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한도라에 막시밀리언과 병사들이 주둔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갔다.
군터는 처음 한도라에 머물게 되었을 때는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될 줄은 몰랐었다. 어느 정도 자리를 굳히고 있으면 본국에서 병력이 오든, 사람이 오든 해서 인계 작업이 이루어질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본국에서는 간간이 오는 전령 말고는 별 소식이 없었다. 막시밀리언도 군터와 같은 것을 느꼈는지, 요 근래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늘었다.
"쉬쉬하고 있는 분위기지만, 아무래도 일전의 회전에서 정말 크게 피해를 입은 모양이군. 설마하니 도시에 주둔시킬 병력조차 쉽게 내지 못하는 건가."측근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막시밀리언은 그의 생각을 내놓았다.
"설마…그 정도까지."
"그게 아니라면 말이네, 어째서 본국은 침묵하고 있는가.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일전에 날아왔던 피해 소식…난 그것이 애써 둘러대는 것처럼 보였네."
"으음."
"물론 단순히 전투의 피해 때문만은 아니겠지. 이번 전쟁은 아국으로서도 총력을 기울였던 만큼, 슬슬 잡음이 일어날 시기가 되기도 했어."
"잡음이라시면?"
군터가 물었다.
"이번 전쟁을 위해 각지에서 꽤나 징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네. 젊은 사내들을 대거 징집하기도 했고. 민심이 흉흉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민란이라도 일어날 것이라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네. 다만 현재의 아국이 이래저래 위험하다는 거지. 가뜩이나 좋지 않은 상황에서 병력까지 크게 잃었다면, 이는 곧 일정 부분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뜻이 된다."
통제력. 땅과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이름이다.
"여기서 타칸 연합을 멸하고 그들의 땅을 흡수한다고 하면 혼란은 더욱 커지겠지. 궁금하군. 국왕 전하께서는 이쪽에서의 승전보가 올라오길 기다리고 계실까?"
불경스러운 말이다. 바깥으로 새어나간다면 크게 곤란함을 겪을 만큼.
하지만 막시밀리언은 그런 말을 뱉고, 웃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모두 그와 단단히 묶인 측근들이기 때문이었기에.
다만 군터는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언제부턴가 막시밀리언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가 기억하는 예전의 막시밀리언은 제 아무리 측근이라 해도 이렇게 느슨한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예전에 비해 지금의 모습은, 좋게 말하면 호기로웠고 나쁘게 말하자면 안일해 보였다. 어딘가 풀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 사람은 모두 변하는 법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그 자신조차도 변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누구나 변하게 되어 있다. 굳건한 바위조차도 한 자리에서 가만히 바람과 비를 맞다 보면 조금씩 모습을 바꾸게 될진대, 어찌 사람이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혹 영주님께서 한도라에 자처하여 남으신 이유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셨기 때문입니까?"
미트라스가 물었다.
"그럴 리 있겠는가. 내게는 듣고 보지도 못한 것을 알아맞히는 재주는 없네. 단순히 보신하고자 했을 뿐이야."
웃으며 하는 그의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보신하고자 했다면 무엇을 위한 보신이었는가. 사뭇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 때문이 아니더라도 능히 유추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의심을 확신으로 굳혀주듯, 막시밀리언은 목소리를 낮춘 채 말을 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앞으로는 힘이 있어야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절이 될 것이야."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자네들이 일전의 내 결정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마음을 가졌었음을 알고 있네. 하지만 말이야. 가질 수 있다 해도 지키지를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주님께서는…장차 아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리라 보십니까."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라는 듯, 막시밀리언은 탁자 위 지도를 짚었다.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지. 이로써 아국은 고토 회복이라는 숙원을 달성했다. 온전한 베이고르로 다시 태어난 게야. 하지만 바꿔 말하면, 숙원을 이룸으로써 아국은 목표를 잃었다.
목표를 잃었다 함은 추진력을 잃었다는 것과 똑같지. 이제 아국은 어떻게 가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고민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 고민에 답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바깥으로 뻗어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겠지. 여기서 바깥으로 나간다면 황량한 갈색 초원을 제외하고서는 제국 밖에 없는데, 제국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작은 점과 가느다란 선이 무수히 그려져 있는 얇은 지도 한 장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군터는 막시밀리언이 보는 것을 알아내려 노력했지만 그래도 보이는 것은 처음 보았던 형체뿐이었다.
"전쟁의 승리와 고토 회복이라는 숙원의 달성으로 국왕 전하의 위엄은 높아지겠지. 이전에는 자처하여 권신들 틈바구니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셨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으시려 할 게야. 위상이 달라졌으니 당연히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지. 권력이라는 놈은 같은 핏줄끼리도 나누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군신 간에야 오죽할까."
"정쟁입니까……."
"말했듯, 당연한 수순이네. 때마침 좋은 무대까지 준비되어 있지 않나."
"무대라 하심은…전후의 논공행상을 이르시는 겁니까."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땅은 배로 늘었고, 사람은 부족하지. 부족한 사람들끼리 나눠먹기에는 늘은 것이 너무 많으니, 새로운 사람을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채운다면 누구로 채울 것인가. 새로운 권력자들을 탄생시키는 일이다. 기존의 권력에서 파생될 수밖에 없고, 서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가 될 것이다. 그 시기를 탈 없이 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힘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무언가 큰 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더더욱 힘이 있어야겠지."
'힘이라.'
군터는 생각했다.
좋다. 좋은 말이다. 힘이 없다면 있어도 뺏기고, 없다면 취하려는 마음조차 감히 가질 수 없다. 막시밀리언의 말은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했다.
그럼에도 의문이 드는 것은, 힘을 말하는 막시밀리언의 목소리며 기색에 어쩐지 조급함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리에론 가문이 있지 않은가.'
힘을 말하자면, 막시밀리언은 이미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 그는 베이고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인 리에론 공작과 통혼으로 관계를 세운 당여였다. 리에론 가문을 따르는 그 무수한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란 말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막시밀리언은 뭔가, 조급해 보였다. 든든한 뒷배를 가진 사람답지 않게 말이다.
막시밀리언은 혹 리에론 가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하는 마음이 있거나, 그들에게 빚지지 않고 스스로 이뤄내려고 하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고 보면 막시밀리언은 이전에도 종종 묘한 분위기의 말을 하곤 했었다. 빚을 지면 언제고 결국은 갚아야 한다는 둥, 그늘을 드리울 만큼 큰 나무는 그늘 아래서는 자랄 수 없다는 둥.
바깥으로 새어나갈 정도로 대놓고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가벼운 술자리 같은 곳에서 적당히 취해 기분이 좋아졌을 때면 막시밀리언은 분명 그런 말들을 하곤 했었다.
그때는 그저 가볍게 듣고 넘겼었지만…지금에 와서 다시 떠올려 보면 이미 그때부터, 아니 그런 말을 내기 전부터 막시밀리언은 어느 정도 생각을 굳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때가 된 것 같아 내 마음을 자네들에게 터놓는 것이야. 일전에도 넌지시 흘린 적이 있지만, 기회가 된 김에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말하도록 하지."
정적 속에 막시밀리언이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말이네. 남작이라는 낮은 작위, 코누다이안이라는 작은 영지. 모두 만족스럽지가 않네."
바로 조금 전에 막시밀리언이 변했다 생각했지만, 변한 부분이 있다면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상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지. 이어받을 것 없는 가문을 나와 군문에 투신했고, 백부장으로 시작해서 스무 해가 가기 전에 귀족이 되고 영주가 되었네. 처음 내가 가문을 나왔을 때, 내가 이리 될 것이라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다면 백이면 백 비웃음이나 샀겠지."
바로 이 활활 타오르는 야심이다. 놀랍도록 진하지만, 그만큼 순수해서 저열하다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
"리에론 공작을 따르던 가신들 몇은 베이고르에 넘어와 귀족이 되고 영주가 되었지.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네. 내가 리에론 공작처럼 된다면, 또한 자네들이이전의 나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막시밀리언은 그가 지핀 불씨를 다른 이들에게 옮겨 심었다. 그렇게 옮겨간 자그마한 불씨는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고개 숙이고 있던 저마다의 야심이라는 놈을 크게 일깨웠다.
"이제껏 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나를 따르도록 하게. 우리가 함께 이룬다면, 내 어찌 자네들의 공로를 잊겠는가."
막시밀리언이 하는 모든 말들이 그저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그가 앞서 준비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도, 코누다이안에도 코누디스 남작을 따르는 힘이 있었다.
질서가 잡힌 시기라면 힘만으로 무언가를 얻어내기란 어렵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혼란의 시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일찍이 있었던 혼란의 시기에 높이 치고 오르지 않았던가.
다시 한 번 기회가 온다면, 그리고 그 기회를 잘 살린다면 어찌 지금보다 더 높이 뛰어오르지 못하겠는가.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충심으로 따르겠나이다!"
달아오른 목소리로 충성을 외치는 자들 앞에서, 막시밀리언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
"어떻다고 합니까?"
"음."
군터는 할렌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서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코누다이안에 있는 벨리사와 살라스에게 보낸 서신에 대한 답장이 이제야 돌아온 것이었다.
벨리사의 답신을 먼저 읽었다. 안부를 묻는 서신을 보냈고, 그에 대한 답은 뻔하다면 뻔했다.
잘 지내고 있으며, 매일 같이 당신의 무사귀환을 위해 영주 부인과 함께 예배당을 찾아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말미에는 언제쯤 돌아올 것 같은지 묻는 말도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살라스에게 보낸 서신은, 영지 주변의 분위기부터 시작해 들려오는 소문들이나 정세들에 관한 것들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각지에서 도적들이 출몰. 거기에 민란까지.'
막시밀리언이 예견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혼란의 시기가 또 한 번 찾아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