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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89화 (289/1,064)

289화

꼬박 두 달이 지났다. 초반에 바쁘게 부족들 사이를 누비던 일도 시들해지자 이후의 시간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이 군터는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수하들과 함께 순찰대로서 열심히 도시 밖을 누볐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그니스 체스퍼와의 사투로 인해 망신창이가 됐던 몸이 회복이 되고 난 후에는 전보다도 더 그런 경향이 심해진 것 같았다.

그야말로 한계를 넘어선 지경까지 치달았다가 갑작스레 평온함을 누리려니 몸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순찰을 명목으로 거의 열흘에 여드레 이상 밖을 돌아다녔다. 내쉬를 보내고 난 후에 임시로 맞은 새로운 짝에게 적응도 할 겸 해서였다.

그런데 이 새로운 짝은, 내쉬에 비해서 너무나 허약했다. 그래도 고른다고 고른 녀석이었는데도 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내쉬는 어디 가서도 명마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의 녀석이었다. 체구면 체구, 힘이면 힘. 순발력이면 순발력. 거기에 뚝심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그의 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객관적으로 봐도 완벽한 녀석이었다.

그에 반해 이 녀석은, 그럭저럭 괜찮은 군마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뿐이었다.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거 아닙니까?"

"뭐가 말이냐."

"그렇게 갈기를 쓰다듬으면서 못마땅한 티를 내고 계시면, 누구라도 장주님의 마음을 알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

"아직 이름도 붙이지 않으셨지요?"

"붙일 생각 없다. 앞으로는 더 나은 녀석을 맞아도 붙이지 않을 생각이다."

"예? 어째서요?"

"지쳤다."

"그게 무슨……."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할렌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쿠센이었고, 내쉬였다. 어차피 이 녀석도 내가 달리는 만큼 나와 함께 해주지 못하겠지. 결국 또 다시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덮게 될 터인데, 그것도 못할 짓이지."

"……."

"그런 식으로 마음 쓰는 것에 지쳤다. 그리고…꼭 이름을 붙여야만 교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음…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만."

"이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른다."

아무렇게나 쏟아낸 것 같지만, 그 속에서 단 한 가지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쳤다는 것.

마음을 쏟은 만큼, 의지한 만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지대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겪고 나니 세 번은 바라지 않게 된다. 그것은 눈앞의 이 녀석이 앞선 두 녀석에 못 미쳐서가 아니었다. 그저 세 번째 녀석에게 나눠줄 마음이 남아있지 않을 뿐.

*

"이것 좀 보세요 부인."

"어머! 정말 아름답습니다. 한 번도 이런 것은 본 적이 없어요."

"우연찮게 내게 들어온 물건입니다만, 부인께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제게요? 감사하지만, 제가 이런 것을 받아도 될지……."

"부담 갖지 마세요. 벗에게 이런 선물 하나 하지 못한답니까."

"그럼…감사하게 받겠습니다."

그 뒤로도 두 여인의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요 근래에는 거의 매일 만나는데도 만날 때마다 저렇게 화기애애하고 웃음이 많다.

두 여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정원 한 가운데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경호를 서고 있던 살라스는 여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속이 답답함을 느꼈다.

'단짝이 따로 없군.'

전부터 어울리던 사이이기는 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정말로 가까워졌다. 카트리나 코누디스와 벨리사는 둘이 남녀였다면 한창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붙어 다녔다. 못해도 열흘에 여덟 번 이상은 만나는 듯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좋지 않은데.'

영주 부인의 입지는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상태다. 나이가 마흔이 넘은 영주가 전장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가신들의 불안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여 후계가 없는 상황에서 영주가 돌연 전사라도 해버린다면 코누다이안은 그대로 허공에 붕 뜨는 상태가 되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이런 불안은 자연히 이제껏 후계자를 낳지 못한 영주 부인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고,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런 분위기가 조성됨으로 인해 영주 부인의 안색은 나날이 어두워져갔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의 벗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벨리사가 유일했다. 만남의 횟수가 점점 더 늘어갔고, 영주 부인이 벨리사를 만나러 직접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녀의 이런 행동이 정치적 행위인지, 아니면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감정에 의한 행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정말 탁월한 거짓말쟁이와 연기자가 아닌 이상에야 후자라고 보지만……. 지금 같은 때에 벨리사가 영주 부인과 깊게 엮이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은 아니다.

'이런. 내가 또 주제넘은 생각을.'

잠깐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살라스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장주 부인이 누구와 사귀건 그가 개입할 이유는 없다. 아니 이유보다는 권리가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그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전장에 나가 있는 장주의 대리로서 그의 식솔들을 지키고 그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뿐이다. 그 외의 것까지 신경 쓰는 것은 그야말로 오만하고 주제넘은 짓.

'너무 많이 보고 들은 모양이군.'

군터는 미트라스와 더불어 코누다이안의 군부를 양분하는 거물이다. 그런 그가 영주와 함께 전장에 나갔으니, 기존 그의 업무는 대리인 살라스에게 돌아왔다. 그런 업무를 보다보니 이래저래 관리들과 만날 일이 많아졌는데, 그들로부터 한 마디 한 마디를 듣고 여러 가지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그들의 분위기에 물이 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닮아간다고 해야 할까.

'버겁구나.'

이래저래 신경 쓸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그가 모시고 있는 군터의 지위가 올라간 만큼, 대리로서 해야 하는 일도 더 크고 무거워졌다.

문득 버겁다는 말을 떠올리니, 아마 지금 이곳에서 누구보다도 더 그러할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겉으로는 즐겁게 웃고 있지만, 그 안에 무슨 상처와 감정들이 가라앉아 있을지는 당사자 밖에 모르리라.

'비운의 귀부인인가. 딱한 여인이군.'

리에론 가의 여식이며, 영주 부인씩이나 되는 여인에게 가질 생각은 아니지만…그래도 이렇게 나름대로 지위를 갖추고 높은 사람들을 만나며 보고 있자니 신분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나름의 고충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때로는 같은 문제를 두고도 가진 게 많은 자들이 가진 것 없는 이들 보다도 더 속을 끓이는 경우도 많다.

무거울수록 구르거나 떨어졌을 때의 충격이 크기 때문이겠지.

'흠. 이 또한 주제넘은 생각이 아닌가.'

어찌 되었든 영지에서 두 번째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다. 그가 속을 헤아려볼 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부인들께서 이야기를 끝내시면 영주 부인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확인해라. 그리고 만약 마님께서 저택 밖으로 나가신다 하시면 조 전체가 호종하도록."

"옛."

되도록 어제처럼 직접 챙기고 싶었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었다. 음흉한 감찰대장이 만나기를 요청한 것이다. 업무상의 관계도 그렇고, 여러모로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라 시간을 낼 수밖에 없다.

껄끄러운 자를 만나러 향하는 살라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

기다리던 왕명이 드디어 내려왔다. 왕의 친서는 영지로의 귀환에 대한 명을 담고 있었고, 공에 대해 치하하는 말도 같이 적혀 있었다.

"길었군."

왕의 친서를 수하들이 볼 수 있게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막시밀리언은 홀가분한 얼굴을 한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한도라에 뿌리를 박을 것처럼 능숙하고 편안하게 사령관 직무를 수행했던 막시밀리언도 속으로는 돌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하기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도시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에 그 누가 익숙해질 수 있겠는가. 그것도 숱한 죽음이 흘렀던, 밤중만 되면 괜히 오싹하기까지 한 곳에서 말이다.

"귀환 예정일은 열흘하고 사흘 후다."

교대를 위해서 무슨 자작인가가 온다고 했다. 그가 얼마 정도 병력을 이끌고 올 것이며, 그가 도착하는 대로 일부가 먼저 귀로에 오르게 될 것이다.

"두 번으로 나누어 움직이라고 한다. 병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군."

막시밀리언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내용을 생각해보면 꽤나 섬뜩한 말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왕의 의심을 받는다는 뜻이니.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모르는 일이지. 지금 같은 시국에 이 정도 정병을 보유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질 수도 있지 않은가. 뭐,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교대 병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고."

이 도시에 남은 병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이천 남짓이다. 아무리 시국이 혼란하다 해도 왕이 이천 병력을 크게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았다. 보다 그럴듯한 이유는 아무래도 후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막시밀리언이 전자와 같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조심하라는 뜻이네. 전투가 끝났다고 해서, 당장의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긴장을 풀었다가는 눈 먼 칼에 찔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있던 막사 내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너무 진지해질 필요는 없고. 적당히 주의만 하라는 것이야. 어찌 됐든 기쁜 날이군. 언제까지 이 심심한 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어야 하는지 답답하던 차였는데 말이지."

모두의 얼굴을 무겁게 만들고 나서, 정작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활짝 얼굴을 폈다. 도무지 장단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하여간 막시밀리언의 말마따나 기쁜 날이었다. 그날 막시밀리언은 조촐한 연회를 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술을 거의 모두 동원한, 한도라에 머물게 된 이후 즐기는 가장 큰 연회였다.

"술만 있는 게 아쉽군요."

"부족하면 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미트라스와 군터가 간만에 이야기를 나눴다. 일전에 막시밀리언의 양자 건을 계기로 다소 불편한 관계가 된 이후, 그들의 사이는 지금까지 줄곧 어색했었다. 하지만 기쁜 날을 맞아, 술의 힘을 빌려 간단하고 짤막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인근에 수백 명 단위 부족이 다섯이나 있지 않습니까. 계집들도 꽤 많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관심을 접는 게 좋소. 초원의 부족에게 여인은 말만큼이나 귀중한 재산이니까. 부족 내에서 도는 것이면 모를까, 외부인에게 내보일 일은 없지."

"호오. 그렇습니까? 몰랐던 사실이군요."

초원에서 여인은 귀하다.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있고, 기를 수 있으며, 사내에게 즐거움까지 준다. 또한 초원의 거친 생활 속에서 쉽게 수가 줄기 때문에, 건강한 여인은 빼어난 말과 동급의 가치를 갖는다. 그렇기에 부족 간에 약탈이 발생할 때 가장 많이 약탈당하는 것이 말과 여인이었다.

그런 만큼 초원의 부족들은 여인을 귀하게 여기고, 지키려 한다. 만약 외부인인 자신들이 그들에게 여인을 요구했을 경우, 막시밀리언이 공들여 만들어놓은 관계가 어그러질 것이다.

"아쉽군요. 하하하."

"술은 술 그자체로도 좋지."

"그것도 그렇지요."

기쁜 날이었다. 거기에 술까지 곁들여지니 평소보다 마음이 한결 누그러들었다. 그래서인지 보통 때는 말도 잘 섞지 않던 이들과도 원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열흘하고 사흘 뒤.

예정되었던 대로, 베이고르의 깃발을 든 일단의 병력이 한도라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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