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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87화 (287/1,064)

287화

본국의 소란은 곧 멀찍이 나와 있는 군대에까지 전해졌다. 본국에 인편을 쓰던 이들부터 알음알음 알기 시작했고, 왕도로부터 온 전령이 정확한 본국의 상황을 전하면서 소란의 진상이 명백히 밝혀졌다.

그 내용은 며칠 전에 군터가 살라스의 답신으로 접한 것과 거의 같았다. 도적들이 창궐하고,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자의 경우는 아직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국왕 전하께서는 대대적인 징집령을 내리셨습니다."

처음이 아니다. 이번 전쟁을 치르면서도 이미 한 차례 민간인들을 끌고 와 칼을 쥐어준 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10만 여의 군세가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그간 베이고르는 국가적 차원에서 큰 실정을 범한 적이 없었다. 본래 이 땅을 다스리던 주인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한 차례 몰락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나라가 어렵사리 다시 선 것인 만큼 베이고르의 권력자들은 되도록 안정적으로 지배자로서의 권위와 권리를 공고히 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무리를 하니 자연히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징발도 징발이지만, 징집이 최악이었다. 물자를 빼앗기는 것과 가족, 이웃을 빼앗기는 것은 와 닿는 정도가 크게 다른 법이다.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했지만, 그래도 베이고르는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사히 지나갈 수가 없게 됐다. 민심은 이미 들끓기 시작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징집령을 내렸으니 앞으로도 좋아지기는 힘들 것이다.

"속전속결만이 답이다. 길게 끌게 되면 여러모로 곤혹스러워질 것이다."

"제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군터가 물었고, 막시밀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은 진압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보신에 집중하던 제국의 무리가 갸웃거리기 시작하면…그때부터는 곤혹스러운 것을 넘어…어쩌면 파국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혼란을 틈타 입지를 다질 계획을 가진 막시밀리언이었지만, 그런 그로서도 제국의 개입은 논외였다. 그의 모든 계획은 어디까지나 제국이 머리를 잃고 혼란에 빠져 바깥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짜인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제국이 베이고르의 혼란을 틈타 본격적으로 군사를 움직이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위로 올라가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에 돌입해야만 한다.

"제국은 그럴 여력이 없을 겁니다. 황위 쟁탈전의 여파가 제국 전역에 미치고 있지 않습니까. 출정을 명할 정부조차 없는 상태인데, 지방관이 독단으로 아국을 도모하려 들겠습니까."

"나도 그리 생각하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어. 면밀히, 주의 깊게 제국의 동향을 살펴야 할 것이야."

본국에서 들어오는 소식은 하나 같이 우중충한 것들뿐이었지만, 반대로 타칸 연합의 영토를 휘젓고 있는 프롱기우스 백작의 4군단은 연일 낭보를 전해왔다. 오늘은 이곳을 점령하고, 내일은 잔당 얼마를 섬멸하고, 또 그 다음날은 다시 또 다른 어딘가를 점령하는 식이었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대범하게도 군을 다섯 갈래로 나누어 운용했는데, 그 다섯 개의 군이 번갈아가며 전공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마무리 작업만 마치면 4군단도 말머리를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때까지 큰 일이 벌어지지만 않는다면…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당장의 소란은 가라앉을 것이다."

당장의 소란은 가라앉는다. 이 말을 베이고르를 뒤덮은 소란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뜻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마냥 억측이라고 단언할 수만은 없으리라.

*

프롱기우스 백작은 순조롭게 그의 임무를 수행해나갔고, 오래지 않아 제국과 맞닿은 국경의 끝에까지 베이고르의 깃발을 꽂는데 성공했다. 본국의 상황을 아는 만큼, 다소 서둘러 움직인 감이 엿보이는 신속함이었다.

임무를 마친 그는 점령지를 방어하고 혹 남아있을 잔당들에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놓고서 곧바로 본국으로 회군했다. 그 와중에도 막시밀리언은 계속해서 한도라의 임시 사령관으로서 자리를 지켰다.

대신 그에게는 더 많은 임무가 주어졌는데, 지금까지처럼 한도라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근 지역까지 통째로 관리하게 되었다. 병력은 그대로인데 할 일은 배 이상으로 늘어났으니, 회군길에 오르지 않았다 해도 막시밀리언은 마냥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일단은 초원인들의 민심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다."

임무가 맡겨지자마자, 막시밀리언은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타칸 연합민, 이제는 그저 초원인이 된 그들은 대부분 거주지를 옮기지 않고 그들의 마을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그들이 베이고르군에게 크게 겁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개전초기부터 베이고르군이 일관되게 보여 온 태도에 있었다.

그들은 맞선 적에게는 인정사정없이 싸웠지만,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에게는 최대한 손을 대지 않았다. 이것은 베이고르가 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 세운 방침이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고 나면 땅은 넓어지고, 그 땅에서 살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타칸 연합의 백성들을 되도록 끌어안는 것이 베이고르에게는 이득이었다. 물론 그로인해 적지 않은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유화책에는 그런 부담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일단 작게는 그들을 끌어안음으로써 추후 발생할지 모를 저항 세력들의 싹을 꺾을 수가 있고, 크게는 장기적으로 그들이 모두 베이고르의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베이고르에서 내세운 전쟁의 명분은 어디까지나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의 폭거였다. 동맹으로서의 신의를 저버리고 군사 도발을 일삼아 베이고르를 자극했으며, 거기에 더해 자국민에 대한 폭정까지 행하는 폭군 타르가이 베르겐에 대한 단죄. 실상은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그것이었고, 따라서 이번 전쟁에서 베이고르의 적은 타르가이 베르겐과 그를 따르는 군대였지 타칸 연합의 백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다소 낯 뜨거운 말이지만 베이고르의 우방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우방으로서 그들을 감싸 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을 베이고르의 울타리 안으로 들이는 것이 베이고르가 그린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타르가이 베르겐이 자국민들에게조차 신망을 잃을 정도로 폭정을 거듭해준 덕에 수립이 가능했던 계획.

다행스럽게도 그 계획은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순조롭게 먹혀 들어가는 듯했다. 초원인들이 베이고르를 속으로 두려워는 할지언정, 도망치거나 맞서지 않는 것이 그 증명이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수하들의 우려를 막시밀리언은 가벼운 웃음으로 일축했다.

"무엇이? 우리가 한도라에서 깃발을 올렸을 때, 저들은 덤벼들지 않았다. 그것은 곧 굴종을 뜻하는 것. 저들은 이미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인정했네. 이제 와서 뒤늦게 덤벼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막시밀리언은 군터와 미트라스, 그리고 그의 친위대를 비롯한 소수 병력만을 대동하고 한도라 주변 지역을 순회했다.

한도라에서 이틀거리 내에는 파악된 바로 총 다섯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모두 비슷한 규모의, 인구가 삼사백 정도가 되는 고만고만한 중소규모의 부족들이었다.

그 중 하나인 세겐티옐이라는 이름의 부족. 지금 막시밀리언이 보러 가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백 명 정도 되는 병력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접근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막시밀리언 일행이 도착했을 때는 부족민들이 한 곳에 똘똘 뭉쳐 모여 있었고, 그 선두에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서 시선을 보내왔다.

"베이고르의 영주여. 이 작은 부족에까지 무슨 일이오?"

노인이 어색한 제국어로 말을 건네 왔다.

그에 막시밀리언은 유창한 초원어로 답했다.

"베이고르의 영주로서 우방인 그대들을 살피러 왔네. 해코지를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경계심을 거두게."

초원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창한 초원어에 노인은 조금 놀란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시오. 우리는 힘이 없소. 그대들이 정복자의 권리를 누리려 한다 해도 저항할 수 없지."

"우리는 정복자가 아니라 구원자로서 그대들을 찾은 것이네. 잘 알겠지만, 타칸 연합의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은 국내외로 학정을 일삼았지. 우리는 타칸 연합의 우방으로서 어떻게든 다른 길을 찾으려 했지만, 그의 만행이 더는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기에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렸을 뿐이네."

"개소리!"

잔잔한 대화에 갑작스레 찬바람이 불었다. 똘똘 뭉쳐 있던 부족민들 틈에서 체구가 좋은, 하지만 다소 앳된 얼굴의 청년이 얼굴을 붉히며 튀어나왔다.

"바오룸! 자중해라!"

노인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막시밀리언과 열 걸음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까지 앞으로 나갔다. 그에 병사들이 움직이려 하자 막시밀리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는 청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구지?"

"세겐티옐의 족장 비아쟈의 아들 바오룸이다!"

"그래. 바오룸. 할 말이 있는가?"

"되도 않는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그러나. 우리에게 약속했던 땅이 탐났을 뿐이라고!"

"그건 조금 유감스러운 말이군."

"대족장이 부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전쟁 선포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네놈들이 정말로 우리를 우방이라고 생각했다면 말이다!"

"여전히 우방이라 생각하고 있네. 그러니 자네들을 당장 노예로 만들거나 목 베는 대신 이렇게 대화를 나누려고 찾아온 것이겠지. 또한, 이렇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자네에게 관용을 보이는 것이겠고."

"마음대로 지껄여라! 대족장이 돌아오면 너희는 모두 비참하게 죽어갈 것이다!"

"대족장이라고?"

막시밀리언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에 바오룸이 인상을 구기며 따져 물었다.

"무엇이 우습지?"

"어찌 웃기지 않겠느냐. 이미 보름도 더 전에 타르가이 베르겐은 죽었고, 그의 군대는 무너졌거늘. 하긴,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먼 곳의 소식을 듣는 것이 쉽지 않기는 하겠군."

"뭐, 뭐라고?! 거, 거짓말 하지 마라!"

"믿든 말든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아무리 여기서 목 빼고 기다려도 타르가이 베르겐과 그의 군대는 오지 않을 테니까. 하하."

"이, 이놈!"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그가 폭발할 기미는 진즉부터 보였다. 그랬기에 병사들은 언제든지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바오룸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때 즉시 반응하여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바오룸의 솜씨는 그들의 예상 이상이었다.

"어엇!"

바오룸은 날렵하게 뛰어올라 말 위의 병사를 덮쳐 낙마시켰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들고 다시금 막시밀리언에게 달려들었다. 불과 너덧 걸음 거리였고, 그의 칼은 금방이라도 막시밀리언에게 닿을 것만 같았다.

"무모하고 멍청한 놈이로구나!"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바로 뒤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서지 않았다. 바오룸이 언성을 높일 때마다 작게 몸을 들썩거리던 할렌이 그보다 먼저 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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