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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81화 (281/1,064)

281화

"이럴 수도 있다고 당연히 생각했어야 했는데, 실책이군."

변명을 하자면, 막다른 곳에 다다른 상대라고 생각해서였다. 사방이 막힌 우리에 갇혀 있던 짐승에게 한 방향의 문을 열어주면 그 방향으로 앞만 보고 뛰쳐나가는 것처럼, 제국군 역시 그러하리라 대충 짐작한 것이다.

끌어낸 것은 좋았는데, 보다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 불찰이라면 불찰이다.

'그건 그렇고, 어지간히도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시선을 돌린 것은 좋다. 사각에서 치고 들어오는 것 또한 좋다.

그런데 그렇게 치고 들어오는 방향이 상상 이상이다.

"막아! 물러서지 마라!"

정확히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대장기를 보고 달려오고 있는 것일까? 바깥쪽을 할퀴고 지나가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얕은 쪽을 돌파하고 빠져나가리라 생각했었는데…처음부터 승부를 보겠다는 양 덤벼들고 있지 않은가.

'그게 아니면, 얕보인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기분은 좋지 않다. 적의 무모한 돌격을 조금도 저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아아악!"

적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정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일 정도로 적의 기세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허공을 가르는 화살마냥,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 예리함의 끝에는 두 자루 창을 마구 찌르고 휘둘러대는 한 무장이 있었다.

"아그니스 체스퍼……."

실로 무시무시했다. 감탄이 나오는 수준을 넘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는 달려드는, 막아서는 병사들을 무슨 잡초 베듯 쓸어버리고 있었다. 일전에 상대했었던, 타칸 연합의 족장 '발루아'가 이제껏 그가 봤던 이들 중에 용맹함으로는 단연 으뜸이었는데, 저 아그니스 체스퍼로 추정되는 무장은 그 용맹스러웠던 타칸 연합의 족장보다도 더했다.

뿐이랴. 그를 뒤따르는 병사들 역시도 놀랍도록 용맹했다. 믿기지 않지만, 끄트머리에서 말을 달리는 병사조차도 어지간한 무관 수준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야말로 벼리고 벼린 칼이로군.'

저들이 쌓아올린 믿기지 않는 전과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러나 감탄스러운 것은 감탄스러운 것이고, 대응은 해야 했다. 이대로라면 기어이 막고, 적을 섬멸한다 해도 피해가 쓸데없이 커질 것 같았다.

"정면에서 막지 마라! 길을 내어주고 허리를 끊어라! 그리하면 적의 기세는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전쟁은 머릿수로 하는 것이다'라는 군사의 격언이 있다. 전략이니 전술이니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출 수도 있는 말이지만, 이 말은 절대적이라 할 수는 없어도 대개는 옳다.

머릿수, 즉 병력은 곧 군대가 발휘할 수 있는 힘 그 자체다. 전략이니 전술이니 하는 것은 전쟁을, 전투를 더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력이 약한 쪽에서 전력이 강한 상대를 이기기 위해 쥐어짜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전략보다는 전술이 그렇다.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이기기 위해 강구하는 수단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전술은 도박성이 짙은 기책에 해당한다. 성공하면 확실히 이득을 볼 수 있지만, 실패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전력이 강한 쪽은 그런 위험부담을 질 필요가 없다. 전력이 강한 쪽은 상대의 수에 흔들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우직하게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승리를 챙길 수 있을 확률이 높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전쟁은 머릿수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믿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틀림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무모했다."

그의 기준에서, 아그니스 체스퍼의 선택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왜 그가 이런 공격을 감행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정말로 자신의 목을 노렸던 것일까? 고작 수백 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뭐,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

타라냐드의 지원 없이 독단적으로 군을 이끌고 나왔다면, 그에게도 뒤가 없었다는 뜻이다.

정말로 화려하게 마지막을 불태우려 했을지도 모른다. 무모하고 아니고는 중요치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튼 나쁘지 않게 됐군.'

표현이 박했지만, 실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다. 어찌 되었든 그 아그니스 체스퍼의 수급이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대족장의 목만큼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상징성이 있다.

프롱기우스 백작은 점점 속도와 수가 줄어들어가는 제국군을 보며 살짝 상념에 잠겼다.

그 순간.

"저, 적이다!"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라고……?"

소리가 들린 반대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또 다른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게리즈가 잘 해주었군요."

"원신께서 녀석의 이름을 불러주실 것이다."

점점 조여 들어오는 적들의 한복판에서도 멈추지 않고 말을 달리고 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장군의 갑옷을 입어보겠느냐며 호탕하게 웃은 그의 수하는 지금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도…곧 너의 뒤를 따라가게 되겠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구를 들었다. 머리 위까지 가져갔다가, 문득 든 생각에 그대로 내리지 않고 성의 없이 내던졌다.

"장군?"

"쓰지 않으련다. 거추장스러워서 말이다."

이기든 지든 마지막이다. 그렇다면 바람이나 실컷 맞고 싶었다.

"적장의 목을 베기 전까지 멈추지 않겠다. 알겠느냐."

"옛!"

"좋아. 가자."

본격적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곧 적들이 반응했다.

하지만 그들은 적들이 반전하기 전에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화살은 두 번 밖에 날아들지 않았다. 방패며 창을 앞세운 베이고르의 병사들이 금세 가까워졌다.

"망국의 망령들은 이제 그만 편히 잠들라-!"

아그니스 체스퍼는 우악스럽게 길을 뚫었다. 막아서는 적들은 그의 앞에서 짚단처럼 베여나갔다.

'음험한 군주여! 마지막으로 내게 힘을!'

양떼들 틈에 뛰어든 사자처럼 날뛰면서도 그는 부족함을 느꼈다. 처음 힘을 얻고 야만인들을 상대했을 때 느꼈던 짙은 고양감이 지금은 너무도 희미했다.

"아아아악!"

뻗어오는 창을 피하고 창두 끝을 잡았다. 슬쩍 힘을 주고 잡아당기니 창을 쥔 병사가 주르륵 끌려왔다. 두려움에 젖은 병사가 뒤늦게 창을 놓았지만 그보다 먼저 또 다른 창이 그의 목을 찔렀다.

"아그니스 체스퍼어어어! 네놈의 목은 나 에ㄹ……."

퍽!

우렁찬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던 무관은 이름 하나 제대로 읊지 못하고 낙마하여 쓰러졌다. 뒤따르는 말발굽에 짓밟히는 그의 얼굴에는 한 자루 창이 흉물스럽게 꽂혀 있었다.

"아그니스 체스퍼! 네 놈의 목은 내가 베어주마!"

"흑포장군의 목이라니! 신께서 내게 미소 지으시는구나!"

험악한 얼굴로, 험악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덤벼드는 적들을 맞이하며 아그니스 체스퍼는 크게 웃었다.

아무리 패전지장이 되었고, 죽으러 온 자리라지만 저 따위 잡배 놈들이 자신을 잡으려 든다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죽고 싶다는 소리를 어렵게도 돌려 말하는구나!"

일합에 검을 부수고, 검을 쥔 팔을 비틀었다. 그 다음 순간에 바로 섬전 같은 찌르기로 목에 구멍을 뚫었다.

"제국의 개! 아그니스 체스퍼!"

"그래! 내가 아그니스 체스퍼다! 빨리 죽고 싶은 놈들은 모두 내게 오거라!"

그는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맞아 싸우며 피의 비를 뿌렸다.

말은 달리던 방향을 잃었다. 적장의 목을 베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이제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의 노기는 사방에서 덤벼드는 적들을 향해 뜨겁게 들끓었다.

끝도 없이 몰려들었고, 끝도 없이 죽어나갔다. 그 수가 수십이 넘어갔을 즈음에는 두려워하며 물러설 법도 하건만, 흑포장군의 목이라는 보화는 두려움의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했다.

히히힝!

아무리 덤벼드는 족족 죽여 넘긴다고는 하지만,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모두 쳐낼 수는 없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뒤에서 낮게 들어온 칼날 하나를 미처 쳐내지 못했고, 그를 태운 전마는 뒷발을 베인 채 구슬피 울부짖으며 주저앉았다.

"놈이 낙마했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목을 베어라!"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기회를 엿보던 자들까지 가세하여 달려들었다.

서걱!

한줄기 선이 그어졌다.

그 선의 위 아래로, 뒤늦게 핏물이 터졌다.

거무튀튀한, 금속 같은 피부를 지닌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덩치에 비하면 다소 작아 보이는 창 한 자루를 쥔 채로.

*

처음 모습을 보인 적과, 후에 들이닥친 아그니스 체스퍼의 부대. 둘을 합쳐 대략 천. 거기서 백 정도가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할 수는 있겠지만, 뭐가 됐든 베이고르군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대장기를 노렸다면 뒤가 잡히든, 옆이 찔리든 상관 않고 그냥 내달렸으면 될 것을…이해가 가지 않는군."

막시밀리언이 혀를 찼다.

군터는 침묵했지만 그 역시 막시밀리언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발을 붙들린 게 아니었다. 그 스스로 멈춰 선 것이었다. 스스로 달리던 것을 멈추고 아군과 싸운 것이다. 목표로 했던 대장기는 포기하고서 말이다.

'이렇게 싸우다 죽으려고 돌아온 건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와 그의 병사들은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잘 싸워 버티고 있었다.

"아그니스 체스퍼의 병사들이 정예라는 것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던가?"

막시밀리언이 감탄하면서도 말끝을 흐렸다.

적아를 떠나, 제국군의 분전은 그야말로 눈부실 정도였다. 사방을 포위당하여 남은 것은 죽음뿐인 것이 확실한데도 그들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다. 제국군 하나가 죽어나갈 때 이쪽의 병사가 둘 셋은 죽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콰앙!

백 명이나 남았을까 싶은 제국군의 눈부신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가 있었다.

검은 돌덩이 같은 피부를 지닌 거인. 그의 주변으로는 시신이 가득했다. 그를 둘러싼 병사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영주님. 가도 되겠습니까."

"……."

흔들림 없는 굳은 눈.

막시밀리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터는 천천히 내쉬를 몰아, 날뛰고 있는 거인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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