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닷새 동안 두 차례 도적 무리를 발견했다. 하나는 정찰대와 마주치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쳐버렸고, 다른 하나는 정찰대가 멀찍이서 그들을 발견하고 본대를 이끌고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순식간에 격퇴 당했다.
"이런 놈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군."
한 무관이 포로로 잡힌 도적들 중 한 명을 걷어차면서 중얼거렸다. 효과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칼을 들고 저항을 한 놈들이었기에 다루는 행동이 절로 거칠어졌다. 간혹 묶여서까지 반항적인 눈빛을 보내는 자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다.
"커억! 큭!"
아예 때려죽일 것처럼 두들겨대니, 나머지 도적들은 물론 함께 포박된 도망민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쯤 했으면 됐다. 다리라도 부러지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예. 죄송합니다. 이놈이 시건방지게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본보기를 한 번 보이니 그 다음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겁에 질려서 줄을 당기는 대로 따라오는 포로들을 데리고 막시밀리언군은 부지런히 이동했다.
"이쯤에서 헤어져야겠군."
"그간 각하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나야말로 충실한 군인들을 거느릴 수 있어 기뻤다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보세나."
"예. 그럼."
하나둘씩 다른 영지 소속의 병력들이 떠나갔다. 그러다 종국에는 코누다이안 소속의 병사 육백 가량만이 남았는데, 육백이 조금 넘어가는 병력 뒤에 딸린 포로가 삼백을 넘어 사백에 가까웠다.
막시밀리언도 신경이 쓰였는지 군터와 미트라스를 불러 포로들에 대한 관리를 당부했다.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하게. 도망치려고 하는 놈이 있거든 처음 두어 번 정도는 모두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 좋겠지."
막시밀리언의 말대로 본보기를 보일 기회가 생겼다. 야밤을 틈타 달아나려 한 도적 몇을 끌고 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두들기고, 마지막으로 잔인하게 목을 베니 그 다음부터는 달아나려 하는 자가 없었다.
그렇게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그들은 큰 문제없이 코누다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가신들이 병력을 이끌고 마중을 나왔다.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막시밀리언은 그제야 풀어진 얼굴로 편히 웃었다.
"내가 없는 동안 고생들 했겠군."
"저희가 아무리 고생을 했다한들, 전장에 나가계셨던 영주님에 비하겠습니까."
"위벨. 좋아 보이는군."
영주의 마중을 위해 임지에서 접경지역까지 달려온 위벨의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요 며칠 잠을 설친 걸로는 만들 수 없는, 오래 묵은 만성적인 피로로 보였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이에게 좋아 보인다 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얼굴에 자리한 피로와는 달리 밝은 표정과 맑은 눈을 하고 있는 위벨에게서는 이전에 위글로우에 머물며 머리를 쓰던 때와는 다른 활기가 느껴졌다.
"하하. 그렇게 보이십니까."
"일은 어떤가."
"부담이 큽니다만, 즐겁습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마냥 즐겁기만 해서는 곤란하지. 잘 해야 하네. 그러라고 자네를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니까."
"능력껏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있습니다."
"오. 여유가 늘었군 그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부담감에 짓눌려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군. 그간의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막시밀리언은 배 이상으로 불은 인원을 이끌고 위글로우로 돌아갔다.
"모두 고생들 많았다. 모두들 오늘 하루는 푹 쉬도록 하라. 조만간에 연회를 열겠다. 묵은 회포는 그때 풀도록 하지."
"옛!"
무수히 몰린 인파를 앞에 두고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군터는 멀찍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벨리사와 보리스, 그리고 오라비의 손을 꼭 붙들고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전장에서 돌아와 가족들과 재회하는 것은 기쁘면서도 동시에 가슴 시린 일이다.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다가도, 자신을 보며 웃음 짓는 대신 울고 있는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보게 되면 내가 이들을 울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일말의 죄책감마저 느끼게 된다.
벨리사는 펑펑 울었고, 보리스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그럼에도 눈에서 흐르는 물은 막을 길이 없어 앙 다문 입술이 꽤나 우습게 보였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눈물은 참지 못했지만, 울음은 참았으니 훌륭하지 않은가. 몸은 다 자라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성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대견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데 실비아가 혼자서 다가와 그의 다리를 붙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비인데도 어제도 만난 것처럼 태연히 안아달라고 칭얼댄다.
"빨리 크는군."
혼자 걷지도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재끼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커버렸다. 보리스 때도 그렇지만, 아이들이란 이렇게 빠르게 자라는 것인가. 시간이라는 놈이 이 어린 아이들에게만 몰려간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와아!"
칭얼대는 꼬마 숙녀를 팔로 엉덩이를 받치고 번쩍 들어서 안았다. 몸은 자랐지만 여전히 깃털처럼 가볍다. 이 무게만큼은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아무리 이 꼬마 숙녀가 크게 자란다고 해도 변하지 않으리라.
"돌아가지. 집으로."
험지를 떠도는 삶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말라버린 땅에 생명수가 흘러들었다. 군터는 그들과 함께하고서야 가족들의 뒤편에서 군례를 취하고 있는 살라스에게 눈길을 주었다. 잔잔하게 웃음 짓고 있는 그 역시 보기가 좋았다.
비로소, 군터는 자신이 집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
즐거운 식사였다. 맛 좋은 음식보다도 실은 별 내용 없는 이야기들이, 의미 없는 웃음과 숨소리가 더 감각을 매혹시키는, 여느 때보다 훨씬 긴 식사.
끝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나마 처음에는 다치지 않았느냐는 걱정 섞인 질문들에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는 어떤 말들이 오갔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즐거웠다는 것 하나뿐.
그날 밤. 군터는 간만에 정말 푹 잤다. 창을 넘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을 때 터무니없이 늦잠을 잤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늦은 기상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저녁에 이어 또 한 번 가족들과 다 같이 모여 아침 식사를 마치고, 군터는 살라스에게 간단히 그간의 업무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대수로울 것 없이 잘 정리된 서류를 빠르게 넘기던 와중, 살라스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장주님."
"무슨 일이냐."
"아뢸 일이 있습니다."
"말하면 되지 않느냐."
"공무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장주님께서 아셔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제야 살라스가 하려는 말이 뭔지는 몰라도 제법 진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군터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물었다.
"너답지 않구나. 내가 알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면, 망설이지 말고 그냥 말하면 된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냐?"
"장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감찰대장이 제게 언질을 주었습니다."
"미겔이 말이냐."
"예. 일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내성 거리에서 영주님의 친위병을 목격했다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분명 살라스가 이야기를 했었고, 그는 조사를 할지 말지를 묻는 살라스에게 멈추라고 지시를 했었다.
"…기억나는군."
"감찰대장이 그에 대해 알고 있더군요. 일부러 캔 것인지, 우연찮게 알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점이 뭐냐."
"그간 영주 부인이 회임을 하지 못했던 것. 영주님께서 의도하신 일이라 합니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군터는 가죽이 깔린 푹신한 의자에 몸을 뒤로 젖혀 묻어버렸다. 고개까지 살짝 뒤로 한 채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면서, 그는 잠시 침묵했다.
'어째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해할 수 없다, 였다.
가뜩이나 수하들이 후계자, 후계자 노래를 부르는 판국에 어째서 막시밀리언이 자식 갖기를 원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인위적으로 자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확실한 것이냐?"
"감찰대장의 말로는…그런 기능을 하는 비약(秘藥)이 있다는군요. 사복을 입고 성내를 돌아다니던 친위병은 그 약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러 움직인 것이라 합니다."
"자세하게도 알아봤군. 그놈은 대체 어쩌자고 그런 일을 파헤친 거지?"
"실은 오늘 아침 일찍, 감찰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장주님을 뵙고 싶다는군요. 시간은 장주님께서 편하실 때로 언제든 괜찮다고……."
늦잠을 자는 바람에 늦게 전달 받은 것인가.
군터는 미겔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손을 잡긴 했지만, 음흉하기 짝이 없는 놈이 아닌가.
비밀로 한 일에는 비밀로 할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일을 캔 것이 막시밀리언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가는, 꾸지람 몇 마디 듣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나겠다고 전해라. 시간은…추후에 알리도록 하지."
"예."
그날 오후. 막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군터는 은밀히 그의 집을 찾은 미겔과 독대했다.
"달갑지 않은 일을 굳이 캐왔더군."
"약은 대개 입에 쓴 법이지요. 하지만 먹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병을 키울 수도 있으니."
싸늘한 군터의 쏘아붙이는 말에 미겔은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내가 병이라도 걸렸다는 말인가?"
"걸릴지도 모르지요. 앓고 나면 늦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뭐가 약인지는 알고 있어야 아프더라도 수월히 넘길 수 있겠지요."
"돌려 말할 필요 없다. 듣기로 했으니 부른 것이야. 하고 싶은 말을 해라."
"전장에 갔다 오시더니 더 날카로워지셨군요. 베일 것 같습니다."
"의미 없는 말장난은 그쯤 해두고, 본론으로."
"아아. 그러지요."
미겔이 의자를 앞으로 끌어 당겼다. 아무도 없는, 문도 다 닫힌 방 안에서 미겔은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웃던 얼굴도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했다.
"영주님께서 영주 부인을 버리실 생각인 것 같습니다."
"……."
아침에 살라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곰곰이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런 의도일 것이라고, 정확히는 이런 의도일 수도 있을 거라고 얼추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예상은 예상이고, 직접 이렇게 들으니 새삼 충격이었다. 물론 미겔의 말이 확고한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 안 된다. 영주 부인을 버린다는 건 리에론 가문과 척을 진다는 뜻이 아닌가."
"핑계는 있지 않습니까. 영주님께서 지금 마흔을 넘기셨는데, 벌써 몇 년째 영주 부인께서는 후계를 낳지 못하고 계십니다."
"전에 나왔던 이야기처럼 양자를 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아.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영주님께서는 그럴 생각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무슨 소리지?"
"늦었다는 거지요."
영문 모를 소리에 군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영주님께 애지중지 하는 애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
"그 애첩이 아이를 가진 모양입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세상 밖으로 나올 모양입니다."
군터는 기어이 일그러진 얼굴을 손으로 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