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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85화 (285/1,064)

285화

막시밀리언의 말처럼, 프롱기우스 백작은 부상병들을 포함한 소수 병력을 한도라에 남기기로 했다.

그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대다수 영주들은 꺼림칙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당연했다. 이제부터는 발을 디디는 곳마다 깃발을 꽂을 수 있었고, 이는 곧 공을 세울 기회가 지천에 널려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뒤에 남아 흘러가는 구름이나 보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막시밀리언이 자진해서 나섰다.

"의외군."

프롱기우스 백작이 막시밀리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속내를 짐작해 보겠다는 듯이.

"누군가는 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휘하에 부상병들이 많습니다. 다치지 않은 나머지도 많이 지쳤지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공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조금 쉬고 싶습니다."

"핑계 치고는 너무 궁색하지 않은가?"

"솔직히 말씀드리면…이제까지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족한다는 건가."

"과욕을 경계하는 것이지요. 제 부친께서 제게 주신 첫 번째 가르침이었습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등 뒤에서 바람이 부는데 자네는 달리기는커녕 멈춰 서는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

"뜻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남고 싶지 않아 하는 자를 억지로 남겨봐야 욕 밖에 더 먹겠는가. 남겠다는 자네가 있어 인선이 편해졌어."

프롱기우스 백작은 막시밀리언과 그의 수하들, 그리고 군단 내 영주들에게서 각출한 소수 병력을 한도라에 남기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막시밀리언은 한도라 사령관이 되어 본격적으로 수습 작업에 들어갔다.

무슨 수습 작업이냐하면, 아그니스 체스퍼의 제국군이 벌여놓은 참상의 뒷수습이었다.

"우욱!"

"젠장! 미치겠구만."

보다 일찍 한도라로 들어갔던 병력들이 어느 정도 급한 불은 껐다지만, 그래도 도시 내의 상황은 심각했다. 무자비한 학살의 흔적은 휑한 도시의 풍경 외에도 곳곳에서 넘쳐나는 시신들로 확인이 가능했다.

'지독하군.'

군터는 한도라로 들어서자마자 그를 반기는 지독한 사기(死氣)와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에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며칠 동안 한도라에서 검은 연기가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더니, 그것이 전부 다 시신을 불태우느라 피운 불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태우고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마다 썩어가는 시신이 넘쳐난다는 사실이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당장 눈에 잡히는 것만 해도 족히 수천은 넘는 것 같았다.

"하."

군터는 짧게 한숨 쉬었다.

이곳은 타칸 연합의 수도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제국군이 들이닥쳤을 당시 틀림없이 전투가 벌어졌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이 무수한 시신들을 설명할 수는 없다. 설마하니 이들 모두가 칼을 들고 제국군에 맞섰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바로 이곳에서, 처참하고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대체 무엇 때문에?

'분노에 눈이 멀었는가.'

검은 거인으로 화했을 때의 그를 떠올렸다. 살기와 분노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처참하군. 하지만 다행히 먼저 와있던 이들이 어느 정도는 수습을 해뒀어. 우리는 그를 이어 받으면 된다. 당분간은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군."

막시밀리언은 두꺼운 천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도시 곳곳을 직접 돌았다. 도시로 입성한 병사들은 모두 수습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미 어느 정도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시신들을 들어 옮기고, 모아서 불태웠다. 또 일부는 아예 도시 밖으로 가져가 파묻었다. 사람과 말, 수레들이 쉬지 않고 움직였지만 그래도 작업은 더디기만 했다.

코를 찌르다 못해 정신까지 암울하게 물들이는 악취 덕분에 더욱 더디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저 치들은 팔자도 좋구만."

병사들을 독려하던 장교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의 찌그러진 시선이 향한 곳에는 술사들이 무리지어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비싼 몸들이시잖아. 시체 만지는 일은 하기 싫다는 거지."

"누가 직접 옮기래? 멀찍이서 그 잘난 술법이나 좀 써주면 되잖아. 그러면 이 개 같은 작업이 한결 편해지겠구만. 저 치들은 시체 썩는 냄새가 그렇게 좋은가?"

술사들은 도시에 입성한 후부터 한 번도 수습 작업에 얼굴을 들이민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내성에 위치한 어딘가에서 머물다시피 했는데, 그곳 주변으로는 어지간한 장교들조차 출입이 제한되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곳에 막대한 재물이 쌓여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으로, 가까이 가기만 해도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친위병들이 살벌한 시선을 보내는 통에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군터는 당연히 예외였다. 그는 그 출입제한 구역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그곳에 출입했다.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병사들을 적당히 다독인 후였다.

"군터 경."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이 절도 있게 군례를 올렸다. 군터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내성에서도 심처(深處)중의 심처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과 자리한 위치로 보아, 아마도 대족장이 사용하는 일종의 왕궁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직접 물어볼 이들이 없어서 아쉽지만, 그런 것은 사실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 있는 물건이다.

"군터 경. 오셨습니까."

물건을 지키고 있던 장교 한 명이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음. 오늘도 다들 열심이군."

"예. 저 나무 우리가 비범하기는 한가 봅니다. 저 같은 무부는 암만 봐도 모르겠는데 말이죠."

자그맣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크지도 않았다. 외견을 보고 저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우리라고 답하겠지만, 그 표정은 다소 의심에 차 있으리라. 왜냐하면, 거무튀튀한 나무로 된 우리는 굉장히 낡고 부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볼품이 없었다. 어떻게 봐도 귀중한 무언가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베이고르군이 한도라로 진입한 직후, 술사들이 저것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군단장인 프롱기우스 백작까지도 그러했음은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진입 첫날에 프롱기우스 백작이 직접 이곳을 제한구역으로 설정하고 보안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군터는 저 우리의 특별함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저 앞에서 극성스럽게 살피고 있는 술사들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는 저 우리에서 풍기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사나움. 보고 있기만 해도 솜털이 곤두설 정도의 맹렬한 사나움이 우리에서 흘러나왔다. 그 어떤 맹수를 앞에 둔들 이런 느낌은 받지 못하리라.

살아있는 것도 아닌, 끈 몇 개 잘라내면 쓰러져 버릴 것 같은 부실한 우리에서 어떻게 이런 기운이 풍길 수 있는 것인지 몇 번이나 다시 보아도 믿기지가 않았다.

군터는 장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멀찍이 떨어진, 우리의 코앞에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 술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실은, 그가 이곳에 일부러 발도장을 찍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술사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으면서 저 기묘한 우리에 대해 조금 더 알고자 한 것이다.

단순한 지식욕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군터에게는 그런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저 우리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 기질. 굉장히 흡사하다. 결코 우연일 수 없지.'

타칸 연합과 수없이 싸우면서 질릴 정도로 보았던 바르바피들. 그 인외의 존재들에게서 느꼈던 기운과 매우 흡사한, 아니 거의 같은 기운이 저 우리에서 흘러나왔다. 착각일 리가 없다. 군터는 확신했다. 저 우리와 바르바피들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고.

다만 아는 티를 낼 수는 없다. 아직까지 그는 그가 술력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사령술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터부시 되는 면이 없지 않고(제국이 아닌 베이고르라고는 하지만), 굳이 드러내서 얻을 것이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비밀 하나 정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고.

아무튼 오늘도 기껏 발걸음을 했건만, 그다지 생산적인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술사들이 하는 이야기는 어제와 같았다. 저 우리가 마치 생명체처럼 자체적인 기운의 흐름을 가지고 있고, 그 흐름이 굉장히 강하고 단단하다는 것이다.

"벌써 돌아가십니까?"

"그래. 지루하기만 하군. 어차피 사령관께 드릴 말씀은 정해져 있어. 저 자들이 멍청한 짓을 저지를 것 같지도 않고. 출입 통제만 철저히 하게."

"옛.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적으로 이곳을 찾은 게 아니었다. 군터는 저, 일단은 '보물'로 취급받는 우리를 관리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게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군단장 프롱기우스 백작이 막시밀리언에게 전하고, 막시밀리언이 군터에게 일임한 임무인 것이다.

"그럼 수고하게."

"충!"

기합이 잔뜩 들어간,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경의 빛을 띠는 장교를 뒤로 하고 군터는 출입제한 구역 밖으로 나섰다. 들어왔던 입구에는 할렌과 몇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할렌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요란스러운 자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요즘 장주님과 인사 한 번 나누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장주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소문이라는 것은 발 없는 말이고, 마른 들판에 붙은 불씨와 같다. 빠르게 퍼지고, 더 크게 퍼진다.

군터와 아그니스 체스퍼의 싸움은 이미 그 당시 전장에 있었던 모든 베이고르군이 다 알았다. 직접 본 자들이 이야기를 전했고, 그 이야기는 퍼질수록 더 화려해졌다.

검은 거인으로 변한 아그니스 체스퍼가 수십 명의 병사들을 거뜬히 쳐 죽였고, 그런 괴물을 상대로 군터가 말 한 필 타고 달려들어서 치열한 사투 끝에 쓰러뜨렸다는 무용담은 본래의 것에서 더 부풀려져 병사들의 입과 귀를 떠돌았다.

"소문이라는 것이 정말 무섭구나."

"없는 이야기가 퍼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은 즐겨보심이 어떨지."

"농담이라면 썩 질이 좋지 않다."

"송구합니다. 다만 장주님. 병사들은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저 역시도 자부심을 느낍니다."

"쯧."

떠받들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이가 어디에 있을까. 군터 역시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껄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첫째로 상대가 친분이 있는 아그니스 체스퍼였기 때문이었으며, 둘째로 지금 돌아다니는 소문이라는 놈이 과장이 되어도 너무나 과장되었기 때문이다. 어깨가 으쓱한 정도를 훨씬 뛰어 넘어서 낯이 다 뜨거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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