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네놈은 뭐냐!"
바오룸은 막아서는 할렌을 향해 냅다 칼을 휘둘렀다. 제법 날카로운 공격을 할렌은 비스듬히 창을 찍어내며 받아쳤다.
불똥이 튀고, 말이 울부짖었다. 바오룸은 충돌 직후 몸을 굴리며 말발굽을 피했다. 네 걸음 정도로 좁혀졌던 거리는 다시 열 걸음에 가깝게 멀어졌다. 그 사이 병사들이 막시밀리언의 주변을 단단한 껍질처럼 둘러쌌다.
"괜찮으니 물러서라. 앞을 가로막으니 보이질 않는구나."
"하오나 영주님."
"괜찮대도."
짧은 실랑이 아닌 실랑이 끝에 병사들이 어쩔 수 없이 틈을 벌렸다. 그 사이에도 할렌과 바오룸은 치열하게 맞붙고 있었다.
아니, 실은 치열하게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할렌이 일방적으로 바오룸을 몰아붙이고 있었고, 바오룸은 그저 열심히 땅을 구르고 몸을 날리며 피해내기 급급할 뿐이었다.
"구르는 재주밖에 없는 놈이 대체 뭘 믿고 나선 거냐!"
"헉, 헉! 이…이 비겁한 놈!"
"뭐라고?"
할렌이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멈춰 섰다.
바오룸이 흙투성이로 엉망이 된 몸을 일으켰다.
"네놈이 내 앞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건 단지 네놈이 말 위에 올라있기 때문이다!"
"크크크."
할렌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까…내가 말에 타고 있는 게 불만이다 이거냐?"
"말에서 내린다면, 아니면 내가 말에 타고 있다면 네놈이 내게 그렇게 오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오냐. 좋다. 한 번 보자."
할렌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렸다. 뿐만 아니라 들고 있던 창을 거꾸로 땅에 박았다. 이제 그는 맨손이었다. 그리고 보란 듯 양 팔을 벌렸다.
"흐음. 괜찮겠나? 도발에 넘어간 것은 아닌가?"
막시밀리언이 물었다. 뒤편에 있던 군터가 말을 받았다.
"괜찮을 겁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바오룸이라는 애송이는 확실히 몸이 날래고, 힘도 좋은 것 같았지만 경험이 없는 것이 티가 났다. 그에 반해 할렌은 노련하다. 다소 흥분한 것 같기는 하지만, 감정에 휩쓸려 무모한 짓을 저지를 녀석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닮았군.'
처음 할렌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사나운 살쾡이 같았던 녀석. 노예가 되고서도, 자유를 얻어 병사가 되고서도 그 특유의 욱하는 성미 때문에 여러 번 손해를 봤던 할렌은 이제 없다.
아니다 다를까, 할렌은 맨손으로도 바오룸을 여유롭게 상대했다.
내려치는 칼을 한 걸음으로 피하면서 손날로 목젖을 쳤다. 뒷걸음질 치는 바오룸을 길게 걷어차 쓰러뜨렸다.
"이이익!"
그럼에도 바오룸은 곧바로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할렌은 칼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순간에도 차분하게 기다렸다가,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돌리며 칼을 쥔 팔을 낚아챘다. 그리고 달려드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메쳤다.
"커억!"
이번에는 충격이 컸는지, 바오룸은 일어나지 못하고 숨만 컥컥 토하며 몸을 떨었다. 할렌은 그런 그의 가슴을 짓밟으며 그의 손에서 칼을 뺏어 들었다.
"자. 이제 뭐라고 말할 테냐. 입만 산 놈아."
"으그으윽……!"
칼날이 목 앞에 닿았음에도 바오룸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으나 눈에는 살기를 담아 할렌을 노려보았다.
"독한 놈이구나. 그뿐이지만."
가슴을 밟은 발에 더 힘을 주어 눌렀다. 바오룸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더 커졌다. 부족민들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할렌은 막시밀리언의 명령을 기다렸다.
"용서해 주시오! 녀석의 아비, 우리의 족장은 대족장을 따라 전장으로 향했소."
아비가 대족장과 함께 하고 있으니, 대족장이 죽었다는 말이 아비의 죽음에 대한 선고처럼 들렸던 것이다. 흥분할 만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전에 바오룸이 보인 무례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베이고르의 영주다. 또한 임시지만 한도라의 사령관직을 겸하고 있기도 하다. 내게는 이 근방을 관리할 의무가 있고, 이런 나의 권위는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 내려주신 것이다. 치기어린 젊은이라고는 하지만, 칼을 들고 내게 덤벼든 이상…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노인장도 이해하리라 믿네."
"하, 하지만……."
"난 지금 최대한의 양보를 하고 있는 것이야.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저 애송이의 죄를 자네들에게도 함께 물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걸세.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만 책임을 묻고, 그것으로 끝내려 하네. 혹여 내게 이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너무 몰염치한 행태가 아닌가."
"부디…온정을 베풀어주십시오. 승자의 너그러움을 바랍니다."
노인이 무릎을 꿇었다. 뒤편의 부족민들의 동요가 더 심해졌다. 그들 중 일부가 앞으로 나와 노인을 붙들었다. 그래도 노인은 꿈쩍 하지 않았다.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군. 그대와 저 애송이의 관계가 어찌 되지?"
"내 딸의 자식이오."
"아하. 외손인가."
막시밀리언이 턱을 쓸며 고민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는 찌푸린 눈을 하고서 할렌의 발아래 쓰러져 있는 바오룸과 노인을 번갈아 보았다.
"좋아. 내 체면이 깎였지만, 그럼에도 용서하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대신, 자네와 자네의 부족이 나를 도와주어야겠네."
환해졌던 노인의 얼굴이 도로 굳었다. 무언가 커다란 대가를 요구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도움이라면?"
"어려운 일은 아니네. 저기 저 애송…아니, 젊은이처럼 아국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지 않겠나. 이 부족에도 그렇고, 다른 부족에도 아마 없지 않겠지. 그들을 잘 설득해 줬으면 하네."
"그러겠소.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아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젊은이는 나와 함께 한도라로 갈 걸세."
"그, 그게 무슨……."
"오해를 하고 있다면, 그 오해를 풀어줘야겠지. 가까이에서 아국을 보게 하고, 우리가 적이 아님을 알게 하겠네.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 약속하지. 절대로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이라는 한 마디조차 노인의 귀에는 공허하게만 들렸을 것이다. 꾸미는 말은 길었지만, 결국은 바오룸을 인질로 잡아가겠다는 말이었으니.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용서하겠다는 말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바오룸의 목 앞에 머물고 있는 칼날과, 서슬 퍼런 기세를 드러내고 있는 병사들 앞에서 이 제안을 가장한 요구를 어찌 물리친단 말인가.
"…그리 하시오."
노인은 입술을 씹으면서도 막시밀리언의 요구에, 승자의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
세겐티옐을 포함하여 한도라 부근에 거주하는 다섯 부족은 전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전사들은 모두 전쟁에 동원되었고, 남은 것은 아이와 여인, 노인들뿐이었던 것이다.
인질로 잡혀온 바오룸 역시 본래는 전쟁에 참전할 예정이었으나, 전쟁 준비를 앞두고 있던 와중에 갑작스레 병을 얻는 바람에 함께 따라가지 못했다고 했다. 바오룸 개인은 그것을 무척이나 분해했으나, 세겐티옐 부족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부족장의 자리를 두고 혼란이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라고는 해도, 그런 놈이 부족장의 자리를 잇는다면 그게 더 비극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틀림없습니다. 제 기분대로 설치는 놈이 어떻게 무리를 이끌겠습니까. 영주님께서 온정을 베풀어주셨기에 망정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그놈 하나가 아니라 그들 부족 모두가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던 일 아닙니까."
할렌은 바오룸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막시밀리언은 바오룸을 귀빈으로서 대접했다. 그래봐야 넘쳐나는 빈 집들 중에 쓸 만한 것을 내어주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준 것에 불과했지만, 어찌 되었든 현 상황에서 인질에게 해줄 수 있는 배려는 최대한 해준 셈이었다.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더군."
"그렇겠지요.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을 테니."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한도라로 들어온 바오룸은 처참하고 을씨년스러운 한도라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중에 한도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를 들은 후에는 더욱 그랬다.
"학살의 현장이 아닙니까. 못해도 수만은 죽어나갔겠지요?"
"그렇겠지."
뒤늦게 와서 직접 치운 시신만 수천 구는 될 것이다. 그 전에 다른 병력이 먼저 들어와 치운 것과, 그보다도 전에 제국군이 불태우고 어쩌고 한 것을 합치면…못해도 수만은 되지 않겠는가.
"아그니스 체스퍼 장군은…정말 악령에게 홀리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그럴지도."
전투에서 수만의 적을 죽이는 것과, 저항할 수 없는 민간인 수만을 죽이는 것은 다르다. 혹자는 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목숨이 아니냐고 반박 할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그 둘은 분명히 다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수백이 넘는 생명을 거둔 군터로서도, 이 자리에서 벌어졌을 참극을 떠올리면 조금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오래 전, 내키지 않는 노예사냥을 했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영주님께서는 최대한 피를 흘리지 않으려 하시겠지요?"
"되도록 그럴 생각이신 것 같다."
막시밀리언은 다섯 부족을 차례로 돌면서 얼굴을 비췄고, 그들의 대표를 한도라로 초대하기까지 했다.
초대를 받은 부족의 대표들이 한도라로 와서 받은 충격은 바오룸과 같았고, 그런 그들에게 막시밀리언은 이곳에서 있었던 참상을 직접 보기라도 했던 것처럼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그는 베이고르에 향해 있는 분노와 공포를 텅 비고 파괴된 한도라를 이용해 은근슬쩍 제국에게 돌려놓았다.
그것은 냉정하게 보면 제법 노골적인 시도였지만, 그럼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다섯 부족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최근 이 주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처음 피해서 도망쳐야 했던 적은 베이고르군이 아니라 제국군이었고, 그들은 제국의 국기가 올라간 한도라에서 피어올랐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 전, 도시 밖 멀리서도 뚜렷하게 들렸던 무수한 비명소리들 역시.
"이미 타칸 연합의 전역에 타르가이 바르겐의 추종자들이 발붙일 곳은 없네. 그러니 자네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면 되네.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최대한 자네들의 편의를 봐 주도록 하지."
"감사한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막시밀리언은 다섯 부족과 충돌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보급으로 들어온 것들 중 일부를 내어 그들에게 베풀기도 했는데, 그런 그의 노력은 조금씩이나마 먹혀들어가는 듯했다.
처음에는 한도라 근처에는 얼씬거리는 것조차 꺼려하던 다섯 부족민들이 이제는 근처로 순찰대가 지나가도 피하지 않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한도라와 인근의 공기가 풀어지는 사이, 베이고르 본국에서는 끝나지 않은 전란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