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마다 어울렸다.
군터는 비교적 느지막하게 자리를 떴다. 막시밀리언이 그에게 간간이 말을 건 탓이었다.
"전공이라고 한다면 자네의 이름이 빠질 수 있겠는가. 그 제국의 흑포장군,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을 베지 않았나."
"누가 베어도 베었을 목입니다. 소관은 그저 남들보다 먼저 나섰을 뿐.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누가 베어도 베었을 목이라는 말은 맞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더 희생자가 생겼겠는가. 감히 누구도 나서지 못할 때 자네가 나서서 마무리를 지은 것이야. 겸손함으로 덮을 만한 공은 아니지."
막시밀리언은 일찍부터 잔을 몇 번씩이나 비워대더니 벌써 술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제법 풀어진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의 그는 일찍이 거의 보지 못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기분 좋은 일? 당연히 있지. 자네도 알면서 뭘 물어보나."
홍조가 이미 이마에서부터 턱 끝까지 가득하다. 눈은 풀리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취기가 있었고.
"앞서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조만간 있을 논공행상에서 내가 승작이 될 것 같네. 벌써 위쪽에서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 프롱기우스 백작이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군."
막시밀리언은 간간이 프롱기우스 백작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서로 속한 곳은 다르지만, 한 전장에 섰던 경험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둘을 가깝게 이어준 모양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기도 한 모양이고.
'승작이라.'
그렇다면 코누디스 자작이 되는 것인가. 설마 백작위로, 두 계단이나 올라갈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기쁨의 이유는 단지 그뿐인 것일까? 미겔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피곤하군. 전장에서 돌아온 지 벌써 꽤 날이 지났건만 아직도 쌓인 피로가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이야.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하긴, 나도 벌써 40줄이지 않은가. 음, 어쩌면 운동 부족일 수도 있겠어. 평소 단련을 소홀히 했더니 이렇게 표가 나는군."
"과음을 하셨을 뿐입니다."
"하하! 그럴지도. 확실히 오늘은…조금 많이 마셨어. 오랜만에 기분을 내고 싶었거든."
"……."
"군터. 자네도 자리에만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돌아다니게나.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야. 아그니스 체스퍼와의 그 치열했던 일전을,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하는 자들도 많겠지.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사람들을 밀어내지 말고, 그들의 틈에 섞여 어울리게나. 말했듯, 즐기기 위한 자리니까."
막시밀리언은 잠시 후에 자리를 떠났다. 그가 부축을 하려는 시녀를 물리치고 비틀거리며 물러난 후에 연회장의 분위기는 한층 더 시끌벅적 해졌다.
군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연회장 한쪽에서 두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코르넬."
"군터. 들었네. 활약이 대단했다지."
그는 코르넬이었다. 친위대장이라는 공식적인 직함을 갖고 있으며, 영주인 막시밀리언에게 아마도 가장 신뢰받고 있는 신하. 그리고 사적으로는 군터와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으며, 함께 전투를 치른 적도 있는 자.
"잠깐 괜찮나."
"음. 할 이야기는 대부분 다 했네. 그럼, 잠깐 실례들 하겠소."
이야기를 나누던 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코르넬은 군터와 함께 시끄러운 회장을 벗어났다. 비교적 조용한 관저 바깥에는 그들과 비슷한 목적을 지닌 이들이 이곳 저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늘 혼자 자작이나 하다가 돌아가던 자네가 날 찾다니. 뜻밖이군."
"영주님께서 좀 즐기라시더군.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남 밀어내는 것 좀 그만하라고 말이야."
"하하하. 하긴, 자네가 표정 없이 가만히 있으면 감히 누가 말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런가.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코르넬 역시 이전에는 꽤나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던 사내였다. 차가운 인상에다가 때때로 권위적이며, 허리춤의 칼에 손을 많이 가져가기도 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도 한바탕 칼부림을 할 뻔했었으니.
"예전 생각이 나는군."
"음?"
"자네가 그 당시 백부장이었던 영주님의 명으로 날 찾으러 왔을 때 말이네. 그때 하마터면 서로 칼을 뽑을 뻔했었지 않나."
"하하.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그게 언제인가? 벌써 10년 정도 되지 않았나?"
"10년. 벌써 그렇게 됐나."
사실 벌써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벌써라는 한 마디 말로 치부하기엔, 그 긴 시간 동안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제국의 백부장은 다시 일어난 베이고르의 남작, 어쩌면 자작이 되었으며 천대 받던 십인장은 장원을 가진 기사가 되었다.
"이제 전장엔 나가지 않나?"
"……."
아무런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코르넬에게는 꽤나 상처가 되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만 그 웃음이 비치는 감정이 유쾌함에서 씁쓸함으로 변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네. 영주님의 뒤를 지키면서, 그분께서 가시는 길을 어디든 따라가고 싶지. 하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해."
그가 들고 온 잔을 입에 가져갔다. 제법 남아있던 술이 반절 이상 한 번에 사라졌다.
"하루가 다르게 흰 머리가 늘어간다네. 매일 칼을 쥐지만, 그때마다 손에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아. 예전에 입은 상처들이 욱신거리고, 비가 오면 몸이 무거워."
아마도 하고 싶지 않은 고백이었을 것이다.
"실은 꽤 전에 영주님께 그만 물러나고 싶다고 말씀 드렸었네.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인가."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나는 이제 영주님께 도움이 되지 못해."
"……."
서글픈 일이다. 한때 코르넬이 꽤 쓸 만한 무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자네가 부럽네 군터. 자네의 젊음, 자네의 힘. 그것이 내게도 있었다면 나는 지금도 영주님의 뒤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완전히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는군."
"하하하. 미안하네. 나도 조금 취했나 보군. 아무튼 영주님을 부탁하네 군터. 자네라면 내 몫까지도 다 해줄 수 있겠지."
"흥. 자기 일을 남에게 떠넘기다니. 그런 못된 버릇은 어디서 배웠나."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들이 함께 했었던 과거의 일들이 주를 이뤘다. 그 당시에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던 것들도 화제로 오르면 웃음기가 감돌았다.
"이런 옛날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도 재미있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말이야."
"무슨 뜻이지."
"솔직히 자네가 말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지 않은가? 하하."
"쯧."
술의 힘일까, 추억의 힘일까.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이야기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재미는 재미고,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
"요즘, 아니 요즘도 아니군. 귀찮은 이야기들이 자꾸 들려오고 있네."
"귀찮은 이야기?"
"영주님의 후사에 대한 이야기."
"으음."
코르넬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 후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로서도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솔직히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깊게 생각한 적이 없어. 영주님께도 따로 말씀 드린 적이 없고."
"맞아. 그랬지. 모두가 시끄럽게 떠들 때도 자네는 잠잠했었지."
"후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놈들은 후사 그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많겠지. 하지만 난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 그저 영주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 일이라고 생각했지."
"……."
"하지만 너무 길었어."
"그건, 이제는 관심이 생겼다는 말인가?"
"아니. 여전히 관심은 없다. 다만 조금 답답해졌을 뿐이지. 내게도 여기저기서 귀찮은 말들이 들리니까."
"흐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힘을 지닌 자들 주변에는 그런 귀찮은 것들이 꼬이기 마련 아닌가."
"영주님께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야. 미룬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않나. 내가 겪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귀찮음을 영주님께서도 겪고 계실 텐데, 왜 계속 방관만 하고 계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네의 심정은 나도 이해하네."
"그렇다면 아는 것을 말해주게. 영주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자네가 말한 것처럼 영주님께서도 생각하고 계신 바가 있다는 걸세.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 미안하네."
"아니. 오히려 내 쪽이 그렇지. 무리한 것을 물어서 미안하군."
"음.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야. 오래 끌어서 좋을 일은 아니니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네."
코르넬이 다시 회장으로 들어가고, 군터는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겼다.
'역시 알고 있었군.'
코르넬은 영주의 최측근이다. 세인들의 눈에는 군터 자신 역시 최측근으로 분류 되고는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영주와의 관계에 있어 코르넬과 비할 수는 없다. 그는 그야말로 처음부터 막시밀리언을 따랐던 자니까 말이다.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코르넬은 줄곧 입을 다물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정보 아닌 정보를 주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그 정보는 군터에게 있어 꽤나 유용하게 다가왔다.
'사실인 모양이구나.'
무리한 끼워 맞추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겔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오늘 막시밀리언이 보인 흐트러진 모습, 그리고 코르넬이 마지막에 남긴 한 마디를 떠올리면 자꾸 한 가지 답이 떠오른다.
'그 계집이…… 하! 세상이란 건 참 재미있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계집을 막시밀리언에게 넘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다 부질 없는 생각이지만 말이다.
*
"몸은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아이는?"
"조금 전까지는 힘이 넘쳤는데 지금은 조용합니다. 잠이 든 모양입니다."
"이런. 조금 일찍 올 것을 그랬군."
막시밀리언은 조심스럽게 라일라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톡 튀어나온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사내 아이렸다."
"예."
"신기하구나.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그것을 어찌 알 수 있는지."
"영주님께서 사내를 원하셨으니, 그대로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그 말도 신기한 것은 마찬가지다."
원한다고 해서 사내아이를 얻을 수 있다면, 딸만 가져서 골치를 썩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한 달 하고 열흘 정도 남았다 했느냐?"
"예."
출산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라일라는 몸에 살이 붙지 않았다. 나온 것은 아이가 숨쉬고 있는 배 밖에 없었다. 배를 제외하고 보면, 그녀는 아이를 갖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그를 스쳐간 세월은 그녀에게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넌 여전하구나. 정말 똑같아."
취기 오른 몽롱한 눈으로, 막시밀리언은 라일라의 볼을 쓰다듬었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은 솜씨 좋은 조각사가 수 년 간 공들인 조각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