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콰지직!
나무가 쪼개지는 것 같은, 하지만 그보다는 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는 한순간에 지나간 소리에 불과했지만, 군터는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조금 전 내쉬가 쓰러질 때처럼 말이다.
팔이 통째로 비틀리는 것 같은 고통의 와중에도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마냥 고통에 신음하거나, 무릎을 꿇거나, 뒷걸음질 칠 수가 없었다.
그는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한 걸음, 아니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크게 위로 튕겨나가는 거인의 몸을 따라가, 양 팔이 젖혀지면서 훤히 드러난 그의 복부에 여전히 시린 빛을 발하는 칸젤의 창날을 쑤셔 넣었다.
푸우욱!
크아아악!
깊게 찌름과 동시에 그의 머리통보다 더 큰 주먹이 날아들었다. 팔뚝을 들어 막았지만 쇠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둔탁한 충격이 팔을 밀어 머리까지 전해졌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그의 몸이 빠르게 나가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칸젤을 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기에, 피인지 뭔지 모를 검은 액체를 잔뜩 묻힌 창은 그와 함께 땅을 굴렀다.
그, 그으으윽!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격통에도, 뚜렷하게 들리는 상대의 신음이 그를 기쁘게 했다. 당장 다시 달려가서 기회를 살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부러진 건가? 아니. 아니다. 그 정도는 아니야.'
팔에 감각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무뎌졌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크게 뒤틀리지는 않았고, 느낌으로도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생기를 끌어올리는 이 비술은 그의 힘을 확실하게 늘려주지만, 몸의 내구성까지 강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평소 이 힘을 쓸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자칫 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힘을 사용하게 되면 몸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다.
곧 힘이 돌아왔다. 감각이 살아나며 고통도 더 심해졌다. 마치 여기서 멈추라고 말하는 듯하다.
"으음."
칸젤을 지팡이처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 숙이고 있었다. 그늘진 복부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이 멀리서도 훤히 보였다.
점점 굳어가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느릿하게 뗀 한 걸음은 뒤에 조금 더 빠른 한 걸음이, 그 다음에는 그보다도 더 빠른 걸음이 이어졌다. 여덟 걸음을 떼었을 때, 군터는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부웅!
주먹이, 아니 건물의 기둥과도 같은 두꺼운 팔이 날아왔다. 군터는 허리를 뒤로 접다시피 하여 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그를 피해냈다. 그가 지나간 자리의 땅이 그의 발뒤꿈치에 길게 파였다.
촤악!
기다란 흑선(黑線)이 허공을 적셨다. 허벅지를 제법 깊게 베인 검은 거인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상처를 낸 군터의 뒤를 쫓았다.
부웅! 부웅!
창을 잃었지만 두 주먹이, 온몸이 무기였다. 무지막지한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돌풍이 이는 듯했다. 군터는 바람을 맞는 들풀처럼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서 그를 피해냈지만, 이따금씩 풍압이 그의 몸을 밀어내기도 했기에 운신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부웅!
한 방이라도 허용하는 순간,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군터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당겼다.
서걱!
또한 그러면서도 조그마한 틈이라도 보이면 망설임 없이 칸젤을 휘두르고, 찔렀다. 그럴수록 검은 거인은, 아그니스 체스퍼는 더 사납게 날뛰었지만 그는 결코 움츠러들지 않았다. 여기서 몸을 사린다고 해도 뒤가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더 빠르게. 더 과감하게.
쾅!
돌덩이 같은 주먹이 땅을 찍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거의 주먹 전체가 땅을 파고 들었다. 흙먼지 연기가 구름처럼 일어나고, 지축이 뒤흔들렸다.
군터는 주먹이 떨어지는 순간 뒤로 몸을 날렸다가, 주먹이 땅을 다 파고드는 순간에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욱하게 솟아오르는 흙먼지 연기를 뚫고, 쓰러진 기둥처럼 뻗어있는 거인의 팔을 발판삼아 달렸다. 그가 거인의 팔 위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연기 너머로 붉은 안광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어어어어어!
거센 포효가 흙먼지를 날려버렸다. 발을 대고 있는 거인의 팔이 흔들리며 몸의 균형을 앗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군터는 거대한 붉은 안광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
주먹이 날아들었다. 세찬 바람과 같은 함성이, 포효가 몸을 밀었다.
탁!
군터는 땅을, 거인의 팔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수십, 수백 번이나 사선을 넘나들었던 경험이 그에게 알려주었다. 지금이야말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라고.
친구의 목소리에 그는 응답했다.
그러겠노라고.
우웅!
칸젤도 주인의 뜻을 읽었다. 창을 쥔 손에 힘이 전해졌다.
마치 팔이 늘어난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세상에 베어낼 수 없는 것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아니 확신이 들었다.
"흐읍!"
강렬한 예기가 일순 폭사했다.
서걱!
검은 암벽 같은 거인의 목에 길고 가느다란 선이 그임과 동시에, 바위덩어리 같은 주먹이 군터를 강타했다.
"커헉!"
가까스로 마지막 순간 한 팔을 들기는 했지만, 군터는 피를 토하며 나가 떨어져 땅을 몇 바퀴나 굴렀다. 반사적으로 균형을 잡으면서 상반신을 들었으나, 곧바로 피를 토하며 다시 쓰러졌다.
몸이 덜덜 떨렸다. 주먹을 막은 팔에는 감각이 없었다. 부러졌거나, 으스러졌거나, 어찌 되었든 뼈까지 상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사실 팔도 팔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몸 내부였다. 각혈을 동반한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쿨럭쿨럭!"
그러나 군터는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거인을 보았다. 고개를 떨군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끝났나?'
죽은 것인가 하는 순간, 거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작게 흘러나온 연기는 곧 자욱해져 거인의 몸 전체를 덮고, 그 주변까지 퍼져나갔다. 멀찍이서 둘러싸고 있던 군중이 소란을 일으켰다.
'저게 뭐지? 기인가?'
군터는 저 검은 연기로부터 꺼림칙함 이전에 연기가 내포한 기운을 느꼈다.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매우 농밀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이었다. 그가 본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그때, 사교도의 마을에서…….'
수 년 전, 습격당한 상단의 흔적을 쫓아 다다랐던 사교도의 마을. 그곳에서 맞닥뜨렸던 흉신의 잔해, 혹은 환영. 그 끔찍한 신의 형상. 그나마 가장 비슷한 느낌을 꼽자면 바로 그 때였을 것이다.
'빠져나가고 있는 건가.'
짙은 연기는 점차 색을 지워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 것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기가 걷히고, 검은 거인이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익숙한 모습의 사내였다.
"……."
군터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느릿하게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어느 정도 다가갔을 때,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본래 적당히 그을려 건강한 상이었던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군터."
"장군. 오랜만입니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군터는 멈춰 섰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무수한 베이고르군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그 모두를 일견하고 다시 군터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네가 나를 원망치 않듯, 나 또한 자네를 원망치 않네. 우리는 서로…선택을 했을 뿐이지."
아무런 기세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초연해 보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최후를 담담히 대면하는 듯했다.
"승리한 전장에서 꼴이 왜 그런가."
"오히려 제가 장군께 여쭙고 싶습니다만."
"하하. 내가 한 것인가."
마치 아무런 기억이 없다는 말투다.
그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검은 거인으로 화한 그가 이성 없는 짐승처럼 날뛸 때부터, 군터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별 다를 것 없어. 선택을 했네. 언제나 그랬듯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선택을 했을 뿐이야."
아그니스 체스퍼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 흙먼지에 뒤덮여 있던 칼 한 자루를 들었다. 이가 나가고, 끄트머리 일부가 부러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안타깝군. 뭐, 이성이 있었다고 해도 즐겁진 않았겠지."
"……."
그가 볼품없는 칼을 들어 올렸다. 부러진 칼끝이 군터를 겨눴다.
"자네와는 언제고 한 번쯤 손속을 겨뤄보고 싶었다네. 우리가 함께 했던 때는 워낙 여유가 없어 그러지 못했었지."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하핫! 그런가?"
메말라 있던 그에게서 열기가 느껴졌다.
호승심일까? 이제 와서?
아마 아닐 테지만,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군터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가 칼을 들고 선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울려주겠는가?"
"기꺼이."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무리한 부탁일 수 있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군. 마지막으로 만나는 이가 자네라 다행이야."
"……."
"그럼…가겠네."
달리지 않았다. 그도, 군터도 한 걸음씩 걸어 서로에게 다가갔다.
한 쪽은 웃었고, 한 쪽은 표정이 없었다. 서로에게 가까워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칼과 창을 휘둘렀다.
부웅!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불처럼 위태로웠다.
군터는 칸젤을 길게 잡은 채 거리를 벌렸고, 아그니스 체스퍼는 창날을 피해 접근하며 부러진 칼을 휘둘렀다.
창과 칼은 허공만을 갈랐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으로도 쫓을 수 있을 정도로 느릿한 움직임 속에, 당사자들은 힘겨움을 느꼈다.
피차 만신창이인 몸 상태. 한 번의 격돌이 있는 순간 결착이 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새파랗게 예기를 뽐내는 칸젤과 부러진 칼. 부딪치면 어느 쪽이 부러질지는 뻔했다. 그렇기에 아그니스 체스퍼는 충돌을 피하려 했고, 군터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한 번을 겨루고자 했다.
후욱!
창날이 땅을 쓸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피했다.
단순히 제자리에서 뛰거나, 뒤로 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뛰었으며, 부러진 칼을 쭉 내질렀다.
칼끝이 향한 곳은 목.
군터는 다가오는 칼날을 주시하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픽!
부러진 날 끝이 옆 목을 얕게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창을 잡고 있지 않던 팔의 팔꿈치가 비수처럼 아그니스 체스퍼의 가슴팍을 찔렀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허공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 땅에 손을 짚었을 때, 그의 목 앞에는 너무나 예리해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창날이 다가와 있었다.
"노린 건가? 훌륭하군."
"장군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지. 분하지 않으니 좋은 말로 달랠 필요는 없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끝내주게."
"……."
핏물이 튀었다. 한 명이 쓰러졌고, 한 명은 고개를 들어 짙은 숨을 토했다.
억눌렸던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군터!
군터!
군터!
한 사내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자그맣게 시작된 연호는 오래지 않아 전장 전체로 번져나갔고, 살아 있는 모두가 코누다이안의 기사를 기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