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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82화 (282/1,064)

282화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가 이상하리만치 길게 느껴졌다.

널려있는 시신들 중에는 병사들의 것도 많았지만, 장교급 무관들의 것도 많았다. 공을 탐하다가 죽어간 이들이다. 분에 넘치는 것을 탐한 대가를 죽음으로 돌려받은 이들.

쾅!

도망치려던 무관의 머리에 돌덩이 같은 주먹이 내리꽂혔다. 몸이 통째로 으스러져 즉사했다.

"이노오오옴!"

일반 무관들과는 구별되는 고급스러운 무장을 한 사내가 말을 몰아 달려들었다. 걸친 무구로 보나, 풍기는 기세로 보나, 기사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이제 이만하면 지쳤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달려들었던 이들이 두 손으로도 세지 못할 만큼 많았다는 것을, 그보다 앞서 간 자들과 마찬가지로 간과하고 말았다.

콰직!

내리찍은 일격에 기사의 검이 박살나고, 말의 다리가 꺾여 부러졌다. 그리고 연달아 내리친 주먹에 투구와 그 안의 머리가 으깨졌다.

"이, 이이익! 쏴, 쏴라! 쏴!"

얼굴이 잔뜩 붉어진, 아마도 방금 죽은 기사의 상관인 것처럼 보이는 영주가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명령에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수십 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갔다.

티팅! 팅!

하지만 기세 좋게 날아간 화살들은 단 한 발도 피를 보지 못했다. 마치 강철 방패를 때린 것 마냥, 화살들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거무튀튀한 피부에 부딪치고는 모조리 대가 부러져 나뒹굴었다.

"이런 한심한! 이 많은 병력이 저놈 하나를 잡지 못한단 말이냐!"

왜 못 잡겠는가. 제아무리 저 검은 거인이 강하다한들, 한 손은 열 손을 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단단한 방패도 계속해서 두들기면 찌그러지고, 찢기게 되어 있듯이 아그니스 체스퍼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싸움이라는 것은 수학 계산처럼 단순명쾌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싸움은 기세다. 그리고 그 기세에서 이곳의 베이고르군은 이미 아그니스 체스퍼 단 한 사람에게 완벽히 패해 있었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겠지.'

구덩이에 빠진 사냥감을 사냥하는 것처럼, 먼저 칼을 들이대면 끝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구덩이에 빠져 있던 것은 그저 그런 짐승이 아닌 맹호였다. 어설프게 칼을 들이댄 사냥꾼들이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에 죽어나가니, 그제야 사냥꾼들은 사냥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이 보인다. 사냥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은, 어느덧 사냥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까지 변했다.

"물러나라."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불러일으킨 착각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부터 그것은 예정된 결말이었다.

정해진 결말로 가는 과정이 다를 뿐이다. 그 차이란, 끝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죽어나가느냐다.

"코누다이안의 기사! 군터가 상대하겠다! 모두 물러나라!"

"군터 경?"

그를 알아본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군터는 그 쪽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흐으…흐으…….

그새 덤벼든 병사들 몇을 처리하고, 검은 거인은 숨이 찼던지 주먹을 회수하며 몸을 들썩거렸다.

내쉬가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가자 숨을 고르던 거인이 움찔거렸다. 그 순간 짙은 살기가 엄습해왔다. 몸을 옥죄고, 피부를 따갑게 찌르는 것 같은 농밀한 살기다. 담이 약한 자는 이런 기운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어버릴지도 모른다.

'놀랍군.'

기억하기로, 본래 청동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섞여 있던 것이 밤하늘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검게 변했다. 정제된 살기 대신 바르바피들의 그것과 같은 거친 살기가 넘실거린다.

척 보기에도 거칠지만, 절로 고개를 드는 경각심은 눈앞의 그가 만만치 않은 강적임을 알려주고 있다.

군터는 고삐를 당기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은 온전히 내쉬에게 맡겼다. 그의 호흡과 내쉬의 호흡은 하나가 되었다.

그아아아!

거센 풍압이 일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창을 무슨 자그마한 나무 작대기 휘두르듯 휘둘렀다.

너무나 가볍게 휘두르고 있지만, 그 창은 일반적인 창이 아니었다. 재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창대의 색이 일반적인 목재와는 전혀 달랐다. 옅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카앙!

군터는 그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내기를 포기하고 슬쩍 흘렸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옆으로 밀렸지만 내쉬가 적절하게 몸을 기울이며 충격을 덜어냈다.

'엄청난 힘.'

정면에서 받아낸 것도 아닌데 손아귀가 저릿하다. 군터는 이를 악 물고 연달아 날아드는 공격에 대응해나갔다.

캉! 카캉!

아그니스 체스퍼의 힘은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스치기만 해도 몸이 갈라질 것 같은 강맹함은 이전에 맞붙었던 최고의 강적, 대전사 포라칸과도 비할만했다. 다만 무기를 다루는 정교함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었다. 마구잡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리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수준 정도.

그렇기 때문에 힘만큼은 그 포라칸 이상인데도 군터는 그를 상대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큰 충돌은 되도록 피하면서, 틈이 보일 때마다 망설임 없이 공격을 넣었다. 돌덩이 같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피부도 칸젤은 어렵지 않게 찌르고 벨 수 있었다.

쾅!

"우욱!"

다만 큰 충돌은 피하려고 해도, 그것이 완전히 마음대로는 되지 않았다. 이따금씩 어쩔 수 없이 정면으로 받아내야 할 때마다 군터는 속이 진탕되는 것 같은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손에 쥔 칸젤 역시 부서질 듯 몸을 떨었다.

채앵!

어둑한 와중에 불똥이 쉬지 않고 튀었다. 군터가 처음 나설 때만해도 쥐죽은 듯 조용했던 주변의 분위기는 언젠가부터 쉴 새 없이 부딪치는 두 개의 창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 우와아아아!"

체고가 말보다도 더 높은 흑색 거인에 비해 군터는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등하게 맞서고 있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군중은 도저히 그들과 같은 사람 같지 않은, 두 초인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둘이 격렬하게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그들은 몇 번이고 뒷걸음질 쳤다.

만 명이 넘는 인원이 자리한 전장에,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쾅!

'이제 슬슬 한계다.'

내려치는 것을 비스듬히 흘려 옆으로 빠져나왔다. 밀어치거는 공격은 튕겨져 나가면 그만이나, 아래로 내리찍는 것은 충격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

오직 버티는 수밖에 없는데, 그럴 경우 그 자신은 그렇다 쳐도 내쉬가 버티질 못한다. 내쉬는 명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훌륭한 군마지만, 지금 아그니스 체스퍼가 보이고 있는 괴력은 그런 내쉬마저도 버티기 힘들만큼 괴악한 수준이다.

그 증거로, 그렇게 신경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내쉬의 움직임이 처음과 같지 않다. 반응이 느려졌고, 충격을 받았을 때 더 크게 비틀거린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몸에 그만큼 무리가 왔다는 뜻이다.

'아직인가.'

군터는 아그니스 체스퍼의 몸에 각인된 강체술의 위력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 약점도 역시 잘 알았다.

저 힘은 강력한 위력을 지닌 만큼, 그리 오래 유지 되지 못한다. 만일 저 힘이 바르바피들의 수화(獸化)처럼 오래 가는 것이었다면, 아그니스 체스퍼의 무명은 고작 변방의 지역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히히히힝!

그의 마음을 안 것일까. 내쉬가 투레질을 하며 충격을 덜어냈다. 그리고 다시 용감하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오오오!

흉하게 이곳저곳이 찌그러진 창이 장작을 패는 도끼처럼 떨어졌다. 그에 내쉬는 정면으로 내달리는 와중에 즉시 좌측으로 뛰어올랐다.

군터가 팔을 쭉 뻗어 그은 창극이 아그니스 체스퍼의 팔뚝을 얇게 베고 지나갔다. 미세한 혈선이 그어지며 피가 튀었으나 팔뚝이 군터의 머리보다도 더 두꺼워진 거인의 몸이다 보니 그만한 상처는 상처 같지도 않았다.

콱!

떠올랐던 내쉬의 발이 땅에 닿은 순간,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던 아그니스 체스퍼가 갑작스레 반전했다. 그런 그의 한 손 끝에는 부러진 칼날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푸욱!

내쉬의 몸이 휘어지며,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히히히힝!

귀에 틀어박히는 고통스러운 단발마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군터는 쓰러지는 내쉬에게서 몸을 날리면서도 눈으로는 다가오는 아그니스 체스퍼가 아니라, 쓰러지는 그의 전우를 쫓았다.

쾅!

번개처럼 날아드는 공격을 창대를 세워 막아냈다.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붕 떠서 나뒹굴었다.

근육이, 장기가 제멋대로 뒤틀리는 것 같은 충격이 엄습했다. 군터는 그제야 내쉬가 이제껏 이런 고통을 수도 없이 견뎌왔음을 알았다.

그오오오오!

쿵! 쿵! 땅을 울리는 달음박질 소리가 느릿하게 귀를 스쳤다.

급박한 순간 속에서 그의 사고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몸을 일으켰을 때,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

과장 좀 보태서 키 차이가 두 배나 나고, 덩치 차이는 그보다 더 나는 거인과 보통 사람의 싸움은 절대 성립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실제로 군터가 낙마한 후, 입으로는 함성을 지르면서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군중들이 탄식을 내뱉었던 건 맨몸으로 맞부딪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에서 낙마한 후, 군터는 그런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 치도 밀려나지 않고 아그니스 체스퍼와 맞붙었다.

한 번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몸이 튕겨져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러고도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곧바로 자세를 회복하며 날랜 몸놀림으로 아그니스 체스퍼의 괴력에 응수했다.

티도 나지 않지만, 간간이 흩날리는 피는 모두 아그니스 체스퍼의 것이었다. 검은 거인의 몸에 자잘한 부상이 늘어가고, 그에 비례해 군터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져갔다.

'이대로는 안 된다.'

강체술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검게 변한 피부만큼이나, 저 각인된 술법에도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음을.

그렇다고 한다면 이대로는 안 된다.

인위적으로 생기를 자극하여 끌어올렸다. 무리하지 않는 수준에서 조절했다고 해도, 길게 끌면 일전에 보았던 그 투기장의 죄인들처럼 몸이 망가지고 만다. 군터는 이 싸움에서 목숨을 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여차하면 지금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는 아군에게 차례를 넘길 생각도 있었다.

"후우."

힘을 빼고 주르륵 밀려나면서 떨리는 칸젤의 날을 살폈다.

변질 되었다고는 하지만, 피먹이 천의 힘이 아직 남아 있는 덕에 날이 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아그니스 체스퍼의 힘이 엄청나다고는 해도 그간 먹인 피의 양이 있으니 무기가 상하는 건 걱정하지 않는다.

반면, 칸젤이 멀쩡한 것과는 달리 아그니스 체스퍼의 창은 척 보기에도 상태가 위태위태했다. 여기저기 찌그러진 것은 물론이고, 창날에도 이가 빠진 듯했다. 어차피 지금 아그니스 체스퍼는 창을 무슨 몽둥이처럼 휘두르고 있으니 날의 이가 빠진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한번이다.'

군터는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탁!

마음을 정한 순간 곧바로 움직였다. 숨을 고르던 아그니스 체스퍼가 발을 구르며 응전해왔다. 몸을 낮춰 찔러오는 창을 피하고, 지근거리까지 파고들어 건물의 기둥 같은 허벅지를 베었다.

하지만 역시, 얕다.

그아아아!

아그니스 체스퍼가 노성을 토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군터는 피하지 않고 창대를 세워 막아냈다. 때린 부분이 창날 일부까지 걸쳐 주먹에서 피가 튀었으나 검은 거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거리가 생기자마자 득달같이 찌그러진 창을 휘둘렀다.

'지금!'

조금 전까지는 이런 경우, 피하거나 흘려 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군터는 두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떨어져 내리는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쳤다. 일점에 힘을 모으는 섬전 같은 찌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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