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당혹스러웠다.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한 미겔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했기에, 거짓이라고 생각했다가도 곧바로 생각이 흔들렸다.
'애첩? 애첩이라고? 오랫동안 아낀 계집이라면 그 무자 년이 아니겠는가.'
어찌 잊을까. 자신이 직접 잡아서 막시밀리언에게 선물했던 계집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라이라? 라일라? 아마 그런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계집이 아이를 가졌다고?
"뱃속의 아이가 계집이라면 그래도 문제가 없겠지요. 하지만 사내라면…일이 복잡해지지 않겠습니까?"
"……."
잠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버려서 잠깐 머리가 멍해지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해봐야 했다.
"아직 그 뱃속의 아이가 사내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렇지요."
"게다가, 애첩에게서 자식을 봤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지. 좋지 않은 이야기가 돌 수는 있겠지만, 아이가 사내라면 그 아이를 영주 부인의 자식으로 삼아도 되지 않는가."
"예. 귀족가에서 가끔씩 있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지?"
"문제는, 영주님께서 지난 수 년 간 의도적으로 영주 부인에게서 자식을 보기를 거부하셨다는 것이지요. 비밀스러운 방법까지 동원해서 말입니다. 이게 만에 하나라도 리에론 가문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음."
"그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신 영주님께서 그리 무난한 방법을 택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그 분께서는 리에론 가문과 깊게 얽힐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통혼까지 하신 마당에 말입니다."
"리에론 가문과 갈라설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니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요. 그런데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제 생각에는…상당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순간, 얼마 전에 막시밀리언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더 높이 올라갈 것이라는 말.
'그늘 아래서는 거목이 자랄 수 없다.'
이 또한 막시밀리언이 일전에 했던 말이다.
"리에론 가문이라는 뒷배는 처음에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영주님께서는 그 버팀목이 장애물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미겔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말이다.
이건 꽤나 놀라운 일이다. 역시 지금 들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확실한 건가?"
"알아내기가 쉽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아무리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입이 무거운들 사람입니다. 알고자 하면 다 알게 되는 법이더군요."
어떤 식으로 알아냈는지는 묻지 않았다. 미겔은 자신의 정보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걸 왜 굳이 내게 이야기하는 거지?"
"주인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랫사람들 아닙니까. 경이나 저나, 영주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겠지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군터 경. 현재 이 영지에 영주 부인과 가까이 지내는 이는 없습니다. 권력에 빌붙기 위해 날아들었던 자들도 꽃에 향기가 없으니 모두 도망쳐버렸지요. 아직까지 영주 부인의 곁에 남은 이는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아시지요?"
"…여인들끼리 어울리는 것일 뿐이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닙니다. 경께서 전장에 나가 계시는 사이, 두 분의 친분은 더욱 깊어졌지요. 누가 보면 피를 나눈 자매인 줄 알 정도입니다."
"그래서?"
군터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 감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실려 나왔다. 미겔은 앞으로 바짝 당겼던 몸을 슬쩍 뒤로 빼며 싱긋 웃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사내들이지만, 그 사내를 움직이는 건 여인이라지 않습니까."
"처음 듣는 말이다."
"뭐, 그런 말이 있습니다. 게다가 경께서는 위글로우의 소문난 애처가 아니십니까. 혹여 부인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리시는 일은 없으셔야 할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공과 사는 구분하니 그런 염려 따위는 필요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아무튼 이해가 되지 않는군. 영주님의 뜻은 알겠지만, 리에론 가문과 척을 져서 좋을 일이 있나?"
정확히는 뒷감당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주의 나이가 많고, 부인이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가문과 가문의 연을 끊을 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약하다.
이런 경우 다른 귀족 가에서는 앞서 말했듯 양자를 들이는 방법이나, 다른 수를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막시밀리언이 이것을 빌미로 리에론과 갈라선다면 그는 그 즉시 리에론의 분노를 살 것이다.
명분이 충분하더라도 신중을 기울여야 할 텐데, 명분마저 빈약한 상태에서 리에론 가문을 욕보인다면 돌아올 결과는 뻔하다.
"저 또한 그게 의문입니다만…모르겠습니다. 그것만은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하지만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추측?"
"예를 들어, 줄을 갈아타려 하신다거나 말이지요."
"줄을 갈아탄다? 칸디시아렌 공작 쪽으로 말인가?"
"그 쪽일 수도 있고, 다른 쪽일 수도 있겠지요."
칸디시아렌 공작 쪽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하나다.
군터의 눈이 깊어졌다.
*
달콤한 휴식은 며칠로 끝이었다. 군터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살라스가 그의 업무를 대신했고, 기대했던 대로 상당히 잘 해주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직접 봐야만 하는 사안들이 제법 있었다. 예를 들면 그의 장원에 관한 일들이 그랬다.
"전쟁 직후에 왕국 곳곳에서 도적떼가 출몰하고, 민란까지 겹치면서 양곡은 물론이요 철을 비롯해 군수 물자의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가장 크게 오른 것이 그것들이었을 뿐이고, 그만큼 폭등하지는 않았더라도 모든 품목에 대해 전체적인 물가가 다 올랐다. 도적들이 활개를 치고 치안이 약화되면서 상단들의 움직임이 위축되고, 그로 인해 물류의 흐름이 답답해진 것이 이유였다.
"장원 주변으로도 한 차례 도적 무리가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무장 병력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물러가긴 했습니다만."
코누다이안 내에도 도적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놈들인지, 아니면 영지 내에서 들고 일어난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놈들이 발을 붙이게 둘 수는 없지."
곳곳에서 시끌벅적한데, 코누다이안이라고 어찌 예외이겠는가. 국내의 상황이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쾌한 일일 수밖에 없다.
"영주님께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겠지. 조만간에 군사를 동원하지 않겠느냐."
"쉽지는 않을 겁니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아닙니까.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놈들이니 꼬리를 말겠지요."
그게 문제다. 차라리 규모가 커서 어딘가에 근거지를 두고 그곳을 중심으로 기세를 떨친다면 잘근잘근 밟아버릴 수 있으련만, 잡스러운 것들이 자잘하게 널려 있으니 쓸어버리기가 쉽지 않다.
마치 바닥에 떨어져 바싹 마른 낙엽과 같다. 쓸어서 치우려 하면 잘게 부서져 더 난잡하게 흩어져버린다.
때문에 그것들을 다 치우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생기지 않도록 잘 관리를 했어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사흘 뒤에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느냐."
"그렇겠지요."
막시밀리언이 주최하는 연회가 사흘 뒤에 열린다. 고위 관료라 할 수 있는 자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명령이 내려온 만큼,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당분간은 장원의 세를 반으로 낮추겠다."
"예."
본래도 세율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반으로 낮췄다. 아직 이주민들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난리가 터졌으니, 어느 정도는 배려를 해줘야 했다. 어차피 아직까지는 장원에서 수익을 얻는 것에 그리 마음을 두지 않고 있는 군터였기에 세를 반이나 내리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포레테스 상단주가 장주님을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나?"
"아닙니다. 영주님께서 귀환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시간을 내주시면 찾아오겠다고 합니다."
"또 무슨 부탁할 것이 있나 보군."
"군상으로서 이번 전쟁을 통해 제법 이문을 남겼을 테니, 감사 인사를 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뿐이겠느냐?"
"겸사겸사…가 아니겠습니까."
상인은 대개 욕심이 많다. 욕심이 없는 자가 상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이 세상의 모든 상인들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군터는 그리 생각했다.
이포레테스 역시 상인이고, 마찬가지로 욕심이 많다. 그는 또 한 번, 돈벌이가 될 만한 일을 찾았으리라. 그 일에 대해 협조가 필요하기에 그를 찾는 것일 테고.
이용당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포레테스는 상인이지 거지가 아니니까. 그는 이번에도 거래의 대가로 합당한 값을 치를 것이다.
그러면 된다. 애초 이포레테스와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으니까.
"미룰 필요 없지. 오라고 해라."
"예."
이포레테스와의 일은 잠시 머릿속에서 치웠다. 그는 이제 사흘 뒤에 있을 연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미겔이 전한, 찝찝한 일에 대해서도.
*
"모두들 잘해주었다. 나와 함께 전장에 나갔던 이들도, 내가 없는 동안 이 영지를 잘 이끌어준 이들도. 구별 없이 모두 칭찬해주고 싶구나."
이전에 막시밀리언은 가볍게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그랬던 그의 말과는 달리 연회는 제법 성대하게 열렸다. 가희(歌姬)와 무희(舞姬)들이 수십이나 동원 되었고, 악사(樂士)들은 그 배 이상이었다.
술과 음식 또한 푸짐하게 마련되었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의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의 막을 여는 막시밀리언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더 가벼웠다.
"마음껏 즐겨라. 자네들을 위한 자리다."
연회는 가벼운 분위기에서 시작되고, 진행됐다. 기분 좋게 좋은 말들을 교환하며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었다.
"전하께서 공정하게 공을 따져 보신다면, 영주님께서는 조만간 승작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 말게. 밖에 새어나갈까 우려스럽군."
"아닙니다. 프롱기우스 각하가 제1 공이라면, 밑에서 받친 영주님과 같은 분이야말로 제2 공이라 할 만하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맞소!"
"그럼! 틀린 말이 아니지!"
더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막시밀리언은 그에게 들어오는 가벼운 아부들을 내치지 않고 모두 받아주었다.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보였다. 이 연회를 진정으로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
군터는 모두가 입을 놀리는 가운데, 홀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한 순간. 맞은편 아래쪽, 그처럼 비교적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겔과 시선이 마주쳤다.
미겔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고, 군터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잔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