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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80화 (280/1,064)

280화

밤이 깊어지는 시각. 군영 중간 중간 놓은 모닥불과 횃불만이 어둠을 밝혔다.

군영 바깥쪽에서 경계를 서던 무관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각하! 적들이 도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장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군을 물렸다. 그러면서 은밀히 정찰병들로 하여금 적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예상했던 대로, 적은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이것으로 적이 상당히 조급한 상태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각하께서 예견하신 대로입니다. 이건 정말이지……."

"치켜세워봐야 나올 것은 없네. 아무튼, 적들이 쫓아오고 있다 하니 이쪽도 맞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옛!"

아그니스 체스퍼의 제국군이 한도라를 빠져나온 것은 어둑해진 후였다. 그 은밀한 움직임이 야습을 위한 것인가, 도주를 위한 것인가.

'도주할 것이었다면 한도라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 이유가 없지.'

당연히 야습이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이쪽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아그니스 체스퍼 역시 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역시 녹록하지는 않군.'

막 행군이 끝나고 진지를 꾸렸다. 휴식을 시작하여 피로가 막 풀리려던 참이다. 여기서 일전이 벌어진다면, 그건 틀림없이 아그니스 체스퍼가 짜놓은 판 위.

시작하기 전부터 약간의 불리를 떠안게 됐다. 허나 이것까지 억울해 할 수는 없는 노릇. 프롱기우스 백작은 수하 무관에게 일러 지휘부 회의를 위해 영주들을 소집하게 했다.

*

'부산스럽군.'

장교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안 그런 척 하고 있지만, 행동은 둘째치고 그들의 얼굴 표정에서부터 급한 기색이 엿보였다.

'혹시. 움직인 건가.'

막시밀리언은 그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군터는 프롱기우스 백작이 허무하게 군을 물릴 때부터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독심을 가지고 있는 프롱기우스 백작이 적을 앞에 두고 그냥 발을 뺄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적을 앞에 두고 그냥 놔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반드시 온다.'

무슨 근거냐고 묻는다면 그저 감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군터는 확신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 아그니스 체스퍼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분노의 편린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예 이 땅에 다시 발을 디디지 않았다면 모를까, 소수 병력으로 무모하게 남의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는…그만한 각오도 동반했을 터.

'틀림없다.'

혼자서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막시밀리언이 친위병 몇을 거느리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향하는 곳은 프롱기우스 백작의 막사가 있는 방향.

'그래. 역시 오는군.'

아주 조금, 마음이 편치 않다.

아그니스 체스퍼도 그렇지만,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을 적들은 아마도 모두 이전 자신과 함께 싸웠던 전우들일 것이다. 한때는 그들과 서로 등을 맞대고 타칸 연합과 싸웠었는데, 이제는 그들과 서로 칼을 겨누고 목숨을 다퉈야 한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된 상황에서, 마음에 틈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다.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선택은 오래 전에 했다.'

그날. 대전사 포라칸의 목을 베고 자그마한 승리에 위안을 얻던 밤에 아그니스 체스퍼에게 떠날 것을 이야기 하던 때. 이미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견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예측은 들어맞았다.

*

짧은 회의 후에 영주들이 막사를 나섰고, 이어 명령을 받은 장교들이 병사들을 움직였다.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란 것을 모든 병사들이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안락하기만 했던 늦저녁은 금세 살벌하게 변했다.

"우리의 임무는 치중(輜重)의 방어다."

막시밀리언은 군터와 코누다이안의 병사들을 이끌었다. 이전처럼 병과 별로 나뉘지 않고, 영주별로 부대가 나뉘는 까닭은 현재의 군이 기존 4군단이 아니라 2군단에서 합류한 영주들까지 더해진 복합적인 군대이기 때문이었다.

손발을 맞춰본 적도 없는 상황에서 괜히 무턱대고 병력을 섞는 건 유사시에 실속 없는 행위가 될 확률이 높다. 특히나 일시적으로 지휘권을 이양받았다고는 하지만, 프롱기우스 백작은 4군단장이었다.

2군단에서 합류한 영주들은 그가 함부로 다루기에 여러모로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일 수밖에 없었다.

'후방이라.'

조금은 여유로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시밀리언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적은 소수. 소수가 다수를 상대함에 있어 취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전략은 유격전이다. 우리는 후방에 있는 것이 아니야."

군대가 타칸 연합의 영토 깊숙이 들어오게 되면서 본국에서부터 이어지던 보급선이 자연히 끊어졌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보급품은 바로 이 치중이 전부였다. 바꿔 말하면, 만에 하나 이 치중을 잃게 되기라도 하는 순간 군대 전체가 위기를 게 되는 것이다. 그 어떤 군대도 먹지 않고 싸울 수는 없으니까.

막시밀리언의 말은 풀어지려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그의 말처럼, 후방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적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충분하지.'

그가 알고 있는 아그니스 체스퍼는 영리하지만, 그 이상으로 과감한 사내다. 치중의 위치를 파악했다면 직접 소수 병력을 이끌고 이곳을 치러올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잠잠하군요."

그러나 현재까지는 조용했다. 적이 움직였다는 보고가 들어온 이후 다른 보고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정찰 병력들이 당해버린 것인지, 아니면 정찰병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좋지 않군."

막시밀리언의 말마따나, 좋지 않다.

보고가 들어온 직후 빠르게 진지를 거두고 트인 지형으로 움직인 탓에 시야를 가리는 것은 없었지만, 날이 저물어 주변 자체가 다 어두웠다.

멀리 보지 못하니 적의 접근을 알아차리기 힘들고, 혹여 적들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면 대응하기도 쉽지 않다.

"적들은 마음대로 우리를 애태울 수 있지. 혹여 오늘 밤에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것도 없이 피로만 쌓은 꼴이 된다."

막시밀리언이 중얼거렸다.

그의 옆을 지키던 군터는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을 부정했다.

"올 겁니다."

"어떻게 알지?"

어떻게 아느냐고.

군터는 살짝 고개를 위로 꺾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 서늘함 속에 은밀히 숨은 비릿함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이 밤이 지나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는 이미 울타리를 뛰쳐나왔습니다. 오늘 밤에 승부를 보려 할 것입니다."

"모호한 말이군."

막시밀리언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는 군터의 말에 달리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군터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진지하지 않은, 그저 가벼운 여흥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적이다아아아-!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소리.

"군터 경. 자네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르겠군."

막시밀리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

적의 출현을 거리낌 없이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말발굽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밤은 어둡고 조용했기에, 이따금씩 크게 우는 새소리가 아니라면 귀를 자극할 만한 소리는 일체 없다.

그런 와중에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나마 울려 퍼지는 소리는 확신을 갖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것, 말발굽 소리는 정찰대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규모가 컸다. 어둠에 묻혀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찍이서 먼지구름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온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기약 없이 길어지는 대기 탓에 식어버렸던 분위기가 일순 다시 후끈 달아올랐다. 대형을 갖춘 병사들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고,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방향이었다.

소리도, 먼지구름도 점차 가까워졌다.

꿀꺽!

한 병사가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물 한 모금 시원하게 꺾어 마시는 것 같은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전후좌우의 다른 병사들의 귀에도 들릴 만큼 컸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내놓고도 병사는 자신이 그러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신경은 멀찍한 정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보인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렴풋하게 보였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달려오고 있는 기마들이.

'뭐, 뭐지? 잘못 본 건가?'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계속 보고 있자니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싶었는데,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기수가…없잖아?'

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헌데, 그 말들의 위에 타고 있어야 할 적병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적이 없……."

병사가 확신했을 때는 다른 이들도 그것을 눈치 챈 후였다.

"적이 없다!"

"말들뿐이야!"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전열의 눈 좋은 병사들과 장교들이 목소리를 높였을 때, 군의 중앙에 있던 프롱기우스 백작은 소리 없이 웃으며. 조금 당겨 오는 뒷목을 주물렀다.

"방향을 틀어라. 지금 당장. 전방을 제외, 좌우는 물론 후방에서도 적이 출몰할 수 있다."

"옛!"

급히 지시를 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면에서 달려오고 있는 저 많은 수의 말. 아무리 못해도 오백 마리는 넘어 보이는데, 저만한 말을 단 한 번의 기만을 위해 풀었다고?

'아아. 하긴. 한도라를 점령했다면 그 안에 있었던 말들 역시 다 취했겠군.'

타칸 연합은 사람 한 명당 말 한 필이라고 봐도 좋은 족속들이지 않은가. 그리 생각해보면 이해는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배포와, 재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 적이다!"남서쪽.

완만한 언덕 위에서 또 다른 먼지구름을 지피며 접근해오는 일단의 병력.

"오래 가는 것치고 이유 없는 이름은 없지."

아직 진형을 다 갖추지 못한 베이고르군에, 제국의 깃발을 높이 든 기마대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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