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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84화 (284/1,064)

284화

전투가 끝나고, 군터는 자신의 막사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보기 원했지만 군터는 부상을 핑계로 두문불출했다.

사실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그의 몸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기는 했다. 다만 밖에다 둘러대는 것처럼 거동도 못할 정도인 것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그가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막사 안에 박힌 것은 도저히 웃으면서 사람을 대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 되었습니다."

"음."

"당분간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말을 타시는 것은 물론, 바람을 쐬는 것도 되도록 피하십시오."

의사는 고맙게도 그의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해주었다. 의사의 진단이 이렇게 내려졌으니 혹 건방지게 군다는 입소문이 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소인은 이만."

"그래. 수고했네."

의사가 물러가고 막사에는 군터와 할렌만 남았다.

"바깥에서 장주님을 많이들 찾습니다."

"저 녀석이 알아서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겠느냐."

"정말 거동도 힘들 정도이십니까?"

"움직일 만은 하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마지막에…왜 굳이 나서신 겁니까?"

아그니스 체스퍼와 겨룬 일을 말함이었다. 홀로 남아 대군에 둘러싸인 그는 굳이 군터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늦든 빠르든 죽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제국의 흑포장군이 홀로 남았는데 그 목을 탐내지 않을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할렌은, 군터가 공명심에 타오르는 사내가 아님을 잘 알았다. 그라면, 오히려 못 본 척 눈을 돌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공을 탐했느냐고 묻고 싶은 게냐?"

"제가 어찌 감히. 절대 그런 뜻은 아닙니다."

"……."

군터는 침상에 비스듬히 몸을 누였다. 전신에 욱신거리는 고통이 사투의 기억을 되새김질시킨다. 공연히 나서지 않았다면 얻지 않았을 부상이고, 지금의 달갑지 않은 유명세 또한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손해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야 어찌 생각하든, 당사자인 그의 생각은 그랬다.

솔직히 말해 조금은 기분이 씁쓸했다. 아니, 씁쓸하다기보다는 울적하다고 해야 할까.

이 손으로 한때 교분을 나눴던 전우의 목을 베었다. 말머리를 나란히 했던 동료가 아니더라도 군인으로서, 사내로서 종중할 수밖에 없었던 사내였다. 그런 자의 최후를 직접 결정지었으니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회가 되는지 떠올려 보면 그건 또 아니다. 만약 아그니스 체스퍼가 이름도 모르는 잡병이나 변변찮은 자의 손에 쓰러졌다면, 그리고 자신은 그걸 멀찍이서 지켜보고만 있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괴롭고 후회스러웠을 것이다.

아그니스 체스퍼도 말하지 않았던가. 마지막에 만나는 자가 자신이어서 다행이었노라고. 그 말은 군터에게도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죽음. 그리고 그의 목숨을 직접 거두었던 자신. 그것이 그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드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이 그에 대한 배려라 생각했다."

"마지막을 잡배들의 손에 맡기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겁니까."

할렌은 군터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아그니스 페스퍼를 포함하여 그와 함께 이곳에서 죽은 제국군들은 군터에게도 그렇지만, 할렌에게 있어서도 한때의 전우였다. 그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내심이 편치는 않으리라.

"아쉬워하는 녀석들은 없느냐."

현재 베이고르군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하나는 전투가 끝난 전장에 남아 뒷수습을 하는 쪽이고, 나머지 하나는 제국군이 빠져나오면서 빈 것으로 추정되는 한도라로 향한 쪽이다. 군터와 그의 병사들은 그들의 주인인 막시밀리언과 함께 전자였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법했다. 누가 시체만 가득한 곳에 남아서 피와 살점이 묻어나는 병장기와 구더기가 끓기 시작하는 시신을 만지고 싶어 하겠는가.

"예. 아직까지는 장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쯧. 부추긴 것은 아니냐."

"저는 결백합니다. 장주님의 무용을 직접 눈으로 본 자들이 수천인데, 부추기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장주님께서는 막사 안에만 계시니 모르시겠지만, 현재 군중에서 장주님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군졸들의 입장에서, 따르는 대장의 이름값은 곧 그들의 자부심이다. 대개의 경우, 대장이 잘 나간다고 해서 휘하에게까지 그 덕이 미치는 경우는 드물고, 미친다 한들 그 영향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어찌 되었든 군졸들은 대장의 일을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기뻐한다.

이것은 실리 이전에 마음의, 자존심의 문제다. 어느 누구의 휘하에 있다는 것은 군졸들에게 있어 또 하나의 이름이며 계급장이나 마찬가지.

"너무 들뜨지 않도록 해라."

"주의시키겠습니다."

실실 웃는 얼굴이 미덥지 않았지만 그냥 넘겼다. 겉으로는 저리 실없어 보여도, 할렌 역시 군문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굳은 사내다. 어린 나이에 말단 병졸부터 굴렀던 경험이 있는 것이다.

"이만 물러가 보아라. 조금 쉬어야겠다."

"옛."

군터는 침상에 완전히 누워 눈을 감았다. 노곤함이 몸을 잠식하고, 그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꼬박 사흘 동안 군터는 볼 일을 볼 때를 제외하고는 막사에서 나가지 않았다. 간간이 막시밀리언이나 그가 보낸 사람을 맞이할 때를 제외하고는 외부인을 만나는 일도 전무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막사가 아닌, 막시밀리언의 막사까지 발걸음을 한 것은 전령이 왔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타칸 연합의 대족장과 부딪친 왕의 군대에서 온 전령이었다.

이미 군단장인 프롱기우스 백작에게 보고가 들어갔고, 지휘관 회의까지 열린 후였다. 막시밀리언이 휘하들을 소집한 것은 정보를 전달하고자 함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논하고자 함인 것 같았다.

군터 같은 경우는 몸 상태를 핑계로 해서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며칠 간 막사 안에서만 생활하다시피 하며 좀이 쑤셨던 그다. 의사는 무슨 말을 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슬슬 움직여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는 회복이 된 것 같았기에 바깥출입도 조금씩 시작할 생각이었다.

"아니 군터 경. 움직이셔도 되는 것입니까? 아직 몸이……."

"칼부림을 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움직일 정도는 되오. 염려 고맙군."

안부를 핑계로 말을 붙이는 이들을 적당히 상대하면서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좌측 앞자리에 앉았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네.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이가 없을 것인데."

"소관은 정말 괜찮습니다. 막사 안에서만 있으려니 너무 답답하더군요."

"하하. 대단하군. 원하는 대로 하게. 본인이 그렇다는데 내 무슨 말을 더 하겠나."

가벼운 잡담으로 분위기가 풀어지자, 막시밀리언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알고 있는 자들도 있겠지. 국왕 전하의 전령이 왔네. 그쪽의 전투도 끝이 났어."

"……."

"결론적으로 아국은 승리했다. 타칸의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은 전사했고, 그의 전사들 역시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으며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패퇴했다."

"하하! 경사스러운 일이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가득 찼던 긴장이 풀어졌다. 승전도 승전이지만 타칸의 대족장이 전사했다는 소식은,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었다는 이야기보다도 더 기쁜 것이었다.

대족장의 죽음은 곧 타칸 연합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이번 전쟁에서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기뻐할 수만은 없네."

"예?"

막시밀리언은 들뜬 이들을 무거운 목소리로 가라앉혔다.

"확실히 아군은 승리를 거뒀지만, 사상자가 말도 못할 정도라더군. 정확한 수는 전후 수습이 아직 끝나지 않아 확실치 않지만, 피해가 막대하다 하네.

"으음!"

단순히 피해가 크다는 말로는 충분치 않을 정도인 것 같았다. 승전을 거둔 쪽은 승리를 부풀리면 부풀렸지, 그 피해를 부풀리는 경우는 없으니까 말이다.

"저쪽은 당분간 수습에 여념이 없을 것 같더군."

"허면……."

"우리의 역할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역할이 끝나지 않았다라.'

군터는 그 묘한 말이 주는 느낌을 되짚었다. 그 사이 막시밀리언은 말을 이어갔다.

"대족장을 잡았다지만, 승리했다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살아서 도망친 적들이 남아 있으며, 각지에서 대대적이거나 산발적인 저항이 일어날 것이다. 아국이 타칸 연합의 영토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빠르게 움직여야겠군요. 비록 지금은 잠잠하다지만, 제국이 언제 또 다시 움직일지도 모르는 일이니."

미트라스가 말했다. 막시밀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일단 국왕 전하께서 이끄시는 본군의 피해가 막심하다고 하니……. 그 군대는 단지 1군단이었던 것이 아니야. 그곳에는 두 공작 각하들께서도 함께 하고 계셨다. 막대한 피해라 함은 그 분들께서 이끄시는 병력도 포함이네."

그렇다는 것은 지금 베이고르의 전체 전력이 반 토막,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하게 갈려나갔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말이 있고서야 비로소 모든 이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현재 출정을 나온 군단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상황이 좋은 것이 우리 쪽이다. 타칸 연합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는 임무는 우리 쪽에 맡겨지게 되겠지. 미트라스 경이 말한 대로 이것은 시간 싸움이니, 바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싸움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싸움이다. 막바지가 보이고 있다고는 해도 어깨가 무거워질 수 있는 일임에 분명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기는 셈이니 가슴이 달아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막시밀리언은 그 달아오른 가슴에 찬물을 뿌렸다.

"나는 이번 일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예?"

"수도를 점거했다. 부상병들도 있고 하니, 누군가는 남아서 지켜야겠지. 나는 남는 쪽에 자원할 생각이다."

"하지만 영주님. 공을 세울 기회가 아닙니까. 잔존 병력이라 하지만, 머리를 잃은 놈들이 얼마나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납득하지 못한 이들이 목소리를 냈으나, 막시밀리언은 단호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마음을 정했음을 분명히 했다.

"내 이미 결정했네. 다들 그런 줄 알고 조용히 따라줬으면 좋겠군."

막시밀리언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후로, 누구 하나 그에 대해 더 논하는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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