은 바로 시작하겠다. 시간이 없으니까."

"아. 장원으로 내려간다 하셨지요?"

"그래. 가끔씩은 얼굴을 비춰주는 게 좋다고 하더군."

"맞습니다. 장원의 주민들에게 누가 그들의 주인인지를 알려주셔야지요. 장주님께서는 위엄을 보이실 수 있고, 그들은 안정을 얻을 겁니다."

평시에도 그렇지만, 요즘 같이 소란스러울 때는 든든한 버팀목을 갈구하게 된다. 의지할 곳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그 욕구를 채워주는 보호자에게 인간은 충성을 바친다.

군터는 모페이브와 함께 지하실로 향했다.

이제 그의 술법 수련은 대부분 자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전처럼 모페이브가 적극적으로 지도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하는 것은 가벼운 조언, 그리고 수련 과정의 참관 정도였다. 군터의 사령술이 이제는 어느 정도 독자적인 길을 잡아감에 따른 변화였다.

그어어어.

시체들이 일어선다. 힘을 잃고 부패한 몸뚱이들에서 음산한 사기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어려우십니까?"

"정교한 통제는 되지 않는다."

여전히 칸젤을 곁에 두면 기운이 마음처럼 밖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척을 이룬 것은, 기운의 통제력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기운의 총량 자체가 늘었기 때문이다.

기운을 담고 뻗어내는 그릇이 커졌다. 때문에 움직이는 기운이 열이라 치면 하나 정도가 뜻한 대로 움직이더라도 술법을 발휘할 수 있었다.

처음에 비하면 큰 발전이지만, 군터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웠다.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온전한 내 힘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한들 발전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나저나 망령술은 이제 그만하면 되신 것 같습니다만, 다른 쪽은 생각이 없으십니까?"

"훈련용으로 쓸 제물이 마땅치 않지 않은가."

사령술 자체가 비주류에 속하는 술법이라 알려진 것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기가 감도는 망령을 이용한 망령술. 그리고 또 하나는 생명에게 사기를 눌러 씌우는 저주술.

지금껏 군터가 꾸준히 수련해 온 것은 망령술에 해당된다. 저주술 같은 경우는 아직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다. 마땅한 제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주라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사령술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꼭 죽음의 기운이 아니어도 된다.

기운을 이용해 부정한 영향을 끼치게 만드는 것을 망라하여 저주라 하는 것이다. 다만 죽음의 기운이라는 것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본질적으로 치명적이기에, 죽음의 기운을 매개로 하는 저주가 저주술이라는 수법의 대표격으로 자리했을 뿐.

"우선은 가볍게 짐승들로 시작해 보심이 어떻습니까."

"그래도 되겠나?"

"안 될 것 없지요. 다만 저주라는 것은 망령을 다루는 것과는 성질이 판이하게 다르니 유념하셔야 할 겁니다."

"저주도 다룰 줄 아나?"

"저는 땅의 술법을 사용합니다. 땅의 기운에 부정적인 사념을 섞는다면 그것이 곧 저주가 아니겠습니까.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위대한 술사가 노하여 본래 옥토였던 곳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다고 하지요."

"저주로군."

"예. 물론 굉장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론적으로 저주술에 통달한다면 그런 기적을 부리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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