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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90화 (290/1,064)

290화

"이곳은 카물 부족의 땅. 그런데도 순찰자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군……."

"당연하지. 카문인지 카물인지, 진즉 전쟁을 피해서 어디론가 이주해 갔을 거다."

바오룸은 고개를 저었다.

"카물 부족은 자존심이 강하다. 그들이 옮겨가는 것은 말먹이 풀이 다 떨어졌을 때뿐이야. 그들은 싸움을 피해 도망가지 않아."

"그렇다면 전화(戰火)에 휩쓸려버린 거겠지."

"……."

"쳇. 이봐, 애송이.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본국으로 돌아가서는 각별히 행동을 조심하도록 해라. 네가 네 발로 따라온 이상, 이제 넌 더 이상 영주님의 손님이 아니야. 당연히 지금까지의 배려 따위는 없을 거다."

"난 아이가 아니다.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렇게 뻣뻣하게 굴다가 모가지가 비틀릴 수 있다는 거다."

군터는 뒤에서 들리는 할렌과 바오룸의 설전(?)을 듣고 있었다. 가도 가도 변함이 없는 풍경이 조금 시시하게 느껴지고 있던 차, 두 혈기 넘치는 사내들의 말싸움은 심심풀이로 나쁘지 않았다.

'유난히 까칠하게 구는군.'

다만 한 가지 의문인 것은, 바오룸을 대하는 할렌의 태도가 상당히 거칠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도라에서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몇 번인가 바오룸이 할렌에게 덤볐다가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쌓이기 시작한 감정이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할렌은 그 정도로 속이 좁은 사내는 아니다. 그렇다면 바오룸이 문제인 것일까?

'멍청한 놈이긴 해도, 악감정을 가질 정도로 형편 없는 놈은 아닌 것 같았는데.'

처음 마을에서부터 다혈질인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인질로 한도라에 도착한 후부터는 조용히 잘 죽어지내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초원이 아니다. 타칸 연합도 아니지. 베이고르에는 베이고르의 법이 있다. 한동안은 쥐 죽은 듯이 숙여 지내는 게 좋을 거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널 위해 목소리를 내주지 않을 테니."

"거 참 말 많군. 비틀려도 내 목이 비틀린다. 신경 끄지 그래."

"흥!"

'악감정을 가진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쓰이는 건가.'

퉁명스럽게 대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걱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싫어하는 것이라면 저렇게 주절주절 떠드느니 아예 처음부터 말을 섞지 않을 거다. 설마하니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몇 번 치고 받으면서 미운 정이 들기라도 한 것일까.

바오룸은 그의 부족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베이고르로 가고 싶다고 자처해서 요청했다. 막시밀리언은 어째서인지 그것을 허락했고, 그를 군터로 하여금 데리고 움직이게 했다. 같은 초원인 출신인 만큼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초원에서 태어났다 뿐이지, 군터는 제국과 베이고르에서 성년의 모든 세월을 보냈다. 어렸을 적의 기억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 그의 초원 출신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

말은 통할지언정, 동질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바오룸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바오룸."

"…말하시…아니, 말씀하십시오."

습관적으로 짧게 말하려다가 주변에서 따가운 시선들이 날아들자 바오룸은 재빨리 말을 고쳤다. 그는 대가 약한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쇠심줄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용기와 무모함의 차이를 알고 있기도 했다. 그는 사나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저 커다란 사내는 함부로 할 자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조금 늦은 물음이긴 하지만 묻지. 왜 따라왔나?"

무뚝뚝한 물음에 바오룸이 슬쩍 입매를 비틀었다.

"당신은 내가 따라온 것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오."

"달가울 이유가 있나?"

바오룸은 즉시 날아든 반문에 딱히 부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 거 아니오.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소. 겸사겸사 아버지의 소식도 들을 수 있을까 싶었고."

"앞뒤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내 아버지는 나약한 사내가 아니오. 싸움터에서는 물러나는 법이 없지.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셨고, 내게도 그리 가르치셨소. 전투에서 졌다면 죽었거나, 거동도 못할 정도로 크게 다쳤겠지. 아마 돌아가셨을 거요."

죽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이 초원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전사의 삶이다. 전장에 나선 군인과 같이, 죽음은 늘 그들의 가까이에 있다.

"그러니 크게 기대는 하지 않소."

"후계자라고 하지 않았나."

"동생이 있소. 어리지만 나보다 똑똑한 녀석이지. 녀석이 내 몫까지 할 수 있을 거요."

무책임 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제3자가 이런 것을 꼬집고 늘어지는 것도 웃기는 일이니.

"어른들이 말하길, 대족장은 신의 사도라고 했소. 나도 그렇게 믿었지. 그는 나만한 나이에 족장이 되었고, 여덟 개 부족을 통합했으며 두 해가 지난 뒤에는 수만 명에게 대족장이라 불렸으니까. 그가 우리를 따뜻한 땅으로, 번영으로 이끌 것이라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소."

직접 군대를 이끌면 전승이요, 마주하는 적마다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처음에는 신의 사도라 불렸으나, 나중에는 신의 현신이라고까지 일컬어진 사내가 타르가이 베르겐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패하여 죽었다?

믿기 힘들었다. 한도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대족장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편안한 얼굴인 베이고르군을 보면서 그게 사실임을 머리로는 이해했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대족장은 정말 신의 현신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믿기지 않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무서우면서도 궁금해졌다. 이 베이고르라는 자들은 어찌하여 그 대족장을, 용맹한 초원의 전사들을 쓰러뜨린 것일까?

그는 어른들로부터 베이고르는 허약한 주제에 머리만 굴려대는, 쓸모없는 놈들이라고 들었다. 단지 큰 적에 맞서기 위해 잠시 어린 아이 손이라도 빌리는 심정으로 두고 있을 뿐, 때가 오면 자연히 처리할 놈들이라고.

그런데 그런 놈들에게 대족장이 죽고, 초원의 전사들이 패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굴었던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였던 걸까?

알고 싶어졌다. 과연 이 베이고르라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지.

"……."

군터는 어쩐지 다소 상기된 것 같은 목소리가 조금 의문스러웠으나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알고 있겠지만, 단독 행동은 금지다. 어딘가로 움직이고 싶을 때는 반드시 내 허락을 구해라."

"알겠소."

혹시 몰래 움직이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할렌을 비롯해서 미리 지시를 내린 병사들이 번갈아 그를 감시할 테니. 거기에 여차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도 좋다고 따로 말해놓기까지 했다. 지금의 이 경고를 무시한다면 손해는 바오룸 그 자신이 치르게 되리라.

*

귀로에 오른 막시밀리언군은 한 무리의 인파와 조우했다. 초목이 드문 개활지를 지날 무렵이었다.

먼저 발견한 것은 앞서 움직이던 정찰병이었다. 보고를 받은 막시밀리언은 즉시 병사들을 움직였다. 군터가 이끄는 기병이 가장 먼저 움직여 상대의 배후를 점해 퇴로를 끊고, 미트라스가 이끄는 보군이 좌우에서 좁혀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막시밀리언은 본대를 이끌고 정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구, 군대다!"

상대는 타칸 연합의, 패전하여 흩어진 잔당이 아니었다. 또한 도적도 아니었다. 그들은 헐벗고, 상당한 기간 동안 굶주림을 참은 것처럼 보이는 초라한 행색의 민간인들이었다. 손에는 조잡한 농기구와 갖가지 물건들을 무기처럼 들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그마저도 곧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두려움에 젖어서 자신들끼리 똘똘 뭉쳤다. 그런다고 눈앞의 병사들이 저절로 물러가주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도적 떼로 보이지는 않는군. 뭐 하는 자들이냐."

"나, 나리! 저희는 베이고르의 백성들입니다!"

"믿기 힘들군. 그렇다면 영지민들일 텐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돌아다니고 있느냐?"

"그, 그것이……."

구구절절한 사연이 흘러나왔다. 이리저리 돌리는 이야기가 절절한 목소리에 실려 길게 이어졌지만, 막시밀리언은 대표로 나선 중년인의 말을 불같은 노성을 내지르면서 칼 같이 끊었다.

"결국은 무단으로 영지를 이탈한 놈들이라는 뜻이 아니냐! 미트라스 경! 이놈들을 모두 포박하라!"

"옛!"

막시밀리언은 중년인의 변명은 듣지도 않고 곧장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미트라스가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제압했다. 이미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해 있던 이들은 억센 병사들에게 반항하지 못했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사내들이 고함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그 말로는 비참했다.

"저항하는 놈은 모조리 죽여라! 죄인들에게 베풀 인정 따위는 없다!"

몇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가뜩이나 꺾였던 기세는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도망민들이 촘촘하게 묶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를 모두 베어버린다 해도 별 문제될 것은 없다만, 기분 좋은 귀로에 피를 뿌리고 싶지는 않기에 참겠다."

갑자기 포로가, 그것도 발걸음이 느린 도망민들이 잔뜩 생겨버려 행군 속도가 줄어들었지만 어느 정도 지위가 되는 지휘관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축에 속하는 한 무관은 은근슬쩍 막시밀리언에게 말을 걸었다.

"이건 뜻밖의 횡재로군요."

"뭐, 그렇군."

베이고르는 수많은 영지로 쪼개진다. 그 영지에는 각각 주인이 있다. 그 주인들이 바로 영주다.

마찬가지로, 베이고르의 백성들은 많은 영지민으로 분류된다. 각 영지민들은 해당 영지의 영주에게 소속된 자들이다. 따라서 영주의 허가 없이는 영지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허락 없이 영지 밖으로 나간 영지민들은 도망민으로 간주 되어 처벌의 대상이 된다.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본래대로라면 저 도망민들을 하나하나 그들의 소속 영지로 돌려보내는 것이 맞다. 영지민들과 마찬가지로, 도망민들의 소유권 역시 해당 영지의 영주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냥 잡아다가 어디 노예로 팔아버린다 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주인(영주)이 어찌 알겠는가? 혀라도 잘라 놓으면 자신이 어디서 온 누구라도 말도 하지 못할 테니, 그렇게 한다 해도 문제가 될 일은 없다.

"말하는 것을 보면 여러 영지에서 흘러나온 놈들이 복잡하게 뭉친 것 같은데, 저것들을 일일이 돌려보내는 일은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지 않겠습니까. 갈 길도 바쁜데 말이지요."

"맞는 말이네. 또한, 폐허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도시에서 시간을 죽였던 보람도 챙겨야겠지."

"역시 코누디스 남작님이십니다."

"저것들을 나누는 것도 곤란하겠지. 자네들의 몫은 내 적당히 챙겨주도록 하겠네."

"저희야 남작님께서 내려주시는 대로 감사히 만족하겠습니다."

현재 막시밀리언이 이끌고 있는 군대는 순수한 코누다이안의 병력이 아니었다. 프롱기우스 백작이 그에게 한도라의 임시 사령관 직을 내리면서 같이 맡기고 간 네 개 영지의 병사들이 섞여 있었다. 그렇기에 막시밀리언은 저 도망민들을 그가 차지하는 대신 현물로 대가를 치르기로 했다.

"비참하군."

바오룸은 제국어를 알지 못했기에 도망민들의 대표와 막시밀리언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포로처럼 묶인 저들이 정확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분위기로 대강 짐작하여, 별로 유쾌한 사정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할렌은 입을 열지 않았다.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희망의 불씨를 잃고 시체의 그것 같은 눈을 한 도망민들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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